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4. 아버지의 초상>
도윤이 스코틀랜드로 출발하는 날짜를 애써 지키려 한 것은 밀리터리 타투 때문이었다. 매년 8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3주 동안 진행되는 이 축제는 군악대를 위한 행사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군악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개적으로 연주하며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국악 군악대도 참여하고 있었다.
에든버러에는 스코틀랜드의 수도답게 내셔널 갤러리를 포함해 적지 않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존재했다. 또한 바위산 위에 세워진 요새 형태의 에든버러 성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이따금 예고도 없이 천둥 번개를 동반하며 내리는 비만 아니면 한여름 치고는 비교적 쾌적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에든버러였다.
도윤은 낮에는 에든버러와 인근의 관광명소들을 구경하다 저녁이 되면 밀리터리 타투 공연을 관람하면서 일주일가량을 보냈다. 그런 다음 그곳을 떠나 글래스고로 이동했다. 거기서 케빈글로브 박물관을 중심으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그는 글래스고에 도착한 지 나흘 째 되던 날 아침, 호텔에 여행가방을 맡기고 가벼운 배낭을 메었다.
“하이랜드 트래킹을 가시는 겁니까?”
챙이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 트래킹용 신발까지 착용한 그를 본 데스크 직원이 씩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네. 웨스트 하이랜드 코스로 가려고요.”
“트래킹 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에요.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호텔을 나온 그는 버스를 타고 글래스고 바로 위에 있는 밀가이(Milngavie)까지 이동했다. 그곳에서 북쪽의 포르 윌리엄까지 대략 150Km가 조금 넘는 길을 도보 전용도로를 따라 걸을 예정이었다. 가장 보편적인 하이랜드 트래킹 코스였다.
도윤이 택한 코스는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보통 8박 9일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는데,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궁리한 끝에 이틀을 줄여 6박 7일에 완주하기로 결정했다. 군대 있을 때 단련한 몸을 믿기도 했거니와 그래야 런던에 돌아간 뒤의 일정에 여유가 생겼다.
기대했던 대로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풍광은 도윤을 만족스럽게 했다. 비교적 낮고 광활한 저지대인 로우랜드를 지나자 울창한 숲과 호수, 산과 골짜기들이 앞을 다투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럽 최후의 미개발지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하이랜드의 풍광이었다.
트래킹을 시작한 지 닷새째 되던 날, 도윤은 종착점인 포르 윌리엄에서 약간 남쪽으로 떨진 곳에 있는 글렌코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산과 산 사이에 자리 잡은 호숫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는데, 본격적인 트래킹 시즌이라서 그런지 여행객들의 모습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일곱 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 지역의 8월에는 오후 열 시나 돼야 해가 지기 때문에 아직 하늘이 훤했다. 그래도 내처 포르 윌리엄까지 가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도윤은 미리 예약했던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은 뒤, 우선 저녁을 먹으러 인근의 식당으로 갔다.
“혹시 한국인이십니까?”
주문한 음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던 웨이터가 그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문득 국적을 물었다. 영국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스코틀랜드인 역시 낯선 사람에 대해 무뚝뚝한 편이다.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웨이터가 갑자기 그의 국적을 물어보자 도윤은 당황하는 한편 적잖게 신기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웨이터가 씩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 폰을 가리켰다. 오성 그룹 제품이었다. 도윤은 스마트 폰을 집어 들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한국 제품이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쓸 텐데요”
“아까 화장실을 갈 때 스마트 폰을 테이블 위에 그냥 놓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저 사람은 건망증이 아주 심하거나 한국 사람일 거라고.”
도윤은 실소를 터트렸다.
비교적 꼼꼼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도윤도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물을 가지러 갈 때는 꺼내놓은 휴대폰을 챙기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그러다 한 번 휴대폰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왔을 때 깜짝 놀라는 대표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핸드폰을 아무데나 놓아두는 버릇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사실 생각보다 흔히 볼 수 있는 행동은 아니거든요.”
“우리 집에 가끔 밥을 먹으러 오는 한국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주 그러더군요. 제가 소지품 간수를 잘 하라고 충고했더니 웃으면서 한국에서는 그래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더라고요. 그래서 참 신기한 나라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여기 가끔씩 밥을 먹으러 오는 한국인이 있다고요?”
도윤에게는 그 사실이 더 신기했다. 글렌코는 주변 경관이 수려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근본적으로 호숫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트래킹 도중에 하루 정도 묵어가는 거라면 몰라도 외국인, 특히 한국인이 장기 투숙할 만한 관광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웨이터가 기억할 정도로 오랫동안 여기서 식사를 했다면 최소한 며칠 이상 글렌코에 머물렀다는 말이 된다.
“그 한국인을 본 게 얼마나 됐는데요?”
“글쎄요? 세 주? 네 주? 아무튼 두 주는 확실히 넘어요.”
그럼 적어도 보름 이상을 여기서 머무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때 카운터에서 웨이터를 부르는 바람에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 의아했다. 도대체 누가 스코틀랜드의 산골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는 거지?
* * *
다음날 아침, 그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서 천천히 아침을 먹고 나서야 글렌코를 출발했다. 포르 윌리엄까지는 다섯 시간만 더 걸으면 되는데다, 글래스고에 돌아갈 때는 차를 렌트하기로 했다. 일정에 여유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느긋해졌다.
도윤이 그 남자를 발견한 것은 마을 옆에 있는 산비탈을 걸어 올라가던 중이었다. 길옆에는 키 큰 전나무들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솟아 있었다.
길을 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던 그는 문득 숲을 가로지르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숲속을 걷는 정취를 느끼고 싶기도 했고, 설사 길을 잘못 든다 해도 해지기 전까지는 포르 윌리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그의 발길을 숲속으로 이끌었다. 문제의 남자를 본 것은 그가 다소 헤맨 끝에 숲을 거의 벗어날 즈음이었다.
사실 처음 도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남자가 아니라 이젤이었다. 남자는 숲을 등진 채 호수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이젤에 걸린 캔버스의 크기는 대략 10호 정도. 풍경화를 그릴 때 흔히 쓰는 것이었다. 도윤이 있는 곳에서는 남자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게 유화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윤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뒤로 다가갔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화를 낼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도대체 뭘 그리는지 괜히 궁금했던 것이다. 뒷모습만 봐도 아시아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혹시 식당의 웨이터가 말했던 한국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름 조심스러웠던 그의 접근은 한여름의 무성한 풀 사이에 버려진 썩은 나뭇가지로 인해 무산됐다. 발밑에서 빠직 하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가 얼른 붓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낮추어 봐도 사십은 확실히 넘었을 것 같은 중년 남자였다.
“아, 죄송합니다. 방해하려던 건 아니고요. 이런 산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분을 보니까 신기해서….”
“누구세요?”
“그냥 지나가던 여행객입니다. 솜씨를 보니까 화가신가 봐요?”
“어, 아니오. 화가 아닙니다. 취미에요. 취미.”
남자는 적지 않게 당황했는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도윤은 상대의 딱딱하고 어눌한 발음을 듣고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한국말로 슬쩍 찔러봤다. 그러자 깜짝 놀라던 남자의 얼굴이 대번에 편안하게 풀렸다.
“네. 맞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인가 보네요? 여기서 한국 분을 뵐 줄은 몰랐네요.”
상대의 반응이 호의적으로 변하는 것을 확인한 도윤이 은근슬쩍 그에게 다가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림이 취미라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그냥 취미로 그리는 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요? 건방진 얘기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아마추어로는 보이지 않아서요.”
물론 프로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화면의 구도가 잘 잡혀 있고 붓 터치 또한 아마추어의 수준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문제는 그림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너무 익숙하고 평범하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잘 그리기는 하지만 화가로서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말하는 이발소 그림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애매하다는 뜻이었다.
남자가 풀썩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에서 왠지 서글픈 기색이 느껴졌다.
“취미 맞습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다 보니 이 나이까지 버릇처럼 붓을 놓지 못하네요. 사실은 돌아가신 아버님이 화가셨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어깨너머로 조금 배우기는 했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럼 선친께서 혹시 화가가 되기를 권하지는 않으셨나요?”
그 말이 뭔가 아픈 곳을 찔렀나 보다. 남자의 얼굴이 돌연 어두워졌다.
“생전에 많이 권하셨습니다. 하지만 재주가 워낙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도윤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어서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얘기를 해서.”
“아닙니다. 다 어릴 적 얘기죠. 아버님 돌아가신 게 벌써 십년도 넘었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도윤은 근처에 앉아 잠시 쉬려던 생각을 포기했다.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저는 되도록 일찍 포르 윌리엄에 도착해야 해서….”
“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저씨도요. 안녕히 계세요.”
말 몇 마디를 잘못 꺼냈다가 쫓기듯 그 자리를 떠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쓸데없이 입방정을 떨어서, 쩝.”
도윤은 자기 자신을 탓하며 바쁘게 산길을 헤치며 나갔다.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여러 가지로 찝찝한 만남이 되고 만 것이다.
* * *
이십일 만에 런던으로 돌아온 도윤은 제일 먼저 최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도윤입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죠?”
“이 박사님! 여행 잘 다녀오셨어요?”
최서라는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도윤이 모레 비행기로 귀국한다는 얘기를 듣더니 당장 만나자고 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점심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그런데 그녀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약속 장소에 테이트 브리튼의 장예주 박사가 나타났다.
“젊은 남녀가 데이트하는 자리에 괜히 끼어든 게 아닌지 몰라?”
장예주는 최서라를 보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에이, 아니에요. 저도 오랜만에 장 박사님 얼굴 보니까 좋아요.”
“정말? 얼굴 표정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요즘 연습하는 게 많아서 조금 피곤한 거예요. 잘 지내셨죠?”
장예주는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지만 더 이상 짓궂게 굴지는 않았다. 사실 도윤을 먼저 만나자고 한 건 그녀였고, 귀국 일정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그가 최서라에게 양해를 구했다. 최서라도 장예주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연습은 잘 되세요?”
도윤이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다. 그러자 최서라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네. 금속 공예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 줄 처음 알았어요.”
“금속 공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서라 네가 금속 공예를 한다고?”
장예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최서라는 나중에 청파 갤러리를 맡기 위해 소더비 인스티튜트에서 예술 경영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소더비에 그녀를 추천해준 사람이 바로 장예주였으니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서라가 난데없이 직접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요즘 새로 취미를 붙였어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연습하는 정도예요.”
“그래? 취미란 말이지? 그럼 혹시 예쁜 거 만들면 나한테도 선물할 거야?”
“당연하죠. 기대하세요, 헤헤.”
최서라가 작은 주먹을 들어 힘껏 쥐어보였다.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최서라가 파베르제의 달걀을 통해 받은 능력은 뜻밖에도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고, 다른 하나는 금속 공예와 관련된 손재주였다. 최서라가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날, 도윤은 그녀와 함께 갔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최서라 본인은 왜 갑자기 자신의 눈과 손이 변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한 번에 두 가지 능력을 받는 유물의 주인을 보는 건 도윤으로서도 처음이었다. 그 자신 역시 다산으로부터 기억력 한 가지만 전해 받았었다.
‘그러니 몸에 무리가 와서 그렇게 경련을 하고 난리를 쳤지.’
그나마 별 탈 없이 새로 받은 능력을 몸에 안착시킨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참, 오늘 왜 보자고 했냐면 말이야….”
도윤이 최서라를 보며 얼마 전 일을 떠올리고 있는데 장예주가 불쑥 용건을 꺼냈다.
“이 박사, 혹시 미국의 INB 방송이라고 알아?”
도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능 프로그램 전문 방송이잖아요. 오디션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인기를 끈다고 알고 있어요. 저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끔 봤고.”
“그래. 바로 거기야. INB에서 나한테 연락이 왔어. 이 박사가 자기네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본인한테 직접 연락을 하려고 나름 애를 썼던 모양인데 통화가 안 됐나봐. 답답하니까 나한테까지 전화를 했더라고.”
“장 박사님한테요?”
“그래. 같은 나라 사람인데다 같은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혹시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 같아.”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무슨 예술품 감정에 관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던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나한테 전화번호를 남긴 게 있으니까 이 박사가 직접 한 번 연락해 봐.”
그 말과 함께 장예주는 도윤에게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힌 메모를 건네주었다. 존 카론? 메모에 적힌 이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