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49화 (49/300)

49화

방송이 모두 끝나고 심사위원들도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피디인 알랭과 메인작가 존이 급히 달려와 그들을 붙잡았다.

“죄송하지만 잠깐만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다섯 사람은 자리를 옮겨 마주앉았다. 알랭이 먼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민망하기는 하지만 오늘 실시간 평균 시청률이 예상보다 안 좋게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녹화 방송 때보다도 높게 시작했는데 생방송이 끝날 때쯤에는 오히려 약간 낮아졌어요.”

남의 일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기에 심사위원들의 얼굴도 떨떠름해졌다. 특히 시카고 예술대학의 브렌트 교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시청자들에게는 오늘 쇼가 생각보다 어렵고 지루했을 겁니다. 내 잘못이에요. 나름대로 재미있는 주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작품들을 선정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참가자들의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했어요.”

오늘 그림들을 제공한 것은 LA 카운티 미술관이지만, 작품 선정에 주도적인 의견을 낸 사람은 브렌트 교수였다. 심사위원들의 반응을 살핀 알랭 피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시청률을 높일 좋은 아이디어가 없겠습니까? 다음 주에 있을 3강전은 시간이 촉박하니까 계획했던 대로 진행한다고 쳐도, 뉴욕에서의 결승전에서는 뭔가 한 방을 터트릴 만한 아이템을 하나 만들어보죠. 시청자들의 관심을 확 끌어들일 만한 짜릿한 것으로 말이에요.”

“그래봤자 미술품 감정인데 특별히 짜릿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공중파 방송에서 포르노그래피를 주제로 선정할 수도 없고.”

하이든 박사가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소더비의 까미유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오호’하고 작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뭐 좋은 생각 있으세요?”

알랭의 눈이 대번에 밝아졌다.

“2월에 저희 뉴욕 소더비에서 정기 경매가 열려요. 거기 올릴 그림들 중에 조금 재미있는 게 있는데, 그걸 중심으로 출제 방향을 바꿔볼까요?”

“재미있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사람들의 관심이 확 쏠렸다. 까미유가 설명을 시작하자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제각각으로 변해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알랭과 존이 서로를 마주봤다. 두 사람 모두 ‘이거 괜찮은데?’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희들 생각에는 그렇게 가도 좋을 것 같은데,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알랭의 물음에 하이든 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기는 한데, 참가자들이 문제에요. 그 사람들 가운데 최소한 한 명은 감정을 제대로 해 줘야 모양새가 살아납니다. 잘못하면 생방송으로 참가자들이 버벅거리는 장면만 보여줄 수가 있어요.”

“결승전에 누가 올라갈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도윤 박사라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이 좋아 참가자지, 이 박사는 지금까지 보여준 실력만 봐도 이미 전 세계의 유명한 감정사들 못지않아요. 아직 서른을 넘지 못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예요.”

까미유의 말에 브렌트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다섯에 박사를 땄다고 해서 굉장히 공부를 열심히 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감정 실력을 보면 박사 학위가 오히려 대단치 않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때 하이든 박사가 조심스럽게 딴지를 걸었다.

“만약 이 박사가 3강전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이 주제로 밀고 나가요?”

그 말에 메인작가인 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혹시 이 박사가 결승전에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는 겁니까?”

심사위원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경연을 시작하기도 전에 심사위원들이 이러면 안 되기는 하는데, 솔직히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군. 까미유 씨 의견대로 갑시다.”

브렌트 교수의 말이 곧 회의의 결론이 되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하이든 박사가 다시 또 알랭 피디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INB에서는 감당할 자신이 있는 거요? 그림 값 말입니다.”

“네? 그림 값이라니요?”

알랭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묻자 하이든 박사가 ‘허’하고 혀를 찼다.

“최종 우승자에게는 문제로 출제된 그림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계획대로 가면 이제까지 나온 그림들 가운데 가장 비싼 게 문제로 출제될 거요. 우승자가 그 그림을 선택하면 방송국에서 그림 값을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알랭과 까미유의 안색이 동시에 변했다. 소더비는 ‘트루쓰 앤 밸류’의 공식 후원사 가운데 하나였다. 처음 후원사 계약을 할 때 우승자가 선택한 그림 값을 INB와 후원사들이 공동으로 부담하기로 했는데, 그림 값이 비싸지면 그만큼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이건 제 윗선한테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림 가격의 상한선이 있을 텐데, 거기에 걸리지 않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랭과 존이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까미유 역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거, 내가 공연한 소리를 한 건 아닐까?

* * *

‘트루쓰 앤 밸류’ 3강전이 열리는 장소는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츠(National Gallery of Arts)’, 흔히 워싱턴 국립 미술관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 역시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미술관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는데, 특히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계열의 소장 작품들은 그 질과 양에 있어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견줄만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세 명으로 줄어든 참가자들은 4강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미 대륙을 가로질러 워싱턴으로 이동했다. 도윤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부모님에게 먼저 전화를 드린 후, 런던에 있는 최서라와 통화했다.

“굉장했어요! 듀란 씨나 장예주 박사님은 물론이고 인스티튜트의 교수님들도 도윤 씨 칭찬을 엄청 하더라고요. 제가 도윤 씨를 잘 안다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한 번 인사시켜달라고 온통 난리에요.”

최서라의 흥분된 목소리를 들은 도윤은 고소를 머금었다.

화젯거리와 볼거리가 많은 세상이었다. 자극적인 쇼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미술품이나 감정하고 있는 ‘트루쓰 앤 밸류’의 시청률은 확실히 예상보다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온통 관심을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서라 씨 주변에 그 만큼 미술계 인사가 많다는 뜻이겠지.’

물론 한국만 한정시켜놓고 보면 도윤의 이름은 확실히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한국인이 미국 TV 방송에서, 그것도 전 세계에서 모여든 감정가들을 젖히고 계속 일등을 내달리는 모습이 사람들을 흥분시킨 것이다. 심지어 4강전이 끝난 뒤, 인터뷰를 하자고 도윤이 묵고 있는 호텔로 직접 찾아온 한국 언론사 특파원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국만 해도 당장 길거리를 다닐 때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드물었고, 사인을 부탁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방송이 끝나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아마 드물게 알아보는 사람들조차 사라질 게 분명했다. 더구나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근데 만약 우승하면 어떤 작품을 고를 거예요?”

잠시 딴생각을 하던 도윤은 최서라의 질문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어떤 작품이라니요?”

“우승자에게는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그림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경매에 붙일 수 있게 해준다면서요? 그래서 다들 어떤 작품이 경매에 나올지 궁금해 하고 있어요.”

“아, 그거요? 그거야 일단 우승을 하고 난 다음에 생각해봐야죠. 아직 경연이 두 번이나 더 남았으니까 더 비싼 작품들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우와, 그럼 루벤스의 초상화보다 더 비싼 게 나올 수도 있어요? 그것만 해도 몇 백만 달러는 될 텐데.”

“아마 쉽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까지 나온 그림들을 봐서는 방송국 측에서도 작품의 가격을 조절하는 것 같았거든요. 다른 게 나오지 않으면 누가 우승하든 루벤스의 초상화가 경매에 올라갈 가능성이 많아요.”

지금까지 문제로 출제됐던 그림들 가운데 가장 고가의 작품은 4강전에서 나왔던 루벤스의 가족 초상화였다. 도윤 자신은 그 그림을 2만 달러로 평가했지만 당시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매겼다. 도윤 다음으로 낮은 가격을 불렀던 폴리니조차도 그림의 가치를 400만 달러로 보았던 것이다.

‘나도 그 그림이 진짜로 내 거라면 2만 달러에는 절대로 안내놓지.’

쇼에서는 자신의 감정결과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그렇게 주장했지만, 그 역시 초상화의 실제 시장 가격이 최소한 몇 백만 달러에 이를 거라는 걸 인정했다.

다만 그 그림이 쇼에 나오는 바람에 루벤스가 손도 대지 않은 작품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할리나가 불렀던 700만 달러에 육박하는 금액으로 팔렸을 것이다. 하지만 도윤이 그림 값을 2만 달러로 책정했고, 그러고도 일등을 차지했다는 게 수집가들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우승한 뒤에는 그 그림을 비싼 값에 팔겠다고 하기가 좀 우습잖아?’

본인 입으로 생방송에서 2만 달러라고 평가한 작품을 실제 경매에서는 몇 백만 달러에 내놓으면 분명히 욕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욕 좀 먹고 몇 백만 달러를 벌 수만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감정가로 활동해야 하는 도윤의 입장에서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경연이 두 번이나 더 남았잖아요. 어쩌면 INB에서 루벤스 그림보다 더 비싼 작품을 내놓을지도 몰라요.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파이팅!”

최서라의 마지막 말에 도윤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실소를 멈추지 못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방송국에서 돈을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 * *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열린 3강전에서 도윤은 또 다시 일등을 차지했다. 본선 1차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등을 뺏기지 않고 독주하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최종 우승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단 한 명, 결승전에 함께 올라가게 된 폴리니만 빼고.

“그래봤자 당신은 어차피 덜 떨어진 감정가에 불과해. 아우라를 볼 수 없는 자가 그림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나?”

3강전이 끝나자마자 폴리니는 그렇게 독설을 남기고 휭 하니 사라졌다.

“이젠 아주 대놓고 아우라를 볼 수 있다고 거들먹거리는구나.”

도윤은 그냥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날개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기가 독수리인 줄 알고 기고만장하다가는 어느 날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유일한 경쟁 상대의 정신 상태가 저 지경이니 도윤으로서는 결승전을 앞두고 오히려 긴장감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폴리니와는 달리 아깝게 탈락한 말레는 도윤의 실력을 인정했다. 3강전에서는 백만 달러가 넘지 않는 그림들이 나왔는데, 말레는 그림의 진위를 하나 잘못 감정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시세마저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는 가격을 책정했다가 결국 최저 점수를 받고 말았다. 반면에 도윤은 이번에도 그림의 진위는 물론이고 시세마저 정확히 알아맞혔다.

“솔직히 내가 볼 때는 너야말로 감정의 신이다. 그래도 너 같은 실력자에게 졌으니까 돌아가서 할 말은 있을 것 같아.”

감정의 신은 무슨. 도윤은 말레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의 탈락을 위로했다.

“나도 너처럼 뛰어난 감정가를 만날 수 있어서 공부가 많이 됐어. 파리에 산다고 했지? 나중에 파리에 가게 되면 거기서 또 얼굴을 보자.”

“미국에 오기 전에 오르세 미술관의 감정사 자리에 지원했어. 그래도 3강전까지 올라와서 그런지 면접을 보자고 연락을 주더라고. 파리에 오면 당연히 오르세 미술관에 들르겠지? 채용이 확정되면 언제 한 번 거기서 보자.”

말레는 오히려 탈락한 덕에 마음이 개운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도윤과의 재회를 기약하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워싱턴을 떠났다. 이제 남은 참가자는 도윤과 폴리니 두 사람뿐이었다.

* * *

1월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도쿄 중심가에 자리 잡은 나마타 손해보험 빌딩의 대회의실에는 바깥보다 더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거냐?”

나마타 손해보험의 사장 나마타 신페이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탁하게 갈라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서 침통함이 저절로 묻어나왔다.

“죄송합니다.”

나마타 사장의 외조카이자 나마타 갤러리의 책임자이기도 한 요시다 토마 전무가 자리에 앉은 채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의 얼굴에도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임원들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들 어쩌다 신년 벽두부터 이런 일이 터졌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아, 할 수 없지. 그렇다고 회사 문을 닫을 수는 없는 거 아니냐. 그렇게 해라.”

결국 나마타 사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요시다 전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판매 방식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경매 회사에 맡깁니까?”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하지만 내부적으로 가격을 정하고 그 값에 인수할 수집가들이 있는지 먼저 알아 봐. 고흐나 세잔의 그림은 당장이라도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국내 경매 회사들과도 계속 접촉하면서 동시에 일을 진행시켜.”

“국내 경매 회사들이라면…, 우리나라 수집가들에게 우선적으로 판매할 생각이십니까?”

“이왕이면 그게 낫잖아? 그러면 비록 그림들이 우리 손을 떠나기는 해도 일본 땅에 머무를 거 아닌가? 일을 진행시켜보다가 정 안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소더비나 크리스티하고 얘기를 해 봐.”

“소더비나 크리스티에 맡기게 되면 그림을 전부 외국으로 반출해야 합니다.”

“어쩌겠어? 그 사람들더러 손님들을 일본까지 데리고 오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요시다 전무의 대답을 들은 나마타 사장은 크게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가 회의실을 나갈 때까지 허리를 숙였다.

며칠 후, 일본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대형 사건이 터졌다. 나마타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이 한꺼번에 시장에 풀린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대형 경매회사나 화랑들뿐만이 아니라 시장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수집가들이 모두 이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어떤 작품이 어떤 가격에 풀릴지에 대해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 모든 작품들 가운데 사람들이 관심을 집중시키는 작품은 단연 하나였다. 고흐의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비싼 서양 그림들 가운데 하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