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당신들 둘 다 나를 어차피 떨어질 낙엽쯤으로 보는 모양이네?”
지검장의 목소리에 칼날이 서자 강일환과 전시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사실 방금 지검장이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찰 내에는 장관급인 검찰 총장을 제외하고도 차관 대우를 받는 검사장이 무려 40명을 넘는다. 그나마 50명 이상이던 과거에 비해 줄어든 숫자가 그 정도다. 그 많은 검사장들 중에서도 서울 중앙지검장은 특별하다. 중앙지검 자체가 전국의 검찰 조직 가운데 최대 규모인데다 그곳의 장인 중앙지검장은 늘 차기 검찰 총장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강일환이 고개를 숙인 채로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총장 후보 좋아하네. 당신도 곧 옷 벗고 전관예우나 받아야 할 처지잖아.’
현재의 검찰 총장은 아직 임기가 일 년가량 남았다. 하지만 청와대의 분위기로 볼 때 조만간 스스로 사표를 던져야 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 때문에 벌써부터 새로운 검찰 총장이 누가 될 것인지를 놓고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눈앞의 지검장은 그런 소문의 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현재 차기 검찰총장으로 가장 유력시되는 인물이 그의 연수원 한 기수 후배였다. 새로운 검찰총장이 임명될 경우, 그 동기나 선배들은 옷을 벗고 검찰을 떠나는 게 관례다. 신임 검찰총장의 의사결정에 걸림돌이 되는 걸 피해주기 위해서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모두 물러설 뜻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지검장이 고소를 머금었다.
“곧 옷 벗고 나갈 내 말을 듣느니 차라리 당장 찍히더라도 나중을 위해서 화끈하게 실적을 쌓겠다는 생각인가 보군.”
지검장의 말에 강일환이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오해십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진행 중인 수사를 뚜렷한 이유 없이 중단시키면 오히려 검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것을 염려할 뿐입니다.”
“전 차장 자네는?”
“화살이 이미 활을 떠났습니다. 지금 멈추더라도 어차피 한성에서 위작을 낙찰 받은 사람들이 고소를 진행할 겁니다. 그럼 결국 저희가 수사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지검장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좋아. 우리 총장님이 물러날 때가 대충 두 달 정도 남았지? 나도 그 전에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졌어. 옷을 벗을 땐 벗더라도 자기 지검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무능한 지검장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건 곤란하잖아? 안 그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은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지검장이 두 사람을 향해 피식 실소를 날렸다.
“각자 한 달씩의 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각자 맡은 사건의 수사를 완료해. 증거를 수집하든, 피의자와 참고인을 줄줄이 소환하든, 알아서들 최선을 다해 봐.”
“지검장님. 그건 무리입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
강일환이 다시금 이의를 제기하려고 했지만 지검장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한 달 안에 수사를 완료하지 못하면 두 사건 모두 다른 부서로 넘길 거야. 아예 무혐의 처리하거나 기소유예를 시킬 수도 있고. 다들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아직 그 정도 힘은 쓸 수 있어.”
지검상의 의지는 확고해보였다. 그것을 깨달은 전시헌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지만 강일환은 여전히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번에 현소에서 압수한 작품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걸 다 감정하고 불법적인 거래 여부까지 확인하려면 한 달로는 힘듭니다.”
“힘들면 감정가를 더 불러서라도 무조건 끝내. 아, 그리고 너무 억울해하지 마. 감정해야 할 작품이 많은 건 자네 혼자가 아닐 테니까.”
지검장이 즉석에서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연락했다.
“안녕하시오, 김 부장. 거기 사무실에는 아직 에어컨 잘 나오지? ……. 여기야 늘 똑같지, 뭐. 그나저나 수고하는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합시다. 조금 있다 우리 지검 특수부에서 압수 수색 영장을 하나 신청할 거야. 그거 되도록이면 신속하게 처리해줄 수 있을까? ……. 그래. 저쪽에서 눈치 채면 좀 곤란한 일이라서 말이야. 오케이. 그럼 곧 사람 보낼게. 수고.”
전화를 끊은 지검장이 여전히 전시헌의 앞에 놓여 있던 서류철을 들어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원래 특수부에서 신청하려 했던 한성 옥션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이었다.
“법원에 신속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지금 당장 들고 가서 신청해. 물론 자네도 압수한 작품들에 대한 조사를 포함해서 모든 수사를 한 달 이내에 끝내야 돼. 시간이 부족할 거 같으면 처음부터 전부 다 들고 나오지 말고 의심 가는 거만 압수하는 게 나을 거야. 지금까지 수사한 거 있으니까 뭘 가져와야 할지 알 거 아니야.”
전시헌은 작게 한숨을 토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림을 낙찰 받은 사람들이 한성을 고소하는 건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사람들 거주 지역이 전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냥 두면 담당 지검이 중구난방이 될 겁니다.”
“그건 내가 손을 쓸 테니까 괜찮아. 한성 옥션에 대한 위작 관련 고소가 접수되면 전부 우리 지검으로 이관시키라고 얘기해 둘 거야.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알아둘 게 있어.”
지검장이 전시헌과 강일환을 매서운 눈으로 쓱 훑었다.
“한대길 의원하고 대동 법무법인. 그리고 거기서 더 줄을 타고 올라가면 결국 한성 옥션하고 현소 화랑이 나오지. 내가 뭘 말하는지 둘 다 알 거야.”
전시헌과 강일헌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하지만 양쪽 다 입을 열어 변명하지는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을 잠시 쳐다보던 지검장이 혀를 쯧쯧 찼다.
“나도 자네들한테 검찰 관계자들하고만 친분을 쌓으며 살라고 얘기하지는 않겠어. 검사도 인간인데 나중을 위해서라도 인맥 관리는 해야지.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선을 지켜야 돼. 명색이 중앙지검 차장이라는 사람들이 각자 반대 진영에 서서 대리전쟁을 하는 건 꼴이 너무 우습잖아? 그래서 이왕 싸우는 거 내가 아주 화끈하게 붙도록 판을 만들어주지.”
뭘 하려는 거지? 옷 벗기 전에 마지막으로 깽판이라도 치겠다는 건가? 두 사람은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때 지검장이 선언하듯 말을 내뱉었다.
“전 차장 자네는 한성 옥션이 소장하고 있거나 그곳에서 낙찰된 작품들 가운데 위작으로 의심되는 것들을 전부 찾아. 강 차장도 현소에서 압수한 작품들 가운데 위작이거나 불법적으로 매입된 것들을 모조리 골라내고. 한 달 뒤에 그걸 몽땅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공개 검증을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들 해.”
전시헌과 강일환이 서로를 쳐다봤다. 뭘 하겠다고? 전시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개 검증이라면 정확히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간단해. 어차피 두 사건 모두 검사의 눈보다는 감정가의 눈이 더 필요한 일이잖아? 공개 검증을 할 때 각자 수사에서 도움을 받았던 감정가를 한 명씩 내세워. 그래서 자신들의 감정 결과가 왜 타당한지를 설명하고, 반대로 상대방의 감정 결과는 반박하게 하는 거야.”
강일환이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그게 수사를 완결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래봤자 서로 헐뜯기만 하고 오히려 결론을 내리는 데는 방해만 될 텐데요.”
“누가 그 사람들한테 최종 판정을 맡긴대? 우리 지검에 자네들 포함해서 차장 검사가 네 명이지? 나머지 두 명한테도 감정가를 한 명씩 섭외하도록 지시할 거야. 나도 한 명 내세울 거고. 그럼 그 세 명이 누구 의견이 더 옳은지 최종적으로 판정을 내리게 할 거야. 그 판정 결과를 토대로 각자 맡은 사건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자고.”
두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전시헌이 조심스럽게 이견을 제시했다.
“한 부서에서 담당한 사건의 결론을 다른 부서에서 내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말씀대로 처리하면 일선 검사들의 반발이 클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결론을 왜 다른 부서에서 내려?”
“조금 전에 그렇게 말씀하시…….”
“다른 부서에서는 감정가를 추천할 뿐이지 결론은 자네들이 내리는 거야. 감정가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이 걱정할 건 그런 지엽적인 게 아니야.”
지검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섭도록 차갑게 변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까 현소든 한성이든 둘 다 기소해서 유죄판결이 나오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한 쪽이라도 유죄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에는 내가 책임지고 강원도 같은 벽지로 자리를 옮겨주지. 아마 서울로 다시 돌아오려면 최소한 몇 년은 썩어야 할 걸?”
그 말을 끝으로 지검장은 손을 내저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강일환과 전시헌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 어쩔 수 없이 인사하고 지검장실을 나왔다. 사태가 처음 지검장실로 올라올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변했다. 이제는 실적을 쌓는 건 둘째 치고 자신들의 목을 먼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 *
“일을 꾸미는 건 사람이지만 되고 안 되고는 하늘에 달렸다고 하더니, 쯧쯧.”
이세준은 전화를 끊고 나서 혀를 찼다. 본래 검찰에서 작품을 압수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현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 중에 불법적으로 매입한 것은 한 점도 없었고 위작 또한 전무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반면에 한성 옥션은 상당히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게 그의 예상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위작 목록을 법무법인 대동의 대표인 현정환에 주었고, 현정환은 다시 그것을 전시헌 차장에게 넘겼다. 한성에서 그동안 경매를 통해 팔아치운 위작의 이름과 가격, 소장자의 신분 등이 자세하게 적힌 목록이었다.
“위작을 만든 위조범의 명단까지 넘겼잖아. 그 정도면 한성을 기소하는데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더니,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꼬이게 됐지?”
조금 전 전시헌 차장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 곧 한성 옥션에 대한 압수 수색에 들어갈 예정인데, 한 달 이내에 이번 수사를 모두 끝내고 기소 준비를 완료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제가 가진 명단에 있는 위조범들 가운데 주거지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놈들을 모두 체포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데만 한 달이 빠듯할 거예요. 게다가 이번에 확보한 위작이 그놈들이 만든 거라는 증거도 확보해야 하고요. 좀 도와주십시오.”
한 달 후에 각자 확보한 증거가 타당한지를 놓고 강일환 차장 쪽에서 내세운 감정가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세준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검찰에서 증거물을 분석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비록 내부 검증이라고는 해도 그런 식으로 공개적인 토론과 평가를 한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전시헌 차장이 하필이면 도윤을 콕 집어서 파견을 요청했다는 점이었다.
“그 문제는 도윤이와 상의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그 녀석이 일을 맡겠다고 하면 다시 연락드리지요.”
전화를 끊은 이세준은 입맛을 다셨다. 애초에 이번 일에는 아들을 개입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일이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저더러 한 달 동안 서울 중앙지검에 파견을 가라고요?”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대표 사무실에 들렀던 도윤은 뜬금없는 얘기에 눈만 껌뻑거렸다. 낯짝이 두꺼워도 어느 정도여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불과 며칠 전에 화랑을 통째로 털어가다시피 한 곳이 바로 서울 중앙지검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부서가 달라도 그렇지 그런 곳에서 새삼스럽게 협조를 요청한다는 게 말이 되나?
이세준 역시 말을 하면서도 기가 막힌지 쓴웃음을 지었다.
“거기 지검장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더라. 같은 지검에 있는 차장 두 사람이 서로 정반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를 잡아먹겠다고 이빨을 드러낸 꼴이잖아? 처음에는 타이르다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아예 칼을 뽑아들었나 봐.”
“그래도 한쪽에서는 수사 대상이 되고 있는 곳의 직원이 다른 쪽 수사를 돕는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요. 아무래도 말이 나올 것 같은데요?”
“우리 화랑을 압수 수색한 강일환 차장 쪽에서도 한성 옥션의 단골 감정가들을 동원했나 봐. 그래야 서로 말이 통하고 협조도 잘 될 테니까. 양쪽 모두 이판사판인 모양이다.”
“그 사람들이 한성 옥션 측 감정가를 동원됐다고요?”
그건 문제였다. 이세준도 그렇지만 도윤 역시 압수된 소장품들의 감정 결과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도윤 자신이 직접 감정해서 모조리 진작이라는 것을 확인한 미술품들이었고, 설사 엉뚱한 감정 결과가 나오더라도 법정에서 충분히 반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불법적으로 매입한 게 아니냐는 혐의에 대해서도 결백을 밝히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가져간 비밀 수장고의 컴퓨터 하드 디스크에는 모든 작품에 대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얼마를 주고 매입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아무리 대한민국 검찰이 썩었다고 하더라도 설마 기본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고 죄를 덮어씌울까?
‘그렇게 믿었는데, 어쩌면 상황이 꼬일 수도 있겠네. 양쪽 다 미친 거 아냐? 명색이 같은 지검에 소속된 차장들이잖아? 근데 이런 식으로 대놓고 서로에게 칼을 겨눠도 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이미 그게 현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지검장이라면 두 사람 모두 목을 쳐버리고 싶은 심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전시헌 차장님이 저를 지목해서 불렀다고요? 왜요?”
도윤의 물음에 이세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한 달 뒤에 양쪽 감정가들이 서로의 감정 결과를 놓고 공개적으로 일전을 벌여야 하잖아? 네가 트루쓰 앤 밸류에서 우승을 했으니 그런 일에는 경험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다른 감정가들도 돕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너를 대표로 내세우려는 모양이야. 그동안 네가 우리 화랑의 감정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감정이 빠르고 정확하다는 소문도 났고.”
이세준은 자신이 벌인 일에 결국 아들을 끌어들이게 된 것을 몹시 미안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건 모양새가 더 이상했다. 결국 도윤은 전시헌 차장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잘 됐어. 이번 기회에 아주 박살을 내주마.”
그날부터 도윤은 현소 화랑이 아니라 서울 중앙지검으로 출퇴근을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