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06 [에필로그] 세상을 내 손에 =========================================================================
영원그룹 최고경영자인 박현준 회장은 아직도 몇 년 전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로 오천만 원을? 겨우 10분 상담에?’
―저희 회사는 원래 개인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특히 개인이 실험적으로 구상한 약의 제조 위탁 같은 것은 받지 않습니다. 다만 제조설비의 성능이 미흡한 대학에서 화합물 제조를 부탁하는 경우에는 지원하고 있습니다. 학술 지원 목적인 거죠. 혹시 약대에 다니시나요?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만들고 싶은 약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일에 쓸 데가 있습니다.
―위험물질도 아니고 이런 성분이라면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겠습니다. 다만 위탁 제조를 위해서는 합당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학술 지원 사업처럼요.
―15억을 드리겠습니다. 회사가 가지든 차장님이 가지든, 전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저 이 세 가지 화합물을 아주 조금만 제조해주시면 됩니다.
―학술 지원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위탁 제조는 회사에서도 꺼려할 겁니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죠. 연락처를 주시겠습니까?
진성제약 차장,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사원이지만 어쨌든 평범한 월급쟁이.
하지만 그 날의 특별한 인연을 기점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더군다나 원래 그날은 그가 연차를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출근하기로 한 날이었다. 만약 그날 연차를 썼다면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떨까? 그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회장님, 세계보건기구에서 나오신 분들이 지금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FDA 국장과 식약처장 일행도 벌써 도착했습니다. 이제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알았어요.”
박현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회장이고 상대는 이제 20대 초반의 여비서지만 그는 존댓말을 쓴다. 그뿐만 아니라 그룹 임직원 모두는 상호존칭을 원칙으로 한다.
서로 사적인 친분 관계가 발전하더라도 회사 내부 혹은 업무의 영역 안에서는 무조건 상호존칭을 써야 한다.
그룹 소유주인 한서진부터 말단 직원에게 존칭을 쓰는데, 고위 임원이라고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으랴.
‘격세지감이지, 참…….’
WHO 수장은 물론이고 각국 정부 최고 인사들도 자신 앞에서는 깍듯하게 대했다. 진성제약 차장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이다.
영원그룹은 세계 제약 시장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간을 아예 0에서부터 재생시키는 H-1, 전 세계 수천만 탈모인들을 구제한 H-2(더불어 여성들에게는 제모제로 각광받고 있음),인류를 암으로부터 구원한 H-4.
여기에 만병에 효능을 발휘하는 H-5까지. 물론 간, 탈모, 암에는 1, 2, 4가 훨씬 효과도 좋고, 치유 속도도 빠르다.
영원그룹이 취급하는 약은 단 네 종류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 전 세계 제약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H-5 하나만으로도 전 세계 모든 제약회사를 도산시켜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원그룹은 공존을 선택했다.
선진제약 회사들의 기득권을 인정했다. 기존에 특효약이 존재하는 질환에 H-5를 처방할 때, 약값을 좀 더 비싸게 책정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는 좀 더 싼 기존 치료약을 선택하게 된다.
반대로 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거나, 치료 기간 및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질환이나 환자의 경우에는 H-5를 적극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환자들의 건강과 목숨도 지키고, 기존 제약 회사들의 밥그릇도 지켜줬다.
하지만 세상은 알고 있다. 앞으로 제약 시장은 영원그룹만이 홀로 남아서 독주하게 되리라는 것을.
실제로 제약 사업은 완전히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제약회사들은 더 이상 큰돈을 들여 신약을 개발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질환에 특효가 있는 만병치료제가 존재하는데, 굳이 신약을 개발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지금은 영원그룹이 선포한, 일종의 유예기간이었다.
기존 제약업체들이 손해를 보지 않고 사업을 정리할 수 있게끔 배려한 숨고르기 시간이었다.
제약업체들은 이미 사업을 조금씩 정리하거나, 아니면 영원그룹과 부딪치지 않는 방향으로 사업 방향을 틀고 있었다. 이를 테면 제약 유통로 개척 같은.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영원그룹 회장 박현준입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다들 일제히 일어섰다. 마치 회사 최고 상사를 맞이하는 직장인들처럼 군기가 들어 있다.
박현준은 회의실 주축 인원 중 가장 젊었다. 하지만 그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큰 영향력을 지녔다.
“저번의 그 안건이…….”
회의를 진행하다 말고 박현준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혹시 진영후 사장님 아니십니까?”
“아, 알아봐주시는군요. 회장님.”
상대는 황송하다는 듯이 굽실거렸다. 그는 박현준이 진성제약에 근무하던 시절의 사장이었다. 쉽게 말해 옛날 최고 상사.
“여기는 어떻게?”
“실은 제가 이번에 식품의약품안전처 처장으로 내정이 돼서 말입니다. 아직 정식 임명은 아닙니다만, 이번 안건이 워낙 중대한 것이라서 곧 물러나실 현 처장님을 대행해서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아닙니다.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옛날 일했던 회사 사장을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물론 진성제약은 오래 전에 영원그룹에 합병되어,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잘 지내시는 모양이군요. 식약처장으로 내정되시다니 말입니다. 당시 인수합병 때 나름 걱정했었습니다.”
“아이고, 걱정해주셨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와 박현준은 큰 접점이 없다. 퇴사할 때만 해도 자신은 일개 차장이었고 상대는 사장이었으니.
그러나 이제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벌어졌다.
과거 인연으로 반갑게 잡담을 나누지만, 누구 하나 끼어들지 못했다. 그 잡담을 나누는 주체가 영원그룹 회장이었으니까.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나서 그만. 자, 다시 이야기를 해볼까요?”
“예, 회장님. 일단 우리 WHO에서는…….”
과거 연봉 7천만 원을 받던 샐러리맨 박현준은 연봉 50억을 받는 전문경영인이 되었다.
가끔 세상은 영원그룹 같은 초거대 공룡 제약회사의 최고경영자가 연봉 50억 원 밖에 안 된다는 것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박현준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회사의 네 가지 주력 상품은 한서진 박사님께서 단독으로 개발하신 것이며, 그것의 생산과 판매를 관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봉 50억도 매우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계 의료 정책은 그 연봉 50억짜리 월급쟁이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
백철중 회장 일족은 몇 몇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제주도 유배령을 받고 있었다. 백철중의 전처의 친정인 성진그룹이 H그룹을 집어삼키려 했을 때, 성진그룹의 손을 들어 그룹을 차지하려 했던 백철중의 자녀들은 처자식과 함께 제주도로 쫓겨났다.
집안의 가장이 내린 명령이기에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 상속에 관심이 없다면 허락 없이 제주도를 벗어나도 된다.
―내 말을 어기면 단 돈 1원도 없을 줄 알아라! 소송? 어디 해볼 테면 마음대로 해 보거라!
그런 백철중의 엄포에, 일족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제주도에서 한껏 웅크렸다.
제주도를 벗어나려면 합당한 사유로 백철중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른바 가문 비자를 발급받는 것이다.
그러나 백철중은 건강상의 문제 등 정말 중대한 사유가 아니면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백씨 일가는 가문 행사 외에 거의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백철중의 장남 백형진은 한서진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때 생모의 꾐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아버지를 대노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자신은 매제의 옆에서 승승장구하며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었을 텐데!
그의 마음속에 한서진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물론 없었다.
그의 원망은 오로지 생모인 오수현을 향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녀, 다른 형제자매와 조카들도 한 마음 한 뜻으로 오수현을 원망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꼬드기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제주도에 갇혀 지낼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울분을 참으며 하루하루를 겨우 견디고 있을 무렵, 서울에서 뜻밖의 소식이 내려왔다.
백철중이 모든 가족을 소집한 것이다. 거기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무언가 아주 중대한 발표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보다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은 얌전히 제주도에서 아버지가 용서하실 때만을 기다렸으니까.
그래서 모든 일족은 부푼 마음을 안고 송하나가 보낸 전용기를 탔다.
“이게 6천억 원짜리 전용기라면서요?”
“세계에서 가장 큰 점보기래요. 근데 하나는 이런 전용기만 다섯 대를 갖고 있대요. 한서진 박사 이름이 아니고 하나 이름으로 된 거래요.”
“세상에나.”
1, 2층 모든 좌석이 퍼스트 클래스로만 이뤄진 보잉 전용기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백씨 일족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그들은 백철중의 한남동 사택으로 모였다.
사택은 그들이 알던 모습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거의 요새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철통같은 경비망이 세워져 있었다. 곳곳에서 미군이 철통처럼 경호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긴장돼서 마른침을 삼켰다.
“왔느냐.”
응접실에 모두 모인 채 한참을 기다렸다. 마침내 백철중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
“할아버지.”
“아버님…….”
저마다 기대와 설렘, 긴장감이 묻어나는 음색으로 백철중을 맞이했다.
개량 한복을 입은 백철중은 권위적인 태도로 직계일족들을 훑어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때 또각거리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일족들은 일순 숨을 멈췄다. 검은 정장을 입은 송하나가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족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백철중의 옆에 앉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도도한 표정은 철저히 구분된 신분을 느끼게 한다.
“내 나이와 건강을 고려할 때 다소 이른 건 사실이다만, 오늘 이 자리에서 상속 문제를 모두 마무리 짓겠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선언에 좌중이 바짝 얼어붙었다.
그들은 몰래 송하나를 훔쳐보던 시선을 거두고, 백철중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칠세라 귀를 활짝 열었다.
“이건 내가 가진 재산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백철중이 말을 열자 비서들이 나와서 일족 한 명 한 명에게 서류를 나눠주었다.
“크게 정리하자면 그룹 계열사 지분과 이 집, 그리고 국내 여러 부동산과 현금, 금괴, 유가증권과 예술품들이다. 그 현재 가치는 6조 원이다.”
백형진을 비롯한 형제자매들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자신들이 알기로 부친의 개인 자산은 3조 원 남짓, 그런데 몇 년 사이에 6조 원으로 늘어났다. 그룹 비자금은 죄다 사회에 환원했으니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모두에게 공평하게 1조 원씩 돌아갈 것이다.”
백철중의 자녀가 모두 6명이니 비율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내 전 재산을 하나에게 일괄상속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가 다른 형제 5명에게 1조 원씩 현금으로 줄 것이다. 간단하고 좋지 않느냐?”
“아, 아버지! 이건!”
형제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현금은 자산 중에서 가장 가치가 떨어진다. 재벌 행세를 하려면 계열사 지분을 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돈으로 받아봤자 현금만 잔뜩 있는 평범한 부자로 전락하고 만다.
재계에서 경제인으로 행사하는 건 끝이다. 기껏해야 명동 사채업자로나 행세할 수 있겠지.
“헛소리 하지 마라! 내 지분이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아! 그리고 너희들한테 그룹 경영을 맡기느니, 하나한테 모두 몰아주는 게 낫다!”
백철중의 사나운 일갈에 다들 움찔했다. 백철중은 아들딸들을 노려보며 말을 계속했다.
“냉정히 따지면 6조 원은커녕 5조 원도 간신히 넘는다. 너희들은 본래 몫보다 더 많이 가져가는 줄 알아! 게다가 하나가 증여세까지 부담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거냐?”
“…….”
“그룹을 갈가리 찢어서 성진그룹에 넘기려고 했던 주제에 감히 그룹 지분을 탐내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현금이나마 공평히 챙겨주는 걸 감사히 여겨라. 아니, 더 많이 받았으니 황송한 줄이나 알아라.”
그룹으로 복귀할 길이 완전히 사라진 형제자매들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부친은 확실하게 경고한 것이다.
그룹은 물론이고, 송하나나 한서진에게 얼쩡거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그저 챙겨준 현금으로 쥐 죽은 듯이 살라고.
“내 뜻을 따르겠다는 놈은 지금 이 순간부터 제주도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자녀들은 결국 부친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 늙기 전에 재산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한 백철중도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막내딸에게는 없어도 그만인 푼돈이지만, 그래도 적은 재산이니만큼 더 확실하게 챙겨줘야 자신의 마음이 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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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__)(--)
에필로그도 서둘러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