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3. 파베르제의 달걀>
잠결이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시끄러운 소리에 니콜라이 2세는 잠깐 눈을 떴다가 도로 감았다.
‘바람 소리가 거칠군.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것 같아.’
그러나 그게 바람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소스라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른 옷을 걸치고 방문을 열자 복도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황후와 공주들. 그리고 네 명의 딸을 낳은 끝에 어렵게 얻은 어린 왕자까지. 다들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전원 옷을 입고 일층으로 모이시오.”
유로프스키의 날선 목소리가 아직 잠에서 덜 깬 사람들의 정신을 차갑게 일깨웠다. 볼셰비키에 소속된 보안 조직 체카의 우두머리. 경찰이자 재판관이며 간수인 동시에 여차하면 사형집행인이 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열 명이 넘는 황가의 구성원들은 서둘러 일층으로 내려갔다. 네 명의 공주들은 모두 짙은 잿빛 치마 위에 하얀 블라우스, 황제를 비롯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혁명군이 제공한 군복을 입은 채였다. 그나마 코트라도 걸친 사람은 황후뿐이었다.
말년에 얻은 유일한 아들인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앓느라 쇠약해진 관계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누군가 어린 왕자를 부축했다. 서둘러 일층의 넓은 방에 모인 그들에게는 단 두 개의 의자가 제공되었다. 어린 왕자와 황후가 거기에 앉았다.
황가 일행이 모두 모이자 유로프스키가 품에서 잘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는 그의 목소리가 러시아 겨울의 새벽 공기보다 더 차갑게 울려 퍼졌다.
“…… 노동자를 위한 정당 소비에트는 니콜라이 로마노프씨 일가에게 사형을 선고했소.”
“뭐라고? 잘 들리지 않는데….”
아직 중년에 불과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귀에 손을 갖다 대며 물었다. 유로프스키는 아무런 대답 없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다수의 군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황가 일가를 향해 총을 겨눴다.
탕, 탕, 탕, 탕, 탕…
요란한 총소리가 방 안을 가득 덮는 순간, 황제는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이마 한 가운데 총을 맞고 쓰러졌다. 즉사였다. 황후는 의자에 앉은 채로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곧이어 다른 일행들도 피를 흘리며 나뒹굴기 시작했다.
황가 일가가 몰살당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채 벽에 기대어 있던 공주 한 명이 마지막까지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유로프스키가 직접 다가가 그녀의 턱밑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1918년 7월 16일 새벽 2시.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에서 울려 퍼진 마지막 총소리였다.
* * *
템즈 강 북쪽 밀뱅크에 위치한 ‘테이트 브리튼’은 이름 그대로 영국인들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대규모 미술관이다. 이곳에 오면 15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영국 예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테이트 브리튼 내에는 아주 고급은 아니더라도 제법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이 하나 있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마저 한가롭게 느껴지는 미술관의 점심시간, 두 명의 여자가 레스토랑 입구에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장 박사님, 그러지 말고 미술관 밖으로 나가자니까요.”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삼십대 후반의 여자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장 박사라고 불린 삼십대 여자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가 좋아요, 서라 씨. 정작 이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면서도 여기는 비싸서 자주 못 왔거든요. 오늘은 서라 씨가 산다고 했으니까 오랜만에 마음 편히 먹어볼 수 있겠네요. 여기 쇠고기 타르타르가 먹을 만 해요.”
“장 박사님 덕분에 모처럼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 됐어요. 그래서 정말 제대로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요. 제가 미리 예약해둔 곳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요.”
“글쎄. 여기면 충분하다니까요. 그냥 들어…, 어머, 조심해요.”
실랑이를 하느라 미처 앞을 살피지 못한 게 실수였다. 최서라는 장 박사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몸을 돌리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남자와 제법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너 뭐야, 이 빌어먹을 년이!”
갑자기 들린 거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던 최서라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앞에 건장한 체격의 흑인 남자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던 것이다. 대충 봐도 190cm는 넘는 장신에 근육이 탄탄하게 잡힌 거한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녀는 얼른 사과했다. 그런데 상대는 그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죄송하면 다야? 눈이 작아서 앞이 안 보여? 내가 좀 더 옆으로 찢어줄까?”
생각지도 못한 막말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최서라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자 옆에 서 있던 장 박사가 나섰다.
“이봐요.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요? 아무리 실수를 했어도 그렇지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해요.”
“넌 또 뭐야, 이 창녀 같은 년아!”
“뭐? 창녀? 이 자식이 말이면 다하는 줄 알아?”
함부로 욕지거리를 쏟아내는 흑인 남자로 인해 장 박사가 발끈했다. 그녀가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자 남자가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이를 드러냈다.
“이 노랭이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개처럼 짖어대는 거야? 진짜 한 번 개처럼 처맞아 보고 싶어?”
남자가 한 손을 번쩍 쳐들었다. 깜짝 놀란 장 박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뒷모습만 보이기는 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피부 색깔로 봐서는 분명히 동양인이었다.
“어이, 그만 하지? 미술관에서 숙녀 분들에게 이게 무슨 행패야?”
“넌 또 뭐야, 이 새끼야.”
오른손을 잡힌 흑인 남자가 대뜸 욕을 하며 왼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릎만 살짝 굽혀 주먹을 피한 동양인 청년이 발을 뻗어 상대의 오른쪽 무릎 밑을 툭 하고 쳤다. 흑인 남자가 비틀거리는 순간, 청년이 균형을 잃은 그의 팔을 잡은 채 한 바퀴 돌렸다. 상대의 몸이 반대방향으로 휙 돌아갔다. 그런 그의 등을 툭하고 밀자 흑인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서너 걸음 앞으로 밀려가고 말았다.
“그만 해. 저기 경비원들이 뛰어오고 있는 거 안 보여? 더 하면 서로 곤란하다고.”
그제야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경비원을 발견한 흑인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청년을 노려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가 씩씩대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경비원들이 장 박사들을 쳐다봤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별 일 아니에요. 그냥 가셔도 됩니다.”
경비원들이 어깨를 으쓱하고 사라지자 청년이 장 박사에게 다가왔다. 그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장 박사님? 여기 오면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상한 상황에서 인사를 드리게 됐네요.”
청년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비로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장박사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활짝 폈다.
“이게 누구야? 이 박사 아냐?”
“에이, 이 박사는요. 그냥 예전처럼 도윤이라고 불러주세요.”
“그건 아니지. 학위를 받았으니까 이젠 어엿한 학자잖아. 그나저나 런던에는 언제 왔어?”
“한 달 정도 됐어요. 여기저기 구경하고 싶어서 놀러왔어요. 잘 지내셨죠?”
“나야 늘 똑같지. 그럼 여행 온 거야? 영국에는 얼마나 오래 머물 예정인데?”
“스코틀랜드까지 올라갔다 내려올 거니까 한 달 정도 더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잘 됐네. 그럼 런던에 있는 동안에라도 연락 좀 해. 술이나 한 잔 같이 하자.”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장 박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옆에 서 있던 최서라를 소개했다.
“아참, 인사해. 여기는 최서라 씨.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옥스포드에서 석사를 받았어. 지금은 소더비 인스티튜트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아가씨야. 미래 그룹….”
최서라를 소개하던 장 박사는 그녀가 옆구리를 살짝 치자 급하게 말을 삼켰다.
“이도윤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최서라예요.”
도윤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최서라도 마주 허리를 숙였다. 장 박사가 흐뭇한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이 박사는 하버드에서 후기 인상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아, 네.”
최서라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장 박사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참, 잘 됐다. 이럴 게 아니라 아직 점심 전이면 식사나 함께 하는 건 어때? 우리도 이제 막 밥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려던 참인데. 서라 씨는 어때?”
최서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윤이 손을 내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방금 먹었어요. 점심 먹고 레스토랑에서 막 나오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아까 그 놈은 도대체 뭐예요?”
“그 흑인 남자? 뭐긴? 덩치만 믿고 입에 걸레를 물고 다니는 한심한 놈이지. 서라 씨가 실수로 살짝 부딪쳤는데 다짜고짜 욕을 하더라고. 누가 들으면 트럭에라도 받힌 줄 알겠어.”
“욕을 했어요? 저는 식당에서 나오다가 그 자식이 박사님을 향해 손을 쳐드는 걸 보고 일단 말렸던 건데. 욕까지 한 줄 알았으면 손목이라도 살짝 꺾어놓을 걸 그랬네요.”
“됐어. 남의 땅에서 살다보면 가끔씩 겪는 일이야. 백인은 흑인을 무시하고, 그 흑인은 또 우리 같은 아시아인들을 업신여기고. 흔한 인종차별의 사슬이지 뭐. 아무튼 우리 이 박사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준 덕분에 흉한 꼴 보지 않고 마무리 됐으니 고마워.”
“에이, 고맙기는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그래. 꼭 연락 해. 또 보자고.”
도윤이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장 박사와 최서라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최서라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 분은 진짜 박사예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젊은 것 같던데.”
그 말에 장 박사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거 맞아요. 올해 스물여덟이니까. 근데 박사를 받은 건 스물다섯 살 때에요.”
“스물다섯 살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요?”
“네.”
“우와, 진짜 머리가 좋은가 보네요? 어떻게 그 나이에….”
“이도윤 박사는 천재예요. 내가 알기로는 중국에서 대학을 마친 뒤에 바로 하바드로 갔을 거예요. 거기서 5년 만에 석, 박사를 모두 받았으니까 평범한 사람은 아니죠.”
“잘 아는 분이에요?”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 대회에 참가하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됐어요. 이 박사가 아직 이십대 초반일 때였는데, 그 뒤로 여러 번 봤죠. 진짜 샤프하고 스마트한 친구예요.”
“그럼 군대는 안 간 거예요? 면제인가요?”
장 박사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우리 서라 씨가 은근히 관심이 생겼나 보네? 아까 이 박사 보니까 어때요? 잘 생겼지 않아요? 키도 180이 넘고 집안도 제법 잘 사는데. 혹시 마음이 있으면 소개시켜 줄까요?”
최서라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손을 저었다.
“저 아직은 남자를 사귈 만한 여유가 없어요. .
“남자 사귀는 게 휴가 계획 세우는 것도 아닌데 무슨 여유를 따지고 그래요?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일단 대시하고 보는 거지.”
“그러는 박사님은 왜 아직 혼자 사세요.”
“왜겠어요? 영국 남자들이 여자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지. 아무튼 이 박사는 박사 학위 마치고나서 군대 다녀왔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학위 받은 뒤로 한 2년 넘게 소식이 없었는데 나도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
때마침 주문했던 식사가 나오는 바람에 이도윤에 대한 얘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꽤 인상이 좋은 남자기는 했지만 그 때만 해도 최서라는 그렇게 빨리 이도윤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 * *
일주일 후, 최서라는 중년의 백인 남자와 함께 크리스티 경매장을 방문했다. 서울에 있는 고모의 부탁 때문에 프리뷰 전시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경매장들은 실제 경매에 들어가기 전에 판매할 물건들을 미리 일반에게 공개한다. 프리뷰라는 행사인데, 응찰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고 싶은 물건을 미리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 때에 한해서는 응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전시된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고모님이 개인적으로 꼭 소장하고 싶어 하시는 작품이에요. 오스틴 씨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프리뷰 전시장에 들어서던 최서라가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런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아트 딜러인 이안 오스틴이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네의 그림은 예전에 여러 번 거래해 본 적이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오늘 전시된 세 점 가운데 위작이 섞여 있다는 소문은 들으셨죠?”
“솔직히 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크리스티가 감정해서 경매에 올리기로 결정한 작품이 아닙니까? 아마 헛소문일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잘 부탁드릴게요. 전례가 없던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전시장에 들어가 진열된 작품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서라는 다른 작품들을 모두 젖혀 놓고 구매를 염두에 두고 있는 모네의 수련 연작이 있는 곳으로 먼저 향했다. 세 점의 커다란 유화가 나란히 걸려 있는 곳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레 있을 경매에서 가장 관심을 받을 작품인 탓이었다.
‘저 사람은?’
최서라는 모네의 그림 앞에 서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다. 당시의 캐주얼한 차림새와는 달리 수트를 걸치고 구두를 신기는 했지만 분명히 봤던 사람이었다.
“저기, 혹시 이도윤 박사님 아닌가요?”
동양인 치고는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젊은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최서라씨?”
역시 테트라 브리튼에서 봤던 그 남자, 이도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