192화
대영박물관 측에서는 나이트와 워더의 매입 가격으로 200만 파운드를 제시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약간 낮은 가격이었지만 도윤과 최서라는 그냥 두 개의 기물을 그들에게 넘기기로 했다. 이미 박물관 측의 도움을 받아 런던에 온 진짜 목적을 달성한 뒤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약간의 가격 차이를 가지고 지루한 협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자 도윤과 최서라는 다시 박물관을 찾아 리엄 실장과 맥그리거 실장을 만났다. 네 사람은 그레이 코트에서 간단하게 차를 마시면서 애기를 나눴다.
“덕분에 런던과 에든버러 모두 두 세트의 온전한 루이스 체스맨을 소장할 수 있게 되었어요. 양쪽 박물관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리엄 실장과 맥그리거 실장은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도윤과 최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으면 체스맨 세트를 완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서라가 새로운 능력을 전해 받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리엄 실장은 최서라가 정신을 잃기 전에 조합한 체스맨 세트가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전했다.
“연구원들과 함께 계속 논의를 해야 하겠지만 최박사가 조합했던 세트는 아마 그대로 인정될 가능성이 커요. 그러면 바로 그 세트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겠죠. 현재로서는 그 세트의 기물들이 모두 한 사람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거든요. 나중에 다시 런던에 오시면 꼭 우리 박물관에 들러서 자신이 조합한 세트를 눈으로 확인하세요.”
도윤과 최서라는 그게 실제로 원래의 한 세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론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리엄과 맥그리거와의 티타임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쩌다 보니까 보름이 넘게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장기 출장을 한 셈이 되었다.
최서라는 벌써부터 자신이 새로 얻은 능력을 시험하고 훈련하는데 푹 빠졌다. 그녀는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도윤이 어떤 기내식 메뉴를 고를지, 기내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중에서는 어떤 영화를 볼지, 그리고 가지고 온 책들 가운데 어느 것을 읽을지 등을 일일이 알아맞히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시도할 때마다 어김없이 성공했다.
도윤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분간은 그냥 웃어넘기기로 했다. 실제로 처음 능력을 얻으면 자꾸 연습해서 되도록 빨리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게 좋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면 서너 번 이상 연속으로 능력을 사용할 경우 최서라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된다는 점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녀의 이른바 ‘알아맞히기 놀이’에 하루 종일 시달렸을 것이다.
“앞으로 한 달 간은 나한테 그 능력을 쓰는 걸 허락할게.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 일상생활에서 자꾸 그 능력을 쓰는 건 완벽한 사생활 침해라고. 내가 뭘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를 항상 나보다 먼저 아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건 정말 불편한 일이라는 거 알지?”
그의 말에 최서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죠. 저도 힘들어서 그렇게 일상적으로 능력을 쓸 수는 없어요.”
그녀는 귀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윤으로서는 그 미소가 미덥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자기 손으로 몸에 족쇄를 채운 것 같은 느낌인데?
* * *
두 사람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다음날 최인탁 회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원래는 병문안을 갈 생각이었는데,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최 회장이 퇴원한 뒤였기 때문이다. 최 회장의 얼굴에는 아직 병색이 남아 있었다. 도윤은 고작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그의 모습이 왠지 전보다 훨씬 수척해졌다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섬뜩했다.
거실에서 횔체어를 탄 채 두 사람을 맞이한 최 회장은 왜 왔냐며 타박부터 했다.
“젊은 녀석들이 자기 할 일 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녀야지 죽어가는 늙은이는 왜 보러 와?”
겉으로는 그런 소리를 했지만 두 사람의 방문을 내심 반기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는 작년에 도윤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뒤에는 한동안 거의 매일 같이 회사에 출근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몸이 쇠약해지면서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도 출근하는 날보다 집에서 쉬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룹에 대한 장악력 역시 전보다 약해진 상태였다.
최서라는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도윤은 자칫 분위기가 어두워질 까봐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죽어가기는 누가 죽어갑니까? 그런 얘기는 증손자를 품에 안은 뒤에나 하세요. 얼른 일어나셔서 저희랑 함게 산책도 다니고 그러셔야죠? 아니면 회사에 출근해서 예전처럼 임원들에게 호통을 치시던가요. 이렇게 앉아 계시는 건 회장님답지 않습니다.”
도윤의 얘기에 최 회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호통 같은 소리 하네. 이젠 기운이 딸려서 호통은커녕 살살 타이르는 것도 버거워. 그리고 그놈들도 이미 대가리가 여물어서 내가 호통을 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에이. 왜 또 엄살을 부리고 그러세요? 소문을 들으니까 회장님이 목소리를 조금만 높여도 임원들이 온몸을 덜덜 떤다던데요?”
최회장이 다시 한 번 피식 웃더니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가리켰다.
“오랜만에 와서 흰소리만 하지 말고 어깨나 좀 주물러 봐. 네 안마 좀 받아보자.”
도윤은 얼른 휠체어 뒤로 다가가서 최 회장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는 일부러 정신까지 집중하면서 최 회장의 몸에 치료 능력을 잔뜩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미 팔십이 넘은 그의 몸은 밑바닥이 깨진 항아리나 마찬가지였다. 애써 집어넣은 치료 능력이 별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안개처럼 최 회장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이미 치료 능력이 먹히지 않는 상태가 됐어. 오래 못 가시겠구나.’
도윤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져서 저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그러자 최 회장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의 손등을 툭툭 쳤다.
“이놈, 아직 젊은 녀석이 벌써부터 손끝에 힘이 빠졌네? 좀 더 꽉꽉 누르지 못해?”
도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힘이 빠지긴요? 잘못하면 회장님 어깨뼈가 부러질까봐 그러죠. 살살 오래 눌러 드릴 테니까 그냥 눈 감고 편안히 기대계세요.”
소파에 앉아 있던 최서라는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로서는 전보다 눈에 띄게 약해진 할아버지의 모습을 대하자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벌리면 울음부터 터질 것 같아 그냥 꼭 다물고만 있었다.
그래도 도윤이 불어넣는 치료 능력이 어느 정도는 몸을 편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최 회장은 정말로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등을 기대고 있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는 언제 결혼할 거냐? 아까 죽는다는 소리는 증손자를 품에 안고 나서나 하라고 했지?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너희들이 나 죽기 전에 증손자를 안겨줄 수 있겠어?”
도윤은 갑자기 튀어나온 결혼 얘기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이 양반이 농담으로 한 얘기를 실화로 만들려고 하시네? 최서라가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가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나 죽기 전에 네가 시집가는 걸 보는게 내 평생 남은 소원이다. 이미 너희 둘이 사귄다는 걸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마당인데 굳이 미룰 거 뭐 있냐? 이왕 할 거면 나 죽기 전에 해. 할애비 영원히 사는 거 아니다.”
최서라가 도윤의 얼굴을 흘깃 보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결혼 얘기를 그렇게 갑자기 꺼내시면 어떡해요? 안 하던 얘기를 하시는 거 보니까 혹시 요즘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그 말에 최 회장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우리 장남하고 장손이 요즘 들어 갑자기 효성이 지극해졌어. 작년까지만 해도 회사에서도 얼굴 보기가 힘들던 녀석들이 요즘은 걸핏하면 문안 인사드린다고 집에까지 찾아와.”
자식들이 자주 찾아온다는 얘기를 하는 최 회장의 얼굴이 말과는 달리 너무 쓸쓸했다. 벌써 후계 경쟁이 시작되었구나.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도윤도 입맛이 씁쓸했다. 그가 만난 최 회장의 장남과 장손은 효도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현재 미래 그룹의 차기 회장감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사람은 장남이 아니라 둘째인 최병호 미래전자 사장이었다. 최서라의 아버지인 그가 사장으로 있는 미래 전자는 그룹 내에서 자산과 매출이 가장 큰 일종의 얼굴 마담 같은 기업이었다. 형식적인 지주 회사는 청파 갤러리였지만 사람들이 미래 그룹하면 떠올리는 곳은 역시 미래전자였다.
반면에 젊은 시절부터 인간성과 사업 양쪽 측면에서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켰던 장남 최병준은 현재 미래 건설 사장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상 후계 경쟁에서 동생에게 밀려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둘째 최병호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장남이 아니라 청파 갤러리 관장인 최수아가 그룹을 승계할 거라는 얘기까지 나도는 형편이었다.
최서라가 다시 한 번 목을 가다듬더니 최 회장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큰 아버지하고 오빠들이 성격은 좀 거칠어도 원래부터 할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더구나 요즘은 할아버지가 자꾸 아프시니까 자주 찾아뵙는 게 당연하잖아요.”
하지만 최 회장은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주식과 부동산의 명의를 이전하는 작업을 조금씩 진행 중이다. 내년 봄까지는 그룹 승계 작업을 마무리 할 생각이야. 그게 끝나면 너희들도 더 미루지 말고 결혼식을 올려. 그것만 끝나면 나도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
말을 하던 최인탁이 뒤에서 안마를 하고 있던 도윤의 손을 툭툭 두드렸다.
“병원 의사들이 어떻게 하든 내년 봄까지는 나를 살려두기로 약속했어. 그래도 이 녀석 손맛이 예전 같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저승 문턱이 멀지 않은 게 사실일 거야. 그 전에 내가 먹은 그릇 설거지는 다 끝내고 갈 테니까 너희도 더 이상 미루지 마라.”
그 말을 끝낸 최 회장은 갑자기 피곤해졌다면서 집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을 불렀다. 대기하고 있던 남녀 한 쌍이 거실로 들어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최 회장의 휠체어를 내실 쪽으로 밀고 가기 시작했다.
도윤과 최서라는 전보다 훨씬 좁아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집을 나섰다. 내년 봄이라……. 의사가 아니니 정확하게 진단하기는 어려웠지만 도윤이 느끼기에도 최 회장의 수명은 마지막 남은 심지를 태우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내년 봄까지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은 힘들 거라는 게 그의 손끝을 전해진 직감이었다.
* * *
최 회장을 만나고 돌아온 며칠 뒤 도윤은 오광표와 오주현 부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는 아직 학생인 주현이의 편의를 위해 직접 차를 몰고 분당까지 갔다. 식사를 마친 뒤, 도현이 미국에서 받아온 네 장의 밀봉된 추천서와 함께 USB 하나를 주현에게 건넸다.
“추천서들은 모두 네가 지원하고 싶다고 얘기한 대학들에 맞춰서 작성됐어. USB 안에 캠퍼스 사진을 포함해서 그 대학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아뒀으니까 시간 날 때 한 번 살펴 봐. 운송 시간까지 감안해서 기일에 늦지 않게 원서를 보내야 한다는 것 잊지 말고.”
도윤의 말에 오주현이 추천서와 USB를 받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요. 나중에 꼭 은혜를 갚을게요.”
“은혜 갚을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네 그림은 미국에 있는 장찬수라는 분에게 맡겨뒀다. 원서 보내면서 연락하면 곧바로 각 대학으로 보내줄 거야. 굳이 한국까지 다시 가지고 왔다가 다시 보내느니 현지에서 부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어.”
다시 만난 그녀의 표정은 전에 비해 훨씬 밝아져 있었다. 아무래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일에 매진하다 보니까 힘들기는 하지만 저절로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광표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제 딸 문제로 수고를 많이 끼쳤습니다. 어머니 일도 그렇고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히려 제가 신세를 끼쳤지요. 노영태 변호사님하고 함께 인도까지 다녀오셨다면서요? 그 일 때문에 휴가까지 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회사에는 밝히기 곤란한 일이라서 몰래 다녀오기는 했지만 오성 전자는 이미 데바 인스트루먼트를 포기했습니다. 워낙 가능성이 큰 회사이니 구글에 넘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박사가 대주주가 되는 편이 낫죠. 저도 나름대로 얻는 게 있는 출장이었습니다.”
오광표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한 기업의 임원으로 있는 사람이 어쩌면 다른 회사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는 일을 위해 나선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윤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 * *
도윤과 최서라가 미국과 영국을 오가는 동안, 그의 전담 변호사인 노영태는 비밀리에 인도로 날아갔다. 데바 인스트루먼트라는 회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정확한 실태 파악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반도체 분야의 전문가가 한 사람 필요했는데, 도윤은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오광표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광표는 선뜻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그 일을 위해 휴가까지 냈던 것이다.
노영태는 인도에 가기 전에 미리 데바 인스트루먼트에 이메일을 보냈다. 당신네 회사에 투자를 하고 싶으니 직접 방문해서 회사를 둘러보고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을 담은 메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에이솔 인베스트’라는 투자 회사의 투자 담당 이사라고 밝혔는데, 그 곳은 도윤이 노영태의 도움을 받아 조세 회피 지역에 설립한 몇 개의 투자 회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동행한 오광표를 위해서도 비슷한 명함을 따로 준비했다.
답장은 즉각 날아왔다. 오광표나 딥 드림의 싱 부사장에게 들었던 대로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사정이 다급한 게 분명했다. 노영태는 몇 차례의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데바 인스트루먼트와 일정을 협의한 다음에 곧바로 벵갈루루 행 비행기를 탔다. 시간이 별로 없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벵갈루루는 인도의 내륙 한복판에 위치한 대도시였다.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불릴 정도로 IT 산업이 발달한 그곳은 천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밀집한 곳이기도 했다.
노영태와 오광표는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며 거의 스무 시간 가까이 비행한 끝에 벵갈루루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데바 인스트루먼트에서 보낸 직원이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채 마중 나와 있었다. 그가 끌고 나온 차를 타고 벵갈루루 시내의 호텔에 짐을 푼 두 사람은 바로 그날 저녁, 데바 인스트루먼트 본사로 찾아갔다.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재무 담당 이사인 나라얀 쿠마르라고 합니다.”
“에이솔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담당 이사인 노영태라고 합니다.”
“에이솔 인베스트먼트의 기술 자문 역을 맡은 오광표입니다. ”
세 사람은 명함을 건넨 뒤에 회의실에서 마주 앉았다. 데바 인스트루먼트 쪽에서는 나랴얀 쿠마르 말고도 여러 명의 직원들이 배석한 상태였다.
“저희 회사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쿠마르 이사의 말에 노영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일을 통해 말씀드렸듯이 저희 회사는 데바 인스트루먼트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메일로 보내주신 자료는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상세한 자료를 봤으면 하는데요. 그 점에 대해서도 지난 번 메일에서 자세하게 언급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혹시 지금 열람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제공하는 자료는 모두 회사 안에서 서류를 통해서만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그 동안 휴대폰을 비롯한 일체의 전자 장비는 저희에게 맡겨두셔야 합니다. 그 점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보안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지요.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노영태와 오광표는 매일 같이 데바 인스트루먼트에 출근했다. 두 사람은 산더미처럼 출력된 자료들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회사의 기술력과 재무 건전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