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02 [에필로그] 세상을 내 손에 =========================================================================
전쟁은 끝났지만, 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멸망의 위기를 벗어난 사람들은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기자 진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근데 해골 기사는 대체 어디서 온 거지?”
“우주에서 온 게 아닐까?”
“혹시 한서진 박사가 비밀리에 어떤 실험을 하던 중 탄생한 실패작이 아닐까?”
외계인의 침략설부터 시작해서 한서진의 매드 사이언티스트설까지 별의별 추정이 떠돌아다녔다.
H컨설턴트와 미 정부를 상대로 엄청난 문의가 쏟아졌지만, 그들은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했다. 미국도 해골 기사가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으니.
레노지안, 그리고 지구 탄생의 비밀.
그것이 세상에 공개될 일은 없을 것이다.
해골 기사와 죽음의 군단은 많은 피해를 남겼다. 문명과 단절된 곳을 제외하고는 전부 예외 없이 직, 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은 패닉에 빠진 군중이 일으킨 소요 사태, 그리고 주가 폭락 등의 경제적 피해가 주를 이뤘다. 특히 주식 시장이 입은 혼란과 피해는 세계적인 대공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났다.
하지만 그런 피해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만큼, 진짜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일본이었다.
“이제 우리 일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모두 다 끝난 게 아니었어요?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좀 알려줘요!”
한국, 미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피신한 일본 국민들은 싸움이 끝났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환호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은 처참했다.
일본은 국토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기반시설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으며, 땅 전체를 갈아버린 듯이 황폐해진 대지만 가득했다.
아무것도 없는 땅, 말 그대로 백지가 되어버렸다.
건물은 물론이고 도로와 수도 및 전력망까지 처음부터 모조리 새로 지어야만 했다.
일본은 영토로서의 땅과 국민, 그 둘만 남은 것이다.
대다수는 전 재산을 일본에 남겨두고 피신했다. 피난 일정이 급박한 터라 부피가 나가는 재산 같은 것을 챙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은 잠시,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어버린 이들은 망연자실해졌다. 최상류층에 속하는 국민들은 해외에 재산이 분산되어 있기에 한숨 돌렸지만, 그들도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본을 재건하자! 우리는 할 수 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세계 최고의 부국을 이룬 게 바로 우리 아닌가! 두 번 못할 건 없다!”
그렇게 일본 재건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기 위해 애썼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막대한 액수의 차관을 약속했다.
한국은 복구를 위한 지원을 제공하기 전, 조건을 걸었다.
“한국을 식민 지배한 역사와 국민들을 참혹하게 수탈, 징집, 살인, 강간한 것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제대로 사죄하시오. 그러면 복구 재건을 돕겠습니다.”
그런 협상이 알려지자 극우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결사반대에 나섰다. 이에 한국 정부는 조건을 하나 더 추가했다.
“이 협상을 반대하는 저들은 영원히 일본 땅을 밟게 해선 안 됩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반대가 쏙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미 게거품을 물고 나선 이들의 명단을 작성한 뒤였다. 절대 봐줄 마음이 없다는 강경한 뜻을 드러냈다.
거래가 이뤄졌고, 일본은 사죄를 위한 준비에 나섰다.
한국이 정한 사죄 방식이 전달되자 일본 정부 인사들은 펄쩍 뛰며 놀랐다.
“이런 치욕스러운 방식을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봤자 우리 조상들이 당한 치욕에는 비교가 안 되지요.”
“…….”
“그리고 아직도 살아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후손은 말할 것도 없고요.”
미국에 피신해 있는 일본 정부를 만나러 웜홀을 타고 온 독립유공자 대표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원치 않으면 하지 마세요. 그 대신…….”
“하, 하겠습니다!”
일본은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약속한 지원 규모는 다른 나라 전부를 합친 것만큼이나 크다. 돈이 쌓이다 못해 썩어나가는 나라 아닌가.
돈뿐만이 아니다. 한국에는 한서진이 있다. 만약 그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자칫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서는 일본 재건에 대한 세계의 지원을 압박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을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국가 재건의 희망이 없다면, 국민들은 뿔뿔이 흩어질지도 모르니까.
일왕을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 우익단체 수장, 그리고 생존한 전범 혹은 그 후광을 입은 후손들이 대거 한국으로 입국했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일제의 피해를 입은 생존자, 독립유공자 및 그 후손들이 모였다.
“우리 일본이 저지른 죄악과 그것을 외면하고 덮으려고만 한 추악함을 사죄합니다!”
일본 사절단은 생존자와 독립유공자들 앞에 절을 하며 그렇게 외쳤다. 한국은 친절하게 사죄를 위해 해야 할 구체적인 행동과 대사까지 전부 준비해주었다.
사절단은 절을 할 때마다 사죄 문구를 반복했다. 그렇게 무려 108번의 절을 했다.
노령의 생존자가 울음을 터트리다 기절하는 바람에 잠시 지연되기도 했다. 사절단은 기절한 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사죄 의식을 이어 나갔다.
사절단은 그 후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뒤 위패에 또다시 절을 하며 사죄를 했다. 그 모든 광경은 생방송으로 한국과 일본 국민들에게 송출되었다.
사죄 의식의 마지막 절차는 대국민 사죄였다.
사절단은 카메라 앞에 서서 크게 절을 하며 용서를 빌었다.
“우리 일본이 저지른 죄악을 사죄합니다!”
사죄 의식을 완전히 마치는 데는 무려 7일이 걸렸다. 의식의 모든 과정은 정밀하게 짜인 연출에 따라 진행되었다.
일본의 사죄 협상의 배경에는 H컨설턴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복구 지원을 빌미로 이참에 철저히 짓밟고, 매듭을 짓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H컨설턴트의 김범석 부사장이 마무리 연설을 하는 것으로, 모든 사죄 의식은 끝이 났다.
“용서는 강자가 베푸는 아량이지, 약자가 하는 용서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나라는 마침내 일본의 정식 사과를 받아냈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나라가 힘이 있고 일본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이 있어야 사과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사과를 받았다 해서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피해자만이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여러 모로 의미심장함을 담은 김범석의 마무리 연설은 일본을 혼란과 불안함에 빠뜨렸다.
어쨌든 일본은 한국이 요구하는 대로 사과를 했다. 한국도 그에 답하듯이 본격적인 복구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지금 들어가면 위험한데요.”
자문을 구하기 위해 찾은 정부 책임자 앞에서 한서진이 그런 말을 꺼냈다. 당연히 정부는 발칵 뒤집혀졌다.
“이게 진짜인가?”
“예, 한서진 박사님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일본은 에테르가 고농도로 형성되어 있어, 인간이 오래 머무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요. 잠시 머무르는 것은 지장이 없으나 반년 이상 머무르게 되면 건강이 점점 망가진다고 합니다. 수명도 1/3 이하로 줄어들 거라고 했습니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대 수명이 1/3 이하로 줄어든다는 것은, 한 인간이 태어나 30살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뜻 아닌가.
그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국민들은 큰 비탄에 빠졌다.
자신들의 고향이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니! 돌아갈 곳을 영영 잃어버린 셈이 아닌가.
일본 총리는 케인 대통령에게 애걸복걸을 한 끝에 중재를 하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케인 대통령은 즉시 측근들을 이끌고 일본 총리를 대동한 채 평성으로 향했다.
미국 정부, 일본 정부, 한국 정부가 그렇게 평성 H팰리스에 모였다.
“지금 일본은 에테르 과부화가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 인간이 거주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죠. 비유하자면 20미터 앞에 보이지 않는 짙은 황사가 항상 끊이지 않는 지역에서 마스크 없이 살아야 하는 겁니다. 당연히 건강에 좋을 리가 없지요.”
“방법이 없습니까?”
일본 총리는 금방이라도 통곡할 기세였다. 한서진은 유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에테르가 자연적으로 흩어지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제 계산으로 50년이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될 겁니다.”
“지금 당장 흩어버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시도할 순 있겠지만, 그래도 20년은 넘게 걸릴 겁니다.”
“하지만 한서진 박사님은 이미 몇 번이나 에테르 스톰을 인위적으로 해결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케인 대통령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한서진이 일본에 노리는 바가 있어 엄살을 떠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서진이 일본에 바라는 게 뭘까? 지금 일본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땅?’
케인 대통령의 생각은 영토에 닿았다.
만약 한서진이 일본의 영토 할양을 원해서 일부러 절망적인 대답을 주는 것이라면?
“박사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일본이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도와주십시오.”
일본 총리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의 말에서 결연한 태도가 느껴졌다.
“만약 일본의 땅을 원하신다면……!”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고 에테르 과부하가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어차피 일본은 지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됩니다. 동식물은 물론이고 미생물까지 모조리 소멸했으니까요.”
“……예?”
“자연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일본보다는 사하라 사막이 차라리 더 많은 생물들이 있을 겁니다.”
망연자실한 총리의 표정은 누가 봐도 안쓰러움을 느낄 정도로 큰 절망에 잠겼다.
“유감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서는 태양에서 직접 에테르를 끌어냈고, 자신은 그 힘을 역으로 이용해 그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지금 일본을 뒤덮은 것은 본래 지구에 존재하던 안전한 에테르가 아니라, 태양에서 강제로 끌어낸 고농도 에테르였다. 안전한 수준까지 제거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굳이 제거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열치열, 태양의 힘을 이용해 일본 땅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서진은 태양을 직접 제어하는 것이 꺼려졌다.
레노지안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태양의 힘을 끌어 쓰고 싶진 않았다.
우주선 프리덤의 도움을 받는다면 안전하게 태양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태양의 힘을 자꾸 활용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태양의 힘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까?
그런 불안감을 떨칠 수 없기에, 한서진은 종말의 위기 같은 대사건이 아닌 한 태양을 건드릴 마음이 없었다.
“에테르 과부하 제거를 도와드릴 순 있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20년은 걸릴 겁니다. 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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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야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