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05 [에필로그] 세상을 내 손에 =========================================================================
“야, 송하나. 나 왔어.”
H컨설턴트 본사 사무실에 출근한 송하나는 이른 아침부터 신효진의 방문을 받았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일찍.”
“친구 만나러 오는데 뭐 이유 필요해? 아랍 여행 언제 갈 거냐고 물어보러 왔어.”
“야, 신효진!”
“얘는 여행 가자는 것도 질색하네.”
신효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리에 앉아서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치마 정장 아래로 길게 뻗은 검은 스타킹이 묘한 색기를 뿜는다.
그녀는 전반적으로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조금은 주눅 들고, 삶에 찌들어 있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귀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가씨처럼 온몸에 당당함이 붙었다.
“근데 벌써 출근해도 돼? 출산한 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 한창 산후조리에 신경 쓸 때 아니야?”
“요즘은 약이 워낙 좋아서 상관없어.”
송하나는 얼마 전 건강한 딸을 출산했다. 그녀가 딸을 낳았을 때 전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하며 다뤘다. 송하나의 SNS(얼마 전부터 시작했다)에는 출산을 축하한다는 방문객들의 인사만 1억 개가 넘어갔다.
그녀는 이미 한서진 못지않은 유명 인사였다. 빼어난 미모와 큰 키에 사기적인 몸매, 한국대 출신에 H그룹 회장의 딸. 여기에 한서진의 배우자라는 사실까지 더해졌으니.
전 세계의 수많은 소녀들은 송하나를 바라보며 꿈을 꾼다. 그녀는 꿈을 꾸는 소녀들이 바라는 이상이었다.
“약? 아, 맞다. 너 H-3 먹었다고 했지.”
미용 목적의 H-3는 육체의 최적화 작용을 돕는다. 덕분에 송하나는 임신 중에도 입덧 같은 부작용에 전혀 시달리지 않고 무탈하게 출산을 했고, 별도의 산후조리를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일상생활에서 큰 무리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송하나는 한숨을 쉬고는, 신효진을 주시했다.
“너 연애 안 해? 내가 남자 하나 소개시켜줄까?”
“아랍이나 가자아.”
“너 그럴 거면 집에나 가!”
신효진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둘은 말로만 친구가 아닌, 진정한 절친으로 거듭났다. 현생까지 이어지는 전생의 기억을 공유하는 둘은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아랍으로 이민 가자는 반쯤 진심이 섞인 장난을 받아넘겨줄 수 있는 것도, 그리고 받아넘겨줄 거라 믿고 장난을 던지는 것도,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H컨설턴트도 평성으로 이사하지?”
“어, 지금 신사옥 정리 중이야. 끝나는 대로 바로 본사 옮길 거야.”
“그럼 서울은 이제 망하는 거야?”
“에이, 그럴 일은 없어. 하지만 예전의 명성은 이제 사라질 거야. 그냥 평범한 수도 도시가 될 테니.”
비록 예전의 위상을 잃겠지만, 서울은 여전히 남부 지역 제일의 도시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서울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있긴 했어. 이제 좀 조용해지려나.”
“근데 너 배우 한다면서?”
“응, 한국의 판빙빙이 되어보려고. 회사도 벌써 만들었어.”
신효진은 자신을 서포트해 줄 1인 기획사를 만들어서 연기자에 도전장을 던졌다.
한때 모델로 유명했던 그녀의 복귀 소식에 연예계는 지금 잔뜩 달아오른 상태였다. 단지 그녀가 예쁘고 모델로 유명세를 날렸던 것 때문이 아니었다.
한서진과 송하나와의 관계, 그리고 그녀가 지닌 막대한 재산 덕분에 연예계 전체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잘 됐네. 하는 김에 연예계 그쪽 물 좀 정화해줄래? 거기 질 나쁜 관행이 엄청 많다던데.”
“상납 같은 거야 H컨설턴트에서 다 잡아낼 테고…… 뭘 해달라는 건데?”
“자잘한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나쁜 관행 같은 거. 그런 거 되게 많다며?”
“엄청 많지. 알았어, 보이는 대로 족쳐볼게. 나도 그런 거 보면 속 터져서 치우는 게 낫더라고. 너 닮아가나 봐.”
“솔직히 네가 배우를 할 줄은 몰랐는데.”
“심심해서. 쇼핑도 이제 지겹더라고.”
신효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는 영화도 직접 제작해서 배급도 해볼까 해.”
“잘해 봐.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찾아왔어. SJ엔터테인먼트 말인데…….”
“SJ엔터테인먼트가 왜?”
“BII 기술로 영화나 드라마도 찍을 수 있잖아. 그거 우리 회사에서 먼저 써보면 안 될까?”
가상현실 기술은 현재 많은 곳에서 탐을 내고 있었다. 엔터테인먼트, 교육, 군사, 정치, 교육, 여행사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현재 SJ엔터테인먼트는 여행 등 체험 컨텐츠를 주력으로 삼고, 가상현실 게임을 하나둘씩 내놓으며 시장을 점령하는 중이었다.
세계 여행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월드투어VR 컨텐츠는 일일 매출 30억 달러를 돌파한 지 오래였다.
“SJ엔터테인먼트 지금 게임 개발하는 거 때문에 인력이 엄청나게 모자라다던데. 영화 촬영 같은 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야.”
“네가 한 마디 해주면 되는 거잖아. 어차피 네 회사인데 무슨 상관이야?”
“내 회사가 아니라 오빠 회사지.”
“부부일심동체잖아. 오빠 회사가 네 회사지, 뭐.”
“남의 오빠를 은근슬쩍 오빠라고 부르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송하나는 태블릿을 켜고 메일을 작성하고 있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신효진이 영상 컨텐츠를 제작하려는데 적극 도와주기를 바라는 당부였다.
“회사에 메일 보내놨어. 나중에 따로 접촉해봐.”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
어느새 일어난 신효진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가끔 티격태격하긴 하지만, 이 둘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
정지원은 오늘 일정을 보고 한숨을 쉬며, 비서를 돌아보았다. 비서도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존 캐롤 의원님하고 저녁 약속이라고?”
“그게…… 이미 여러 번이나 거절을 해서 더 이상 거절을 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존 캐롤 의원님에게 결례가 되기도 하고요. 누가 뭐래도 차기 미국 대통령 아닙니까.”
민주당의 존 캐롤 의원은 현재 매우 강력한 대선 후보였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그가 무난히 경선에서 승리하고, 백악관까지 직행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 존 캐롤 의원은 근래 들어 정지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껏 힘을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 서열 3위의 거부이자(1위는 SJ인더스트리의 지분 10.5%를 가진 크렘 회장, 2위는 2%를 가진 칼 루이스) 한서진의 오른팔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를 끌어들이기만 하면 그 당의 미래는 태양처럼 찬란히 빛날 것이라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정지원은 정계에 투신하는 것을 고사했다.
자신은 기업가로 남고 싶지, 정치를 하고 싶진 않았다.
‘못할 건 없지만…….’
막상 한다면 잘할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래야 할 당위성을 느끼지 못했다.
SJ인더스트리 경영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이미 회사는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기에 별도의 어려움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정치를 한다면, 아무리 남들보다 압도적인 피지컬과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해도, 여러 모로 피곤한 일에 부딪칠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율하며 갈등을 해소한다는 것은 여간한 스트레스가 아니니까.
“어떡할까요?”
평소보다 더욱 말이 없자 비서가 더욱 눈치를 본다. 정지원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진행해. 그래도 차기 미 대통령인데 너무 빼기만 해서 좋을 게 없지.”
“네, 알겠습니다.”
오후가 금방 지나가고,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정지원은 얼마 전에 구입한 롤스로이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극소수의 부호층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방탄 차량으로, 미 대통령 방탄차에 버금가는 성능을 지닌 모델이었다.
SJ인더스트리의 네 주주 중 한 명이자, 최고경영자인 그는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유명 인사였다. 방탄차는 그에게 기본 옵션이었다.
약속 장소로 잡은 레스토랑에는 존 캐롤 의원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정지원을 보고 다소 과한 몸 동작으로 반가운 마음을 나타냈다.
“어서 오세요, 미스터 정. 반갑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님.”
“저야말로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요즘 워싱턴 정가에서는 미스터 정 얼굴 한 번 보는 게 파워볼 일등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할 정도입니다. 아, 미스터 정은 매일 한 번씩 파워볼 일등을 하고 있지 않나요?”
하루에 한 번 파워볼 일등, 그가 SJ인더스트리의 주주이자 경영진으로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을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었다.
정지원은 사교적인 미소로 대답했다.
“설마 그거 밖에 안 되겠습니까?”
“오, 역시. SJ인더스트리의 대주주는 구름 위 같은 존재로군요.”
어느덧 식사가 날아오고, 둘은 단아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듭 말했지만 민주당은 미스터 정을 강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민주당 지지자입니다. 매년 상당한 기부금도 내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미스터 정이 당에 들어와서 더욱 큰일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당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인재 결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스터 정이야말로 그 허기를 채울 수 있어요.”
이 지겨운 잔소리가 벌써 몇 번째더라?
눈은 진지한 빛을 띠고 존 캐롤을 향하고 있지만, 정신은 벌써 이탈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미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또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향후 백년이 달라질 겁니다. 강력한 경쟁자인 러시아를 견제하고 한국의 최우방 자리를 굳건히 다져야만 합니다. 그 중요한 작업을 공화당에 맡겨둘 순 없습니다. 미스터 정,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서진 박사는 미국의 명예시민입니다. 미국 내에 기반도 상당하고 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왔습니다. 뭘 그렇게 걱정하고 불안해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러시아, 그 불곰 녀석들이 지금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연합을 추진 중입니다. 말로는 평화와 경제적 협력을 도모하겠다고 하고 있지만, 한서진 박사에게 잘 보이겠다고 꼬리는 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건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거의 다 비슷비슷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다른 나라들은 차라리 괜찮습니다. 한서진 박사한테는 안하무중이니까요. 하지만 러시아만큼은 안 됩니다.”
“HAMC 때문입니까?”
러시아는 미국과 더불어 한서진이 경제적으로 진출한 유이한 국가였다.
대량의 운석을 정기적으로 채집하여 환경오염 없이 다양한 자원을 얻는 HAMC는 현재 워싱턴을 긴장케 하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다.
“우리 미국에도 놀고 있는 거대 사막은 많습니다. 오히려 러시아보다 환경적으로 인공 운석을 채집하기 더 좋을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한서진 박사는 한 번 준 것을 도로 뺏을 정도로 모진 친구가 아니라서요.”
“인공운석 사업을 우리가 뺏어오겠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러시아가 할 수 있는 건 우리도 무조건 할 수 있다, 그것은 반드시 알아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정지원은 반쯤 유체이탈 한 상태에서 잠시 생각했다.
그저 전용 활주로가 있는 개인 주택에 살고, 전용기를 끌며, 개인 크루즈선을 타고 유람하는 평범한 월급 도둑 샐러리맨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 작품 후기 ============================
아랍 가즈아...
완결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