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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16화 (116/300)

116화

최서라는 이스탄불에서 돌아온 뒤 경매에서 구입한 물품의 목록과 매입 가격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재무팀에 제출했다. 도윤이 구입한 걸 뺐는데도 그녀가 청파 갤러리의 이름으로 낙찰 받은 금속 공예품 총액만 20억이 넘었다. 아무리 오너 일가라고 해도 그만한 회사 돈을 한꺼번에 썼으니 정식으로 보고해서 회계 처리를 해야 했다.

“누가 최씨 집안 딸 아니랄까 봐 얘도 손이 크네?”

재무 팀의 결제를 거쳐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한 최수아 관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번 상해에서 열렸던 비밀 경매에서도 최서라는 금동보살 입상을 포함해 백억에 가까운 미술품들을 사들였다. 그런데 비록 그때보다 적기는 하지만 이번에도 또 다시 20억이 넘는 돈을 겁도 없이 지른 것이다.

“조금 주의를 줘야 하나? 20억이면 웬만한 화랑의 일 년 매출액인데.”

아무리 청파 갤러리의 규모가 크다고 해도 회사 전체도 아닌 일개 실장의 구매액으로 보기에는 액수가 너무 많았다. 그것도 일 년 내내 쓴 게 아니라 한 번 출장 가서 사들인 미술품의 가격이 그랬다. 아직까지는 회사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계속 이러다가는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최서라 실장 좀 올라오라고 해.”

비서실에 지시를 내린지 십분도 되지 않아 최서라가 관장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부르셨어요?”

“거기 좀 앉아라.”

최수아는 관장실 소파에 최서라를 앉게 한 뒤 조금 전 자신이 살펴봤던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넸다. 재빨리 보고서를 확인한 최서라가 최수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액수가 너무 많아서 부르신 거예요?”

“알긴 아는구나. 국내 작가의 작품도 아니고 죄다 해외 미술품이잖아? 그걸 이런 식으로 마구 사들이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 알지? 사용한 외화를 정부에 정확하게 보고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잘못해서 국세청이 세무 감사라도 하자고 덤벼들면 골치 아파져.”

“저도 알아요. 하지만 놓치지 아까운 기회라서 그랬어요. 해가 바뀌었으니까 이제 회계 분기도 달라졌잖아요. 올해는 되도록 조신하게 갤러리 업무만 볼게요.”

“너보고 조신하게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 갤러리가 매번 자체 소장 작품만 가지고 전시할 것도 아니니까 필요하면 외국에도 나가고 미술품도 구입해야지. 유명한 작품들을 대여하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돈이 나갈 수밖에 없고. 내 말은 필요한 모든 물건을 청파 이름을 대고 사지 말라는 뜻이야. 그걸 위해서라도 올해는 나하고 좀 여기저기 다니자.”

“구매를 대행해줄 사람들을 만나라는 말씀이에요?”

“그래. 어차피 이제부터는 너도 도움이 될 만한 분들을 많이 만나고 다녀야 해.”

최수아가 도움이 될 만한 분들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했지만 어릴 때부터 갤러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안에서 보고 배웠던 최서라는 그녀의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청파 갤러리의 구매를 대행해줄 다른 화랑의 대표들과 안면을 익히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외국에서 값비싼 미술품을 사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미술품 자체가 대부분 고가의 수입품인데다 반드시 필요한 물건으로 간주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막대한 외화를 쓸데없는 곳에 낭비한다는 눈총을 받을 소지가 다분했고, 그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정부의 규제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갤러리 가운데는 외국 작품들을 대량으로 소장한 곳이 적었다. 국내에서 청파 갤러리를 젖히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아리움 갤러리의 경우 전체 소장 작품 1만 여점 가운데 외국 작품은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800여 점뿐이었다. 그나마도 현재의 관장이 취임한 이후에 사들인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구입할 작품을 고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해외의 경매장이나 아트 페어를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작품을 확인하고 구입여부를 결정하려면 빼어난 안목뿐만이 아니라 시간과 체력이 모두 필요했다. 돈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 때문에 큰 갤러리에서는 수수료나 중개료를 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전문 갤러리에게 외국 작품의 구입을 대행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아리움과 청파 모두 그런 일을 맡아줄 갤러리 몇 군데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최수아 관장이 올해에는 본격적으로 그들과 최서라를 인사시키겠다고 나선 것이다. 일종의 후계자 수업이었다.

“해외에서 작품을 사는 거라면 도윤 씨보다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이 없을 텐데…….”

최서라가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본 최수아 관장을 기가 막혀서 실소를 내뱉었다.

“이 박사 안목은 나도 믿어. 솔직히 젊은 사람 중에 그만한 인물이 없지. 그러니까 저번에 상해 갔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너희 둘이 가겠다고 했을 때 아무 소리 안했잖아.”

“결과도 확실했잖아요. 도윤 씨가 아니었으면 금동보살입상은 절대 사지 못했을 거예요.”

“고마운 일이었지. 하지만 현소 화랑이 구매 대행 전문 갤러리도 아니고 이 박사 역시 자기 일이 있잖아? 언제까지 일이 있을 때마다 너를 도와줄 수 있겠어?”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그리고 저도 고모, 아니 관장님 말마따나 다른 갤러리 대표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어차피 앞으로는 그분들하고도 일을 함께 해야 하니까 잘 지내야죠.”

“이 녀석아 인심 쓴다는 투로 말하지 마. 억지로 인연을 맺고 싶어도 그러기가 쉽지 않은 양반들이니까. 그리고 이번에 만날 사람들이 죄다 갤러리 대표들만 있는 게 아니야. 정계와 언론계 인사들에게도 두루 인사를 드리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나게 되면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도록 해라. 우리를 많이 도와주실 분들이니까.”

최수아의 말에 최서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아참, 그리고 이번에 이스탄불에서 산 것들 가운데 회사가 아니라 제 돈으로 산 물건들은 보고서에서 뺐어요. 그건 적당한 기회를 봐서 다시 팔 거거든요.”

“뭐? 네 이름으로 산 것도 있어? 얼마나?”

“10억 원어치 정도 돼요. 그건 현소 화랑을 통해 받지 않고 처음부터 전부 뉴욕으로 보냈어요. 도윤 씨가 나중에 거기서 경매에 붙이겠다고 했거든요. 우리 갤러리에서 소장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제법 인기가 있을 만한 물건들이에요.”

“투자를 했다는 거냐?”

“네. 도윤 씨 말로는 정식으로 경매에 붙일 경우 구입가의 두세 배 정도는 더 받을 수 있을 거래요.”

“이 박사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네.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저도 개인적으로 쓸 돈을 좀 불려야지요.”

최수아는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제부터라도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시킬 생각이었는데 하는 짓을 보니 순진했던 조카가 벌써 제 잇속을 챙길 줄도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건 그것대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 *

도윤이 홍콩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 있었다. 그는 먼저 예약한 호텔에 들러 짐을 푼 다음 곧바로 아트 페어가 열리고 있는 현장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베트남에 있는 고정혁이 마침 호텔방을 막 나서려고 하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콜롬비아에서 서류가 통과됐다. 현지에 우리 자회사를 세워서 광물 탐사와 채광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조금 전에 그 문제에 대한 콜롬비아 정부의 허가가 났어.”

반가운 소식이었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수고하셨어요. 거기 관료들이 자꾸 서류를 깔아뭉개는 바람에 회사 설립이 더 늦어질 거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빠르게 통과됐네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도윤의 말에 고정혁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뭘 어떻게 해? 당연히 돈을 썼지. 그 놈들은 관료가 아니라 자릿세 받는 조폭이야.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꼼짝도 안 하더라고. 현지에서 일을 추진했던 브로커가 나름 애를 쓴 모양이더라. 뭐, 그 친구도 어차피 돈 보고 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럼 이제 콜롬비아 들어가서 회사 세우고 곧바로 탐사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서류상으로는 그래. 탐사 예정 지역이 메데인 근처의 임야라고 했지? 그 지역에 대한 개발권을 얻었어. 근데 정말 그 산에 석탄이 있기는 한 거야? 현지 브로커는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던데?”

“그거야 탐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탐사해서 광맥이 있다 싶은 지역이 발견되면 곧바로 시험 채굴에 들어갈 거예요. 아, 그리고 지금까지 쓰신 비용은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주세요. 제가 바로 계좌 이체시켜 드릴게요.”

“십만 달러 정도 들어갔어. 근데 구체적인 지출 내역은 정리할 필요가 없어. 대부분 브로커 수수료하고 관리들 뒷주머니에 찔러주는데 쓴 돈이거든. 정식으로 회계처리가 안 돼.”

“알았어요. 그럼 회사 계좌 말고 사장님 개인 통장으로 십만 달러를 보내드릴게요.”

“그래. 그거야 그렇게 처리하면 되긴 하지만…….”

고정혁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하더니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가 살짝 낮아져 있었다.

“야, 우리끼리니까 솔직히 얘기해 보자. 너 정말 콜롬비아에 석탄 캐러 가는 거 맞아?”

도윤 본인이 비용을 몽땅 부담할 테니까 탐사가 가능하게만 해 달라고 하기에 일을 추진시켰다. 그러나 솔직히 자원 개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녀석이 뜬금없이 한국도 아닌 먼 남미에서 석탄을 개발하겠다고 하니까 고정혁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로서는 도윤이 혹시 사기를 당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도윤은 괜히 거짓말을 하는 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일부러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겠지만 일단 지켜만 보세요. 그리고 저도 그런 일에 하염없이 돈을 쏟아 부을 생각은 없어요. 적당히 하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손 뗄 거예요.”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네가 그렇다니까 더 이상 묻지 않으마. 그나저나 진짜로 탐사를 하는 시늉이라도 내려면 장비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 그건 사지 말고 빌려. 시험 채굴까지 할 거면 장비 대여료만 해도 만만치 않을 거야.”

“그렇잖아도 그 부분 때문에 부탁드릴 게 있었는데. 탐사하고 채굴에 필요한 장비 목록을 이메일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브로커에게 어떤 장비를 대여할지 지시해야 하잖아요.”

“미치겠군. 네가 목록만 보고 어떻게 지시를 해? 목록을 보내기는 하겠지만 브로커에게 설명하는 건 내가 하마. 그럼 그 친구가 너한테 비용을 청구할 거야. 탐사는 언제 할 거냐?”

“아무래도 여름은 돼야 할 거예요. 그 전에 여기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알았다. 콜롬비아에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 그럼 나도 우리 직원들을 빼서 보낼 테니까.”

장비가 있다고 해도 그걸 운용할 사람이 필요한데, 실제 채굴은 콜롬비아 현지인들에게만 맡기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도윤은 베트남의 비에코 직원 몇 명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했고, 고정혁은 고민 끝에 마지못한 기색으로 그것을 승낙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아니다 싶으면 발을 너무 깊게 들이기 전에 빼라는 당부를 했다.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 * *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서 부르기는 하지만 사실상 홍콩 국제 아트 페어는 주체가 다른 두 개의 전시회로 구성된다. 아트 바젤과 아트 센트럴이 그것이다.

아트 바젤은 전 세계 3대 아트 페어로 불릴 만큼 국제적인 전시회였다. 시기 별로 미국, 스위스 등 여러 장소를 옮겨가며 열리는데, 그 가운데 홍콩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이 홍콩 국제 아트 페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것이다. 이곳에 참여하는 갤러리들은 굉장히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하며, 모든 부스는 넓은 실내 공간에 만들어진다.

아트 바젤과 가까운 거리에서 동시에 개최되는 아트 센트럴은 참여하는 갤러리들의 부스가 야외에 만들어진다. 부스마다 대형 텐트를 설치해서 그림을 전시하는 것이다. 아트 바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아시아 여러 국가의 갤러리들이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참가 신청자들에 대한 심사도 아트 바젤에 비해서는 조금 더 너그러운 편이었다.

장은서라는 화가의 그림을 전시하는 솔천 화랑은 아트 센트럴에 부스용 텐트를 설치했다. 도윤은 전시회가 열리는 현장에 빼곡하게 늘어선 텐트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걸 모두 돌아보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릴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다른 부스를 모두 생략하고 솔천 화랑의 텐트를 제일 먼저 찾아갔다.

“생각보다 인기가 대단한 모양이네.”

영어로 ‘솔전 갤러리’와 ‘장은서’라는 이름이 커다랗게 쓰인 팻말을 내건 부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다행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부스처럼 여유 있게 서서 작품을 감상하기는 어려워보였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 때문에 가까이에서 그림을 보기도 쉽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야외 아트 페어라고 해도 이러면 제대로 작품을 감상하기 어렵겠는데?”

하지만 투덜거리던 도윤의 입은 정작 그림을 대하는 순간 쏙 들어가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뭐야?”

도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텐트 안에는 스무 점이 조금 넘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은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다양한 거장들의 걸작을 흉내 낸 모작들이었다.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보고 있는 그림들 대부분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모작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의 그림을 베껴 그린 것뿐인데도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도윤은 지금까지 수많은 모작이나 위작을 보았다. 개중에는 차마 밝히지 못했지만 이름 있는 대형 박물관에 버젓이 걸려 있는 가짜도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모작과 위작 가운데 예술적 가치를 의미하는 신비한 빛을 흘리는 것은 단 한 점도 없었다. 모작은 절대로 예술작품이 아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믿어왔었는데, 지금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것은 순수 창작물보다 더 밝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어.”

전시된 그림 가운데 일부는 모작이 아니라 장은서라는 화가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모작들 가운데 일부에서 화가의 진작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아우라를 보는 폴리니라고 해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모작인데?”

그리고 그 점은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위작도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감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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