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여긴 런던보다 더 춥네? 한국이 원래 이렇게 추운 곳인가?”
공항 청사를 나오자마자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 때문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서울 경기 인근에 며칠 째 영하 십도 이하의 한파가 계속되던 1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그리넘은 숨을 쉴 때마다 허옇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 임무는 시작부터 내키지 않는 점이 많더니 이제는 날씨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넘을 포함한 여덟 명의 전직 영국 특수부대 요원들이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했다. 도윤을 잡아서 석가모니 진신사리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다. 그중 다섯 명은 이미 열흘 전에 입국해서 모든 준비를 마쳤고, 그리넘은 뒤늦게 다른 두 명의 팀원들과 함께 공항에 도착해서 이제 막 주차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이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랍니다. 뉴스에 의하면 이상한파라고 하더군요.”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왔던 팀원 한 명이 굳이 할 필요 없는 대답을 했다. 그리넘은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도윤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내뱉은 질문에 부 팀장인 개리 올렌코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러시아 사람인 개리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영국으로 이민 왔다.
“동선은 다 파악이 됐나?”
“한 동안은 매일 화랑에 나가 그림을 감정해주는 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퇴근 후에는 가까운 지인을 만나거나 애인과 데이트를 즐기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어제부터 미술대회 심사위원을 맡아서 한남동으로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남동? 그리고 미술대회 심사위원은 또 뭐야?”
“서울의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강남 지역과 한강을 마주하고 있는 동네입니다. 그곳에 오성 그룹에서 운영하는 아리움 미술관이 있습니다. 현재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대회 심사가 그 미술관에서 진행 중입니다.”
“이도윤이 고등학생 그림을 심사한다고?”
“요즘 한국에서 이도윤의 이름이 꽤 유명해졌습니다. 그 덕분에 심사위원으로 위촉이 된 것 같습니다.”
“재밌게 사네. 누군 사는 게 재미없어 죽겠는데.”
입맛이 썼다. 인천대교를 건넌 차는 어느새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용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넘의 팀원들은 그곳에 있는 고급 타운 하우스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지하층까지 합해 전체 3층 구조로 되어 있는 타운 하우스는 어떤 영국 회사의 한국 지사가 임원용 별장으로 사들인 곳이었다.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였다. 원래 어느 유명 작곡가가 살던 그 집 지하층은 예전에 녹음실로 쓰이던 곳이었다. 덕분에 녹음실이 철거된 지금도 방음 시설이 완벽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타운 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키던 그리넘은 자기 숙소에 가방을 두자마자 부 팀장인 개리 올렌코를 따로 방으로 불렀다.
“이도윤 말이야. 겉으로 드러난 용모에서 특별한 변화의 흔적이 안보였나?”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다른 팀원들이 알면 곤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개리가 문 쪽을 힐끗 돌아보더니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없습니다. 저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예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이도윤은 물론이고 그와 늘 함께 다니는 안석훈이나 주변 인물들 모두 여러 차례에 걸쳐 꼼꼼하게 확인했습니다. 현재까지는 갑자기 젊어진 사람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아무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흡수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도윤은 워낙 나이가 아직 젊은데다 그나마도 동안인 편입니다. 설사 진신사리를 흡수했다고 해도 외모가 급격히 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라면 나중을 위해 보관해 둘 거야. 좀 더 늙었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야.”
“이도윤이 일하는 현소 화랑에는 지하 수장고와 몇 개의 금고가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 숨겨두었다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아직 어떤 보안 조치가 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넘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썼다. 결국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이도윤을 납치해서 고문과 협박을 통해 진신 사리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만약 본인이 가지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일이 엄청나게 꼬일 우려가 컸다.
“그래서 준비 상태는? 총기는 구했나?”
“권총 세 정과 실탄 백 발을 어렵게 구했지만 그걸로는 팀원의 절반도 무장시킬 수 없습니다. 놈을 납치해서 심문하는 것 역시 마취제나 자백제 같은 약물을 쓰는 게 나을 듯합니다. 다행히 그건 충분한 양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도윤한테 늘 붙어 다니는 경호원이 있잖아? 안석훈이라고 했던가?”
“다행히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밀착 경호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기 나라에 돌아오니까 긴장이 풀린 것 같습니다. 회사와 집에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이도윤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리움 미술관에 갈 때도 경호원을 동반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그럼 그 미술관을 오갈 때 손을 쓰는 게 낫겠군. 삼십분 후에 다들 거실로 모이라고 해.”
삼십분 후, 그리넘은 팀원들과 함께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도윤의 납치 계획을 세밀하게 점검했다. 일을 너무 서두른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지만 다니엘의 상태로 볼 때 최대한 빨리 성과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실패할 거라고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 * *
본심 첫날, 두 명의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대상 수상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둘째 날 최종적으로 결정된 대상 수상작은 그들이 밀었던 것과는 전혀 무관한 작품이었다. 처음부터 심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교수와 화가들이 다른 작품을 추천하는데 합의를 해 버렸기 때문이다.
‘뭐, 그런대로 납득할 만한 작품이 대상을 받게 되기는 했군.’
공연히 헛심만 쓴 꼴이 돼버린 국회의원들을 보며 도윤은 실소를 삼켰다.
이런 심사를 많이 해 본 교수와 화가들은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대상 수상작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르는 대신 국회의원들이 추천한 두 작품에 각각 금상과 은상을 수여한 것이다. 손현창이 적극적으로 밀고 도윤이 은근히 지원했던 ‘숭례문 야경’은 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큰 잡음 없이 모든 심사가 끝났다.
주최 측에 수상작들을 통보한 뒤에는 다시금 심사위원들을 위한 회식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리움 미술관 측에서 괜찮은 레스토랑을 예약했고, 근사한 요리들이 저녁 메뉴로 제공되었다. 도윤의 맞은편에 앉은 손현창이 건배를 권하면서 은근히 말을 건넸다.
“저는 ‘숭례문 야경’을 그린 학생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발상이나 터치가 고등학생답지 않아서요. 이 박사는 어떻습니까?”
“저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직접 만나서 좋은 그림을 왜 그런 식으로 마무리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요. 제가 이해하지 못한 특별한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시상식 때 한 번 오시지요? 이번 수상작들은 별관에서 한 달 간 전시될 겁니다. 시상식도 거기서 열리고요. 열흘 뒤니까 한 번 시간을 내시면 어떻겠습니까?”
시상식에는 본래 이번 대회를 주관하는 교육부와 문화관광체육부의 차관들, 그리고 심사위원장만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도윤과 손창현도 심사위원이었으니까 굳이 참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도윤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림을 그린 학생이 누군지 은근히 궁금한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미술 대회 홈페이지를 통해 수상작들이 발표되었다. 각 신문사에도 관련 보도 자료가 배포되었는데, 그제야 도윤도 각 수상자들의 이름과 소속 학교를 알 수 있었다.
“도산 고등학교 김지윤? 여학생인가 보네?”
그림의 선이 워낙 강하고 거칠어서 남학생이 그린 그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숭례문 야경’은 여학생이 출품한 그림이었다.
수상자가 발표된 일주일 후, 아리움 미술관 강당에서 조촐하게 시상식이 열렸다. 시상자를 포함한 몇몇 귀빈을 제외하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참석자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도윤은 손창현과 함께 나란히 귀빈석에 앉아서 시상식을 지켜봤다. 마침내 동상 수상자 김지윤의 이름이 호명되자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의 분위기가 워낙 과감하고 대범해서 차분한 학생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기뻐하네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상장과 장학증서를 받아드는 김지윤을 보며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옆에 앉았던 손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학생이니까요. 저도 저 나이 때는 상을 받는 게 무조건 좋았습니다.”
시상식이 끝나자 학생과 학부모들이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 별관으로 몰려갔다. 아리움은 원래 입장료를 받는 유료 미술관이지만 학생들의 수상작이 전시되는 별관에 한해서는 전시 시간 동안 무료입장이었다. 도윤과 손창현은 전시된 작품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김지윤을 발견했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는데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데 문득 옆에 있던 친구가 김지윤에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게 들렸다. 다른 관람객들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야. 그런데 주현이가 알면 가만있을까? 이거 원래 걔 그림이잖아?”
도윤과 손창현은 그 말을 듣고 거의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다행히 김지윤은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누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손창현이 도윤의 팔을 잡아끌며 슬며시 다른 그림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김지윤이 성난 어투로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너 자꾸 헛소리할래? 이게 왜 그년 그림이야? 그년이 대충 그리다 만 걸 내가 가져다 정성을 들여서 완성했잖아? 내가 손대기 전에는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몰라?”
“그렇게 엉망이지는 않았…….”
“야! 오주현 걘 미술 학원 한 번 다닌 적이 없는 완전 아마추어야. 데생의 기초나 구도를 잡는 법 같은 걸 전혀 모른다고. 걔가 그리다 만 그림을 그냥 냈어도 동상을 받았을 거 같아? 가작이나 입선도 어림없었을 걸? 아니, 그냥 창고에 처박혔을 거야. 지금 여기 없는 다른 쓰레기들처럼 말이야. 알아?”
그럼 너는 왜 굳이 그런 쓰레기를 가져다가 손을 봐서 제출했니? 친구는 그 말이 혀끝에까지 걸렸지만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손창현이 도윤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냥 가시죠.”
도윤은 아무 말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손창현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김지윤 학생이 했던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도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일이 복잡해지겠지요?”
“그렇습니다. 이미 수상자가 모두 결정된 상황인데 이제 와서 그걸 뒤집기는 난처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대회의 권위가 떨어질 뿐더러 기껏 후원한 저희 오성 그룹으로서도 돈만 쓰고 오히려 체면을 구기는 신세가 되지요.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부탁드립니다.”
안목이 있는 미술 애호가이기는 하지만 손창현은 역시 대기업 임원이었다. 그는 막상 난감한 상황에 부딪치자 부당한 승자의 자격을 박탈해서 정의를 실현하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도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니까 그 오주현이라는 학생이 누군지 궁금해지네요.”
“저도 그 학생이 평소에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되는 바람에 직접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아무래도 그러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손창현은 거듭 감사와 사과를 표시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마 적잖게 민망했던 모양이다. 도윤은 그가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 너 사람 좀 하나 찾아줬으면 좋겠다.”
난데없는 얘기에 석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요? 어떤 사람이요?”
“여학생인데, 도산 고등학교 오주현이야. 학년은 아마 2학년일 텐데 확실하지는 않아.”
“여고생이요? 형이 갑자기 웬 여고생을 찾아요?”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 확인해서 정말 장래성이 있어 보이면 후원을 해 보려고.”
“이젠 인재가 아니라 영재 발굴까지 하기로 한 거예요? 언제까지 찾으면 돼요?”
“서두를 건 없지만 되도록 빨리 찾으면 좋지. 구정 전까지 가능하겠냐?”
“해볼게요. 학교하고 이름까지 아니까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전화를 끊은 도윤은 약간 착잡한 기분으로 주차장을 향해 내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김지윤이라는 학생의 수상을 무효로 만들고 싶지만, 그럴 경우 손창현이 걱정했던 대로 여러 사람에게 민폐가 돌아갈 것이다.
그가 혀를 차며 차문을 여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목을 껴안으면서 축축한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덮어버렸다. 깜짝 놀라 힘을 썼지만 어느 새 두 명이 더 다가와 양옆에서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면서 급격하게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 자식들!’
흐릿해지는 눈으로 주차장의 CCTV가 박살나 있는 게 보였다. 순간 그는 발버둥을 치는 척하면서 오른쪽 구두의 뒷굽을 바닥에 세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뒷굽이 살짝 틀어졌다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안에 있던 송신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걸 마지막으로 맥이 탁 풀리면서 세상이 깜깜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