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3화 (13/300)

13화

3. 파베르제의 달걀

도윤은 파베르제의 달걀에서 나온 띠를 완전히 펼친 다음, 앞뒤로 뒤집어 가며 꼼꼼하게 검사했다. 길이가 5미터나 되는데다 양면에 무늬가 그려져 있어서 전체를 한 번 살펴보는 데만 해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그러나 몇 시간이 넘게 눈이 뚫어져라 들여다봐도 도대체 뭘 그린 건지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아마천이네?”

아마천은 리넨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유화를 그리는 캔버스의 소재로 활용된다. 하지만 띠의 앞뒤에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된 건 유화 물감이 아니었고, 색깔도 검은색 하나였다.

“그래도 일단 염색이나 인쇄는 아니고, 분명히 사람 손으로 뭔가를 직접 그려 넣은 것만은 틀림없는데…. 도무지 모양에 통일성이 없잖아? 암호인가? 아니면 단순한 장난?”

장난일 리는 없었다. 니콜라이 2세가 비록 인간성만 좋은 무능한 황제라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값비싼 세공품 안에 의미 없는 쓰레기를 넣을 정도의 괴짜는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는 볼셰비키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는 급박한 시기였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한가하게 장난이나 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띠에 앞뒤로 그려진 문양을 일종의 암호로 본다고 해도 당장은 그걸 풀어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일까지는 파베르제의 달걀을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부족했다. 혹시나 잔류 기억이 보이는 게 없을까 싶어 띠를 부여잡고 정신을 집중시켜봤지만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띠 자체가 예술품이나 명품은 아니라는 뜻이다.

도윤은 룸서비스로 식사를 배달시켜 먹으면서까지 방을 떠나지 않고 띠에 그려진 문양을 해석하는데 매달렸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고 급기야는 창문 밖으로 먼동이 틀 때가 되도록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나중에는 졸리기도 졸리거니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빌어먹을. 일단 좀 자자.”

혹시 꿈에서라도 무슨 힌트를 얻지 않을까 싶어 아예 파베르제의 달걀을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다 되어 깨어날 때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문양에 대한 실마리가 하나도 풀리지 않은 채 고스란히 엉켜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열두 시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최서라 씨에게 이거 실물을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저녁이 되기 전에 크리스티 측 사람들이 물건을 도로 가져가기 위해 호텔로 올 것이다. 그 전에 최서라를 불러 달걀을 보여주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당장 최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곧바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이 박사님?”

“네. 이도윤입니다. 혹시 지금 괜찮으면 호텔로 오실 수 있을까 해서요. 파베르제의 달걀을 받았습니다.”

“정말이요?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사실은 어제 택시를 타시자마자 드레스너 사장이 곧바로 물건을 보냈더라고요. 돌려주기 전에 구경하시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당장 갈게요!”

달걀을 보고 난 뒤에 함께 점심이라도…. 뒷말을 할 겨를도 없이 전화가 뚝 끊어졌다.

“이 아가씨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네?”

도윤은 일단 샤워와 면도를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띠를 꺼내서 펼쳐보았지만, 맑은 머리로 살펴봐도 여전히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러다가는 드레스너 사장에게 달걀을 고스란히 그냥 넘겨줘야만 할 판이었다.

“그건 곤란하지. 지금까지 아무도 열지 못했던 걸 내가 열었잖아. 그런데도 빈손으로 그냥 돌려준다는 건 말이 안 돼.”

도윤은 띠를 둘둘 말아 자신의 여행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파베르제의 달걀과 띠가 들어있던 순금 통을 안팎으로 깨끗이 닦아냈다. 지문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방 안을 둘러보니 커피포트 옆에 작은 초콜렛 과자가 몇 개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호텔 측이 손님들을 위해 제공한 것이었다. 그는 과자를 집어서 순금 통 안에 넣었다. 그걸 또 달걀 안에 집어넣고 위아래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결합시켜 비틀자, 짤깍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히 고정되었다. 표면에 묻어있던 물기도 완전히 마른지 오래라 겉으로 보기에는 처음 빌려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중에 누가 달걀을 열면 기절초풍하겠군. 20세기 초반의 세공품 안에서 21세기의 초콜렛 과자가 나올 테니 말이야. 오파츠라고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닐지 몰라.”

히죽 웃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최서라인 줄 알고 얼른 잡아챘지만 액정에 찍힌 이름은 아쉽게도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

“나다. 한국에는 언제 오냐?”

늘 그렇듯이 대뜸 본론을 꺼내신다. 어릴 때는 그렇게 자상하던 아버지가 머리카락 사이로 흰머리가 늘면서 점점 무뚝뚝해지셨다.

“말씀드렸잖아요. 스코틀랜드까지 올라갔다가 갈 거라고. 한 달 쯤 더 걸릴 거예요.”

“몸은 어떠냐?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기에 전화했다.”

“일 년이 다 되어 간다고요? 저 집 떠난 지 아직 반년도 안 되….”

“그게 아니라 링크 말이야. 너 마지막으로 능력을 이어준 게 벌써 작년 이맘때잖아. 일 년에 한 번은 링크를 해줘야 된다는 걸 잊은 건 아니지?”

“잊기는요. 그걸 잊을 리가 있겠어요?”

“여유부릴 때가 아니야. 그러다 또 재작년처럼 길 가다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에이, 그때야 군대 있을 때니까 그랬죠. 작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잖아요.”

“그래도 서둘러라. 유물이랑 주인은 찾았고?”

“아직이요. 그래도 늦기 전에 나타나겠죠. 일부러 모른 척 하지 않는 이상에야 지금까지 늘 그랬잖아요. 기다리면 나타날 거예요.”

“아직 못 찾았다는 소리구나.”

“네. 걱정 마세요. 곧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네 발로 여기저기 찾아다녀 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만 말고.”

“요즘 열심히 여기저기 다니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건강하시죠?”

“나야 늘 그렇지. 그럼 끊는다.”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엄마한테도 안부 전해드리고요.”

대답 없이 전화가 뚝 끊어졌다. 도윤은 꺼진 전화기를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자신이 홀로 유학을 떠난 뒤부터는 통화를 해도 항상 이렇게 용건만 얘기하고는 끊으신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걱정되면 말이라도 좀 친절하게 하시지.

“그나저나, 그러고 보니 벌써 일 년이 다 되긴 됐나 보네.”

아버지 말마따나 슬슬 초조하게 뛰어다니기라도 할 때가 되기는 했다.

*   *   *

다산으로부터 물려받은 뛰어난 기억력 외에도 도윤은 현재 남들과 다른 능력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수막염에 걸려 죽을 뻔한 위기를 겪고 난 뒤에 각성한 것이다.

고조부도 종로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신안을 얻었다고 들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는 가문의 내력인 것 같기도 했지만, 전쟁 통에 폭격을 맞고 죽다 살아났다는 증조부는 아무런 능력도 각성하지 못했다. 유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고조부와 유사한 경로를 거치기는 했지만, 도윤이 얻은 능력은 고학 이인하보다 더 강력했다. 심지어 각성한 능력이 세 가지나 되었다. 하나는 고조부처럼 빛의 유무로 사물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이른바 신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물에 남아있는 잔류 기억을 보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링크였다.

잔류 기억이 남아 있는 물건은 흔치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 흔치 않은 것이 바로 잔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물이었다. 그런 유물들은 적당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담고 있는 능력을 전해줄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을 도윤은 유물의 주인이라고 불렀다.

잔류 능력이 담긴 물건을 유물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물건에 능력을 남겼다고 해도, 그 사람이 죽지 않으면 물건이 가진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도윤은 중국에 있을 때 우연히 그 사실을 확인했다.

유물과 주인이 만났다고 해서 능력이 저절로 옮겨지는 건 아니다. 도윤의 눈으로 보면 유물과 주인이 서로 만날 경우 양쪽 모두 붉은 빛에 휩싸인다. 그 빛이 서로 이어지면 능력이 전해지게 되는데,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링커의 중개가 필요하다. 물론 링커라는 용어 역시 도윤이 직접 만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세상에 링커가 나 밖에 없는데.”

사실 도윤도 자신이 유일한 링커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아직까지 그 이외의 다른 링커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하긴 돌아가신 고조부 외에는 신안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링크하는 능력은 그냥 사라져 줬으면 좋겠어.”

도윤이 작게 투덜거렸다. 링크 능력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최소 일 년에 한 번씩 유물과 주인을 링크시켜주지 않으면 깨어질 듯한 두통에 시달리다가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 때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중국에 유학가기 전인 열세 살 때의 일이었는데, 하필이면 유물의 주인으로 낙점된 녀석이 평소에 무척 재수 없게 여기던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짐짓 모른 척하고 시기를 넘겼다.

그는 그 대가로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시달리다가 대로 한복판에서 기절해버렸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뒤에도 무려 한 달 넘게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두통과 구토, 무기력증으로 인해 엄청나게 고생했다.

두 번째 사고는 군대에 있을 때 발생했다. 유물의 주인으로 낙점된 사람이 하필이면 고위 장성이었던 탓이다. 당시 말단 사병이었던 그로서는 제한 시간이 넘을 때까지 유물의 주인 곁으로 접근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 때문에 도윤은 훈련 도중에 기절해서 의무대에 실려 갔고, 마찬가지로 한 달 내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팔자지 뭐. 능력을 내가 골라서 받은 것도 아니고.”

도윤이 입맛을 다시는 찰나, 다시금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정말 최서라였다.

“호텔 로비에 있어요. 지금 방에 올라가도 될까요?”

도윤의 승낙을 받은 그녀는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을 두드렸다. 도윤의 인도를 받아 안에 들어온 그녀는 먼저 그에게 리본이 매인 얇고 긴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어제 명함을 꺼내실 때 우연히 봤는데, 지갑이 좀 낡으셨더라고요. 어제도 말로만 고맙다고 하고, 오늘 또 귀한 물건까지 보여주시는데 빈 손으로 오기 그래서요. 지갑이에요.”

포장을 뜯어보니 남성용 지갑이었다. 도윤도 익히 알고 있는 명품 브랜드.

“이거 꽤 비싼 걸로 아는데, 너무 과한 선물이네요.”

“과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받은 게 그 지갑보다 훨씬 과하죠.”

사실 들고 다니던 지갑이 조금 낡기는 했다. 게다가 남자 지갑이니 돌려주면 환불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치를 보니 절대로 돌려받지 않을 기세였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도윤은 그녀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얼굴이 환해진 최서라가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파베르제의 달걀을 보더니 눈이 동그래져서 다가갔다.

“어머? 예술 작품이라고 하더니 정말 근사해요. 예쁘기도 하고, 우아하기도 하고.”

“우아하다는 표현이 적당할 겁니다. 그리고 어제 제가 파베르제의 첫 번째 달걀에 대해 말씀드렸죠? 그건 마지막 작품입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완성됐으니까요.”

“그럼 이것도 비싸겠죠?”

“물론입니다. 그 달걀 직전에 거래된 마흔 일곱 번째 달걀은 미국 중서부의 벼룩시장에서 발견됐죠. 보석으로 치장된 물건이라 벼룩시장 물건치고는 꽤 비싼 값에 팔렸는데 그게 만사천 달러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1,850만 달러에 낙찰됐어요.”

“천 배가 훨씬 넘네요? 누군가 횡재를 했겠어요."

“처음 구매했던 사람은 크게 횡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몇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가격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졌죠. 원래 미술 시장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큰돈을 못 벌어요. 물건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아야죠.”

고개를 끄덕이며 달걀을 이러저리 살펴보던 최서라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지금까지 아무도 열지 못했다는데, 혹시 이 박사님은 열어 보셨어요?”

기대가 잔뜩 담긴 목소리였지만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심성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비밀을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아뇨. 저도 열지 못했습니다. 하루 만에 열 수 있다면 이미 다른 사람이 진즉에 열었겠지요. 하지만 직접 보고 살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

말을 하던 도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파베르제의 달걀에서 붉은 빛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똑같은 빛이 최서라의 몸에서도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아무리 유물의 주인을 찾아줘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고 해도 상황이 참으로 공교로웠다. 몇 시간 후면 크리스티 측에서 달걀을 돌려받기 위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도윤은 제발 최서라가 너무 오래 기절해 있지 않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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