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27. 가드너 미술관>
도윤이 단 한 번의 접견을 끝으로 더 이상 그리넘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자 조명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무리 현직 검사라고 해도 그런 식의 특별 면회를 자꾸 만들어주기는 껄끄러웠던 것이다. 게다가 도윤이 혹시 무슨 일을 당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곧 올 거라고 약속했던 변호사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영국으로부터도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그리넘은 당연히 다니엘의 방문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사실 최근 들어 저택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던 그가 멀리 한국까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접견실에서 도윤을 만났을 때는 그리넘도 환각의 영향을 받아 사리 판단을 분명하게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중에 맑은 정신이 돌아오면 여러 가지 면에서 다니엘의 방문에 이상한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은 뒤일 것이다.
“영국도 아니고 한국 감옥에 갇혀 있는 놈이 뭘 어쩔 수 있겠어. 게다가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외부로 편지를 보내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인데.”
그리넘은 이도윤이라는 유명인사를 납치해서 목숨까지 위협했던 중대 사건의 피의자였다. 그 때문에 그는 구치소에서도 특별관리 등급을 받았는데, 이 등급의 수감자는 원칙적으로 외부와의 서신 교환이 제한된다. 도윤이 클라우드 저장소의 파일과 예약 문자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 내용만을 바꾼 것은 그런 상황을 감안한 것이었다.
그리넘의 일을 처리한 그는 노영태 변호사와 함께 잠시 부산을 한 번 더 다녀왔다. 천상섭을 만나기 위해서다. 워낙 큰 금액이 관계된 일이라 노 변호사의 도움을 얻어 세금과 투자 관련 업무를 함께 진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 전화로 경매 결과를 전해 들었을 때, 천상섭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도윤은 전화가 끊긴 줄 알았을 정도였다. 한참 뒤에야 간신히 입을 뗀 그는 목소리를 덜덜 떨었다.
“지금, 어, 얼마라고 그러셨습니까?”
“25억 7천만 위안입니다. 한화로는 4600억 정도 됩니다.”
4600만원이 아니라 4600억이란다. 천상섭은 그 돈이 얼마나 큰 액수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윤은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유기찬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호텔 있지 않습니까? 조금 깎으면 그걸 인수할 수 있을 정도의 액수입니다. 물론 수수료하고 세금을 내고 나면 천 억 이상 줄어들겠지만요.”
다시 말해 천상섭이 그를 무시했던 유기찬에 버금가는 부자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가 4600억 전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일단 모든 미술품 거래에 대해 과세를 하지 않는 홍콩과는 달리 중국은 원칙적으로 경매를 통해 얻은 소득의 15%를 세금으로 부과한다. 물론 이것도 세부 사항에 들어가면 세무사나 변호사의 조력을 얻어야만 할 정도로 내용이 복잡한데, 천상섭의 경우는 그 문제를 아리스 옥션에서 처리해주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에서도 세금을 내야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세율이 상당히 낮았다. 원래 한국은 홍콩과 더불어 미술품 거래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둘 뿐인 나라였다. 그러나 2013년부터 세법이 바뀌면서 미술품 거래로 인한 소득도 과세 대상이 되었다. 다소 복잡한 얘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판매가의 4.4%가 최대 세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단 중국 당국이 가져가는 세금과 경매 수수료 10%, 그리고 제가 받기로 한 중개료 5%까지 제하면 최종적으로 받게 되는 돈은 3200억 정도가 될 겁니다. 거기서 나중에 우리나라에 내야 하는 세금까지 다 떼도 3000억 이상은 받게 되실 거예요.”
4600억이나 3000억이나 천상섭으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 돈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도윤의 생각은 달랐다. 그 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는 연말에 또 다시 세금 폭탄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걸 피하려면 투자를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데, 기껏해야 한식집을 운영하는 천상섭에게 그와 관련된 지식이 있을 리 없었다.
천상섭을 만난 노영태 변호사는 앞으로 내야 할 세금 목록을 정리해서 알려주는 한편, 당장 통장으로 들어온 돈을 어떻게 분산투자하는 게 좋을 지에 대해서 쉽고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마저도 천상섭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내용이 많았지만 결국 노영태와 변호사 선임 계약을 맺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200억 정도를 현금으로 가지고 계세요. 그래야 세금 문제를 비롯해서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지출에 대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제가 빠른 시일 내에 투자 계획을 수립해서 다시 찾아뵐 테니까 그때 가서 차분하게 논의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그리고 이 박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천상섭은 부산 역까지 두 사람을 배웅 나와 거듭해서 구십 도로 허리를 굽혔다. 도윤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다시 한 번 입단속을 할 것을 부탁했다.
“홍도관이 거액에 낙찰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국내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되었으니까 숨기는 게 불가능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제가 경매를 대리했다는 것만 알지 정작 홍도관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몰라요. 천 선생님도 가능하면 그 일을 남들에게 언급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안 그러면 번거롭고 성가신 일들이 많이 생길지도 몰라요.”
“물론입니다. 로또만 당첨돼도 사돈의 팔촌까지 의가 상하는 세상인데, 이건 로또를 10번 당첨돼도 벌 수 없는 돈이 아닙니까? 티 안내고 얌전히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유기찬이 천상섭의 존재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최서라가 한 차례 경고 전화를 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성가시게 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유기찬의 등골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주 거래 은행에서 적잖은 돈을 대출 받으셨더군요. 그 은행의 은행장께서 저희 아버님과 친분이 두터우세요. 어차피 사업하다 보면 이런저런 인연으로 엮일 수밖에 없는 게 이 바닥인데 서로 점잖게 웃으면서 사는 게 좋지 않겠어요?”
6월 마지막 째 주, 도윤은 최서라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과 런던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대략 열흘간의 일정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언론을 통해 천상섭의 이름이 언급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 *
이번 일정에서는 석훈을 대동하지 않았다. 그리넘이 남긴 파일을 분석한 결과 현재 다니엘 로스차일드로서는 에티오피아의 일을 잘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본래 에티오피아의 참 십자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브라힘 왕세제가 노리는 물건이었다. 아디스아바바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이 활동하고 있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다니엘이 십자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을 상대하는데 모든 인원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할 판이었다. 그리넘 일당까지 모두 체포된 현재 상황에서 도윤에게까지 신경을 쓰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석훈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었다. 오직 녀석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석훈이 너는 독일하고 오스트리아에 좀 다녀와야겠다.”
“독일하고 오스트리아요? 저 혼자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도윤의 지시에 석훈은 깜짝 놀랐다. 그동안 꾸준히 공부해온 덕에 녀석의 영어 실력은 처음 도윤을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물론 아직 능숙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외국에 나가서 길을 묻거나 물건을 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다만 독일어는 녀석에게 여전히 외계어였다.
도윤은 썩 내켜하지 않는 녀석을 붙잡고 차분하게 설득했다.
“우리가 마르케스의 집에서 얻었던 소총하고 실탄들 말이야. 짤츠부르크하고 뮌헨에 있는 컨테이너 창고에 반씩 나누어서 맡겼잖아. 그걸 전부 찾아서 분해한 다음에 에티오피아로 보내야 할 것 같아. 그걸 네가 좀 해줘야겠다.”
컨테이너 창고에 보관 중인 총기는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물건들이었다. 아직까지는 꼬박꼬박 보관료를 보낸 덕분에 별 탈 없이 보관 중이었지만 그렇다고 평생 거기에 그냥 내버려두기는 곤란했다. 도윤은 이번 기회에 그것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석훈에게 USB를 하나 건넸다. 그 안에는 총기를 보낼 아디스아바바 주소 두 곳과 함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국제 화물을 보내는 방법을 자세하게 적은 매뉴얼이 들어 있었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를 영어와 독일어 표현까지 꼼꼼하게 첨부했다.
“독일어로 써 놓으면 뭐해요? 읽을 수도 없는데. 솔직히 제대로 할 자신이 없어요.”
“걱정 마. 밑에 우리말로 발음 다 적어놨으니까. 정 안 되면 적어서 보여주면 되잖아. 자신을 가져. 넌 할 수 있어.”
“거참, 칭찬을 들으면서 기분 나쁘기도 오랜 만이네. 정말 꼭 필요한 일이에요?”
“아니면 네가 왜 굳이 널 보내겠냐? 꼭 필요한 일이야.”
숨겨놓은 총을 꺼내서 보내는 일이니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는 곤란했다. 석훈도 그걸 알기는 했지만 막상 외국에서 혼자 일을 처리해야 한다니까 영 막막한 모양이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가고 싶어. 하지만 가능하면 일찍 물건이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 미안하지만 네가 좀 고생해야겠다.”
만약 화물을 보내는 게 정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총과 실탄을 몽땅 꺼내서 강에 빠트리라고 했다. 그게 차라리 나중에 있을 문제를 없애는 방법이었다. 그제야 석훈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그에게 신용카드를 하나 건넸다.
“독일에서 물건을 보낸 다음에 조금 시간 간격을 두고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그래야 나중에 한쪽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른 쪽은 걸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 사이에 한샘이도 만나고 겸사겸사 축구 구경도 해. 필요한 비용은 이걸로 쓰고.”
도윤 덕분에 프랑크푸르트 2군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던 구한샘은 현재 1군에 올라가서 대활약을 하는 중이었다. 원래부터 재능이 있는 녀석인데다 베토벤의 데스마스크를 통해 우베 젤러의 능력을 전해 받은 뒤로는 발전 속도가 눈부시게 빨라졌다. 조만간 재계약을 하거나 영국 프리미어 리그로 트레이드 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도윤이 카드까지 건네자 그제야 석훈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원래부터 한샘의 팬이었던 녀석인데다 분데스리가 경기를 직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나아진 것이다.
“근데, 형. 이 카드로 혹시 민아 비행기 표도 함께 끊으…, 아 그건 안 되겠구나.”
갑자기 녀석에게 일을 맡긴 게 과연 잘한 일인지 조금 불안해졌다.
* * *
도윤과 최서라는 뉴욕 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택시를 타고 예약한 호텔로 직행했다. 그들이 체크인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이 호텔로 찾아왔다. 장찬수와 장은서 부녀였다. 두 사람과 먼저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오윤수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게 한 것이다.
“도착 시간을 말씀해 주셨으면 제가 차를 몰고 공항으로 마중 나갔을 텐데요.”
장찬수의 얘기에 도윤이 손을 내저었다. 무슨 도련님 행차도 아닌데 그런 일로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먼저 그동안 한국에서 처리한 일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은서가 만들어서 시중에 유통시켰던 위작들은 모두 회수해서 없앴습니다. 그러느라 저한테 맡겨놓은 돈을 다 썼어요. 두 분은 이제 진짜로 맨주먹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도윤은 말을 하면서도 장찬수, 장은서 부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그 점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한국에서 벌었던 돈은 없는 거라고 생각하고 지낸 지가 오래 됐기 때문이다.
“매달 지원해 주시는 돈으로도 이곳에서 생활하기에는 별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요즘은 저도 가끔씩 센트럴 파크에 나가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어요. 큰돈은 안 되지만 그래도 제법 용돈벌이가 됩니다. 덕분에 중고이기는 하지만 차도 하나 장만했고요.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살이 더 쪘습니다, 하하.”
장찬수의 웃음은 적어도 가식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도윤을 안심하게 했다. 장찬수는 한국에 있을 때도 초상화를 주로 그려주는 작은 화방을 했는데, 결국 뉴욕에 와서도 비슷한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 사이에 그림 값이 오르는 바람에 도윤은 장찬수가 팔아치웠던 위작들을 다시 사들이기 위해 그가 맡겨놓은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써야 했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장찬수라면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과의 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오윤수가 호텔 방문을 노크했다. 도윤은 세 사람과 식사를 하러 나가기 전에 따로 준비한 가방에서 20호 크기의 그림 네 점을 꺼냈다. 모두 오윤주가 그린 것이었다. 그는 그 그림들을 오윤수와 장은서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좀 한 번 봐라. 고3 학생이 그린 건데 너희들이 보기에는 어떠니?”
두 사람은 도윤이 꺼낸 그림을 유심히 살피더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데요?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아 보여요. 그래도 아이디어가 아주 참신해요. 게다가 그림에 자기 생각을 담을 줄도 아는 것 같고요. 이게 정말 고등학생이 그린 그림이에요?”
오윤수의 평가였다. 장은서의 생각도 비슷했다.
“제가 보기에 학원에서 그림을 배운 학생은 아닌 것 같아요. 뭐라고 할까, 구도를 잡는 방식이나 붓을 놀리는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조금 어설퍼 보이는 부분들이 눈에 띄거든요. 하지만 그런 부족함을 뛰어넘는 강렬한 느낌이 아주 매력적이에요. 나이답지 않게 벌써부터 자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학생이네요.”
그 정도면 만족스러운 평가였다. 도윤은 일단 그림들을 다시 포장해서 한쪽으로 치웠다.
“오윤주라고 미국에 있는 미술 대학에 진학시킬 학생이야. 몇몇 지인들에게 추천서를 받기로 했는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그림을 직접 보여주어야 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 앞으로 너희들 후배가 될 지도 모르는 학생이니까 나중에 만나면 잘 해 줘라.”
“정말이요? 그럼 재단의 세 번째 장학생이 되는 거예요?”
장은서가 가장 반색을 했다. 후배가, 그것도 이제 막 대학에 진학할 어린 여자 후배가 생긴다고 생각하니까 부쩍 호기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도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사실 장학생이 아니라 재단 소속의 화가들이지. 진짜 장학생은 윤주가 처음이고. 아참, 그리고 재단은 내년 초쯤에 정식으로 발족할 거야. 그러면 너희들도 한국에 와야 해. 말이 좋아 재단이지 당장은 후원하는 사람이 윤주까지 쳐도 셋밖에 안 되니까. 인원은 아직 얼마 없지만 다들 모여서 파티라도 한 번 하자.”
“정말입니까? 이야, 그럼 드디어 한국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겠네요. 다른 건 별로 불편함이 없는데 뉴욕은 한국 음식이 너무 비싸요. 어쩔 수 없이 사먹기는 하는데 가끔씩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가장 기뻐한 것은 오윤수였다. 하긴 녀석이 한국을 떠난 지도 벌써 만으로 2년째다. 대인 관계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에 가면 만나고 싶은 친구들도 꽤 있을 것이다.
윤수의 말도 있고 해서 도윤은 세 사람을 한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오랜만에 포식을 시켜주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고 입가심으로 수정과가 나왔을 때, 그가 굳이 뉴욕을 거치려고 한 진짜 용건을 꺼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내일은 너희들 작업실에 들러서 그동안 만들어놓은 성과를 좀 봐야겠다. 그림들이 괜찮다 싶으면 올 연말 쯤 미국에서 데뷔전을 열 생각이야.”
그의 말에 오윤수와 장은서, 그리고 장찬서까지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장은서는 거의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여러 아트 페어를 돌아다니며 부스를 열고 그림을 팔아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순수하게 자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연 적은 없었다. 그녀가 팔았던 그림들은 모두 남의 그림을 적당히 모작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제, 제 전시회를 연다고요? 그것도 미국에서요? 어…, 좋기는 한데 그래도 될까요?”
장은서는 전시회를 연다는 얘기에 기쁨보다는 걱정이 더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다독인 것은 최서라였다.
“물론이죠. 그림만 좋다면 누구나 전시회를 여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 동안 도윤 씨가 은서 씨 칭찬을 많이 했어요. 일 년 사이에 그림이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하지만 이어진 도윤의 말은 냉정했다.
“네 전시회가 아니야. 윤수하고 함께 하는 합동 전시회지. 그리고 전시회를 열지 안 열지의 여부는 내일 너희들 그림을 직접 보고 판단할 거다. 아직은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어.”
그동안 한국에서도 가끔씩 보내오는 사진을 통해 두 사람의 작업을 계속 체크해 왔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진과 실물은 같을 수가 없었다.
이튿날, 도윤과 최서라는 롱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두 사람의 작업실에 갔다. 오윤수와 장은서의 작업실은 서로 다른 층에 있었기 때문에 도윤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그동안 두 사람이 완성한 그림들을 살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오윤수와 장은서는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윤은 단순한 감정가가 아니라 가장 뛰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