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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5화 (15/300)

15화

3. 파베르제의 달걀

최서라는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도윤은 최대한 무난하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어제 파베르제의 달걀을 구경하러 제 방에 왔잖아요? 그때 달걀을 살피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어요.”

“제가요?”

“네. 그래서 급히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약한 감기 증상일 뿐이라고 하네요. 혹시 최근에 무리하셨던 거 아니에요?”

“경매 때문에 며칠 잠을 설치기는 했지만 쓰러질 정도로 무리를 한 적은 없어요.”

“원래 피로라는 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적되는 거예요. 당분간은 건강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상하네요. 제가 원래 굉장히 건강한 체질인데….”

이상하겠지. 당신은 어제 얼마나 이상한 일을 겪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최서라는 그날이 가기 전에 퇴원했다. 도윤은 일부러 말리는 척 했지만 그녀의 태도는 완강했다. 계속 입원하려면 우선 집에 연락을 해야 하는데, 그럼 오히려 일이 복잡해질 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다행히 의사도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별다른 이상이 없으니 퇴원해도 좋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도윤은 최서라를 택시에 태워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월세를 주고 빌린 아파트라고 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공연히 저 때문에 큰일을 치른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가 아파트 입구에서 짐짓 사과하자 최서라가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 때문에 수고를 너무 많이 하셔서 얼굴을 못 들 지경이에요.”

그러더니 약간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어제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민폐만 끼쳤어요. 만날 때마다 도움만 받은 게 미안해서 그런데, 따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세요?”

“아쉽지만 사흘 뒤에 스코틀랜드로 출발합니다. 런던에는 이십일 쯤 지나야 돌아올 것 같아요.”

“그럼 내일이나 모레라도….”

“모레는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 들를 생각이었습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그때 함께 가시죠. 거기도 괜찮은 식당이 있거든요.”

“네. 저 그 박물관 굉장히 좋아해요.”

“그럼 모레 오전 열시에 박물관 입구에서 뵙기로 하죠. 자연사 박물관 건너편입니다.”

“네!”

그제야 최서라의 얼굴이 활짝 개었다.

도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최서라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 외모나 성격은 물론이고 배경에 있어서도 최서라는 충분히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하지만 그가 굳이 그녀와 함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 가기로 한 것은 단순히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영 박물관을 아직 가보지 않았다고 하는 건 너무 거짓말 같고,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이 딱이지. 거긴 장신구나 보석 세공품도 많으니까.”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의 특징은 한 마디로 다양성이었다. 회화와 조각은 물론이고 가구와 장신구, 보석 세공품과 섬유 예술품 등 갖가지 물건을 모두 갖춘 장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양의 회화나 도자기, 불상 등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의 전통 예술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도윤은 그곳에서 최서라가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   *   *

포브스 지에서는 매년 전 세계 부자들의 순위를 매겨 발표한다. 하지만 이 순위는 공개된 주식이나 부동산을 바탕으로 소유 재산을 평가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이 소장한 고가의 예술품이나 보석,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는 재산들은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이 순위를 부자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달래주기 위한 흥밋거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로스차일드나 사우디 왕가로 눈을 돌릴 경우, 포브스의 순위는 더욱 무의미해진다. 이들은 가문이나 혈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재산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대한 부를 바탕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크기와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령 전 세계 최고의 부자로 자주 거론되는 아마존의 제프리 베조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등은 대략 900억 달러 전후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우디 왕가 전체의 추정 재산은 그 열 배가 훨씬 넘는다. 음모론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로스차일드의 경우에는 아예 재산 규모를 짐작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도윤이 파베르제의 달걀을 빌린 뒤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 대단한 가문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크리스티의 런던 지부를 방문했다.

“거지가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다고 해서 갑자기 신사가 될 수 있겠어? 가문의 뿌리가 없는 졸부는 진정한 부자가 아니야.”

그것이 다니엘 로스차일드의 신념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을 비롯해서 유럽 전체에 퍼져 있다. 그 가운데 영국에서 활동하는 일가의 수장이 바로 다니엘이었다. 사람들이 짐작하는 그의 개인 재산은 대략 150억 달러. 액수로만 따지면 세계 부자 순위 50위권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올해 일흔한 살의 그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런던 금융가의 막후 실력자였다.

“파베르제의 달걀을 보러 직접 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니엘 로스차일드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크리스티의 드레스너 사장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노인네는 왜 또 갑자기 그 물건에 관심을 갖는 거지?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언제든지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고맙군. 한 시간 후에 그곳에 들리겠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드레스너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니엘 로스차일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미술시장의 큰손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원래부터 미술품이나 고대 유물의 수집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에서도 다니엘은 미술품에 지속적인 투자를 해 온 대표적인 VIP였다. 게다가 그는 크리스티뿐만이 아니라 소더비 주식의 상당량을 소유한 대주주이기도 했다.

“희한하군. 생각보다 반응이 뜨겁지 않아서 경매도 유찰되었던 물건이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파베르제의 달걀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자꾸 생기는 거지?”

게다가 관심을 보이는 두 사람 모두 그로서는 상당히 찜찜한 인물들이었다. 노인 쪽은 엄청나게 부담스러웠고, 젊은 놈은 신경이 무척 거슬렸다.

다니엘은 그의 말대로 정확히 한 시간 후에 크리스티 런던 지부를 방문했다. 드레스너는 건물 앞까지 직접 나가서 그를 맞이했다.

“물건은 준비가 됐나?”

다니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인사도 생략한 채 대뜸 파베르제의 달걀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드레스너는 억지로 입술에 힘을 주어 친절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물론입니다. 제 사무실에 가져다 놓았으니까 함께 올라가시죠.”

잠시 후, 두 사람은 드레스너의 사무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마주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청회색의 파베르제의 달걀이 놓여 있었다.

“내가 왜 갑자기 이걸 보러 여기까지 왔는지 짐작하겠는가?”

한참 동안 달걀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살펴보던 다니엘이 물었다.

“혹시 구매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그럴 생각이기는 해. 귀찮게 경매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값은 나쁘지 않게 쳐주지.”

“물론이죠. 어차피 회사 소유의 물건이니까 꼭 경매를 거쳐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부탁하지. 비서에게 원하는 가격을 알려주게. 자네가 너무 욕심을 부리지만 않으면 그대로 지불할 거야. 대신 내가 이걸 가져간다는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고.”

“하지만 판매 기록은 남겨야 합니다. 세금 문제도 있고….”

“그걸 알아서 처리하는 비용도 물건 값에 포함시기도록 해. 왜? 안되겠나?”

“아닙니다. 구매자가 누군지 절대 알 수 없도록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

현재 크리스티의 실소유주는 프랑스 사람이었다. 드레스너는 말하자면 월급 사장이었는데, 이런 일을 잘 처리하면 돈 이외에도 장기적인 이득이 생길 게 분명했다. 그가 자신 있게 장담하자 다니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라스푸친의 목걸이에 대해 들어봤나?”

누구?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드레스너가 고개를 저었다.

“라스푸친이라면 니콜라이 2세 때 요승이라고 불렸던 러시아 사제가 아닙니까? 이름은 당연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의 목걸이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렇겠지. 그게 당연하기도 하고.”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아주 오래 전 사진을 다시 촬영해서 인화한 게 분명했다. 인화지는 멀쩡한데 사진 자체는 낡고 흐릿했다.

사진 속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했는데 하나같이 휠체어에 탄 어린 아이를 에워싼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 턱수염이 무성한 검은 머리의 사내만이 아이의 정면에서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여기를 보게.”

다니엘은 사진 속의 인물 가운데 아이를 향해 허리를 숙인 남자를 가리켰다.

“이 남자 말입니까? 사제복을 입고 있군요.”

“그 사람이 바로 라스푸친이네.”

“그렇습니까? 이런 사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어. 얼마 전까지는 말이야. 운이 좋아서 간신히 구했지.”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애기하기로 하고, 일단 사진을 다시 잘 보게. 라스푸친의 목에 뭔가 걸려 있는 게 보이지 않나?”

드레스너는 사진에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워낙 오래 전 사진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니 다니엘의 말대로 목에서 가슴 앞으로 가느다란 줄이 늘어져 있었다. 그 줄의 끝에 매달린 동그란 물건은 펜던트가 분명했다.

“확실히 목걸이가 보입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펜던트가 달려있는 것 같군요.”

“맞아. 그게 아까 내가 말한 라스푸친의 목걸이네.”

다니엘은 사진을 다시 품안에 집어넣더니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드레스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사진에서 봤던 그 목걸이가 혹시 회장님께서 찾으시는 물건입니까?”

다니엘은 대답을 하지 않고 멍하니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서 기쁨과 탄식, 안도와 회환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서 묻어나왔다. 드레스너는 속이 답답해졌다. 뭐지? 도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노회한 영감탱이의 마음을 저렇게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

“라스푸친이 니콜라이 2세로부터 총애를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봤겠지?”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깜짝 놀란 드레스너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황제보다는 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게 아닙니까?”

그러자 다니엘이 피식 하고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

“입방아를 찧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란 항상 음란한 애기를 지어내길 좋아하지. 군중이라는 게 원래 그래. 프랑스 혁명 때는 마리 앙투와네트가 자기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얘기까지 돌아다녔으니까. 그때 아들의 나이가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던 다니엘은 호흡이 가빠진 듯 잠시 숨을 골랐다.

“라스푸친은 황제와 황후뿐만이 아니라 황실 일가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았어. 예외적인 총애였지. 그는 어떻게 황실의 인정을 받았을까?”

무슨 스무고개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다니엘은 하고 싶은 얘기를 단번에 털어놓지 않고 자꾸 질문을 던지는 짜증나는 화법을 구사했다. 드레스너는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혈우병에 걸린 황태자를 치료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황후의 인정을 받았고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황실 전체의 인정을 받았지. 그가 병을 치료했던 사람이 황태자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말이야, 라스푸친은 정말 황태자의 병을 치료했을까?”

“글쎄요.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인정한 게 아닐까요?”

드레스너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다니엘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좋아. 그럼 질문을 바꾸지. 라스푸친은 도대체 어떻게 황태자의 병을 치료했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드레스너가 대답을 않자 다니엘이 화제를 바꿨다.

“라스푸친이 나중에 반감을 품은 황실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는 알 거야.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상세한 이야기가 전해지지.”

“저도 기억납니다.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지요. 라스푸친은 말도 죽을 정도의 청산가리가 든 과자를 먹고도 멀쩡했고, 총알을 여러 방 맞고서도 죽지 않았다더군요.”

“그래. 그래서 결국은 귀족들이 그를 얼어붙은 강물에 빠트려서 익사시켰지. 하지만 나중에 발견된 라스푸친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는 그의 사인이 익사가 아니라고 했어.”

“익사가 아니라고요? 그럼 사인이 뭐였습니까?”

다니엘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시 화제를 바꿨다.

“자네가 궁금해 해야 할 것은 그의 사인이 아니야. 아까도 말했듯이 라스푸친이 어떻게 황태자의 병을 고쳤고, 그 자신은 청산가리를 먹고 총에 맞았으면서도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는 거지. 그게 단지 체력이 좋다고 해서 가능한 일일 리는 없잖아?”

그때 드레스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 모든 게 아까 보여주셨던 사진 속의 목걸이와 연관된 겁니까?”

다니엘의 얼굴에 비로소 환한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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