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9 매듭을 묶은 자 =========================================================================
통찰안이 힘의 흐름을 비춘다.
아서로부터 흘러나온 강제력이 코르비우스의 영혼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군중을 다스리는 권능, 그 힘이 오로지 하나의 영혼을 지배하기 위한 결박을 펼쳤다.
코르비우스의 영혼은 그 힘에 저항하지 못했다.
왕국 최고의 대마도사라 하나, 왕가의 혈통에 전해지는 권능의 진정한 실체를 다 알지는 못한다.
그 절대적인 권능이 13억 년을 넘게 숙성되어 온 망념의 지배력과 결합한 순간, 그것은 그의 혼이 지닌 자아로 대항할 수 없는 해일이 되었다.
―폐하…….
코르비우스가 비틀거리며 이쪽을 돌아봤다. 눈동자 대신 존재하는 그의 안광을 본 순간, 한서진은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서 왕이 행한 왕명의 권능은, 그 명령에 담긴 의지에 반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기에.
―부디 생명을 밝은 미래로 인도하시기를…….
코르비우스는 끝까지 한서진 쪽을 보았다. 의식에 직접 전달되는 그 사념은 마치 유언처럼 느껴졌다.
그의 혼에서 무언가가 강제로 빨려나가는 게 보인다. 그것은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우주와 차원을 고찰하며 쌓은 막대한 지식이었다.
아서는 그 모든 지식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코르비우스는 형체가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비로소 왕명에 의한 결박이 풀리며,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한서진은 아직 자신이 신살검의 힘을 완벽히 다루지 못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좀 더 능숙했다면 왕명의 권역 하에서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서 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감정한 시선이 잠시 이쪽을 향하다가, 하늘을 바라본다. 태양을 지그시 주시한다.
그 기계적인 움직임에서 한서진은 깨달았다.
‘당신은 아서 왕이 아니야.’
현명하고 책임감이 넘치는 훌륭한 왕.
레노지안의 모든 이들이 존경하고 사모했던 제왕.
자신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백성들의 미래만을 걱정했던 군주.
저런 게 그 아서일 리가 없다.
‘아서는 13억 년 전에 이미 죽었어.’
저것은 그저 왕의 유해가 움직이는 것일 뿐.
그 고결한 혼은 이미 육신을 떠났으며, 그 몸을 움직이는 것은 왕이 미처 소화하지 못한 책임감과 미련이고, 망념일 뿐이다.
저건 왕이 아니다.
왕이 남긴 망념이 움직이는 왕의 육신일 뿐이다.
진정 그 고결한 군주가, 새로운 생명이 자리 잡은 지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려고 할 리가 없다.
왕이 죽은 그 순간에, 모든 게 영원히 고정된 채 활동하는 저것이 왕일 수가 없다.
쿠구구궁!
그때 온 사방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느꼈던 지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울림이었다. 마치 지구 그 자체가 떨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서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태양……!’
붉은 태양이 검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코르비우스의 지식을 손에 넣은 ‘망념’이 태양과 공명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태양의 지배권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건 안 돼!’
한서진은 재빨리 뛰어들었다. 온몸에서 힘을 끌어올려 만든 에너지 구체를 망념에게 퍼부었다.
그러나 투명한 막이 순식간에 생겨나 망념을 감쌌다. 그가 가한 공격은 너무나 간단히 막에 흡수되었다.
―너 같은 게 아서 왕일 리가 없다! 너는 아서 왕이 남긴 찌꺼기일 뿐이야! 찌꺼기 주제에 아서 행세를 하지 마!
망념의 시선이 흘끗 이쪽을 향했다. 덤덤한 대답이 차분하게 의식으로 전달된다.
―내가 아서가 아니라면, 그대 역시 아서일 수 없다. 그저 아서의 환생일 뿐이겠지.
아서의 환생과, 아서가 남긴 미련.
그 중 어느 쪽이 진정한 아서인지를 가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망념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 잠깐의 유희는 자신의 내면에서 울린 목소리에 지워졌다.
자신을 움직이는 것.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은밀하고 강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태양의 힘을 손에 넣어 레노지안을 재건하고, 백성들에게 다시 번영을 하사하라고.
‘코르비우스…….’
대마도사의 영혼은 사후에도 배움을 쉬지 않았다. 만물을 관찰하고, 지식을 쌓았다. 태양의 힘을 고찰하고 분석했다.
위대한 마도사가 죽은 후에도 멈추지 않고 13억 년 동안 쌓은 지식이다. 그 오랜 지혜는 그토록 원했던 태양의 힘을 손에 쥘 수 있게 해주었다.
태양에서 쏟아지는, 보이지 않는 빛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빛이 어두워지고 있다. 그 대신 암흑의 빛이 더욱 뜨겁게 지구를 달구기 시작했다.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지구 전체 기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체감하기 어려울 만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어두워졌어?”
“일식이라도 일어난 거 아니야?”
“근데 좀 덥지 않아? 지금 대체 몇 도야?”
망념과 한서진의 전투를 지켜보던 전 세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이 이상상황을 망념과 한서진의 전투와 결부해서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해골 기사가 뭔가 수작을 부린 거 아니야?”
“한신은 왜 해골 기사를 끝장내지 않는 거지?”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도시가 흔들리며, 불안함을 느낀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전 세계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울림. 그들은 지구 그 자체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고, 이 떨림이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성전 때문이라는 것도 이제 알았다.
지구상의 모든 이들은 이 순간 한 마음 한 뜻으로 강하게 기원했다. 국경, 종교, 인종, 그 모든 구분을 따지지 않고 하나같은 마음으로 그가 승리하기만을 빌었다.
삑삑삑삑삑삑삑삑삑!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평성 연구소에 있는 한서진의 본신은 경고음의 출처를 확인하고 안색이 굳었다.
지구를 뒤덮은 에테르 흐름이 미칠 듯이 폭주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모든 게 소멸할 것 같이 불안정했다.
“에테르 스톰?”
놀랍게도 지구 전체에 에테르 스톰이 발생할 조짐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에테르 스톰이 활성화되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태양이었다.
“태양이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어. 이대로는 에테르 스톰이 문제가 아니야.”
흙빛이 된 이마에 굵은 땀이 맺혔다.
잘못하다가는 태양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태양을 닫아야 해.”
한서진의 시선이 망념을 향했다. 지금 그는 두 개의 시선으로 망념을 보고 있었다. 하나는 본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살검으로 만든 분신.
‘하지만 어떻게…….’
지금 이 순간도 그의 분신은 망념을 제압하기 위해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망념은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 조차 하지 않고 버텨냈다. 마치 선풍기 바람으로 거목을 넘어뜨리려는 시도처럼 모든 게 부질없이 튕겨나갔다.
태양의 힘을 쥔 망념은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신살검에 담긴 힘을 자유로이 끌어내지 못하는 한서진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아니, 신살검을 온전히 다룰 수 있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지 모른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상 속에서 검게 물들어가는 태양을 주시했다.
망념이 그랬듯이, 자신 역시 태양의 힘을 쥐어야 한다. 태양의 힘은 오로지 같은 태양의 힘으로만 상대할 수 있을 테니.
위험한 짓이다.
태양을 탐낸 레노지안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 한서진은 이미 똑똑히 알고 있었다. 자칫 지금 지상에 쌓아올린 생태계도 유사한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패배할 뿐이다.
한서진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돌아와라.’
그는 정신을 집중해서, 망념과 싸우고 있는 분신에 명령을 내렸다. 곧 그의 눈앞에 찬란한 빛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고, 망념과 싸우던 분신은 허공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그 광경에 당연히 세상은 난리가 났다. 각국 정상과 연결된 핫라인이 벌써부터 폭주하기 시작했지만, 한서진은 그 어떤 통화도 받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세속적인 문제는 정지원에게 맡겨둬야 할 때다.
그는 두 손을 뻗어 빛의 검을 움켜쥐었다. 의식을 불어넣어 검에 담긴 힘과 공명을 시도했다.
검에 저장된 규칙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막대한 힘과 무수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는 미아가 되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타르타로스와 BII, 그리고 검의 힘이 이뤄낸 삼위일체의 하모니 속에서, 그는 태양의 존재를 탐색하고자 했다.
그때였다.
「3번째 종말 감지. 리셋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전해진 의식의 메시지에 그는 퍼뜩 놀랐다. 검의 흐름에 의식이 갇힌 채, 그는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그 메시지가 어디서 들려왔는지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카운트다운 돌입합니다.」
이상했다.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다.
어디서 들었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더라?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불현듯 그의 의식을 둔탁하게 내리치는 단어가 있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외쳤다.
―프리덤!
기억났다.
제독, 태양계를 만든 창조주.
그가 먼 우주에서부터 타고 온 우주선의 인격, 바로 그것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의 외침에 프리덤이 반응했다.
「상속권자의 신원 확인 요청을 접수했습니다. 신원 확인에 들어갑니다. 올바른 코드를 삽입해 주십시오.」
올바른 코드? 그게 뭐지?
「신원 확인을 위해 리셋 시스템을 잠시 정지합니다. 신원 확인을 위해 올바른 코드를 삽입해 주십시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넘칠 것만 같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온다.
올바른 코드를 삽입하라고? 그게 뭐지? 어디에 삽입하라는 거야?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생각하던 한서진은 머릿속을 강하게 치는 충격을 느꼈다.
‘상부맨틀! 우주선!’
까마득한 과거, 태양의 1차 폭발을 막아내기 위해 우주선은 스스로 거대한 천장으로 변해 원시지구, 레노지안을 뒤덮었다. 그것이 바로 지상과 원시지구 사이에 존재하는 격벽.
지상의 인간들이 상부맨틀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한서진의 의식이 검안에서 빠져 나왔다. 정신을 차린 그는 두 손에 쥔 빛의 검을 노려보듯 주시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아래를 향해 던지듯이 검을 힘차게 내리꽂았다.
그가 두 손을 놓자, 검은 바닥을 뚫고 끝없이 추락했다.
지하실, 암석, 지하수를 겹겹이 뚫으며, 결코 멈추지 않고 아래를 향해 하강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살검이 상부맨틀에 닿은 순간이었다.
「올바른 코드를 확인했습니다. 상속권자의 신원 확인에 들어갑니다. 유전자 분석 작업 중…….」
「확인 끝났습니다. 합당한 권리를 승계한 상속권자임을 확인했습니다.」
「새로운 제독, 프리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선명한 목소리가 의식에 직접 전해진다.
동시에 원시지구를 덮고 있는 천장이자, 태양을 통제하는 마법진이며, 제독이 타고 온 우주선의 모든 기능이 일제히 깨어나며 울리는 벅찬 고동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한서진은 순간 저도 모르게 목이 멨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이 행성의 생명 정착은 실패로 확인되었습니다.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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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처음 구상할 때 욕심을 너무 이것저것 많이 부렸나 싶기도 하네요.
그래도 떡밥 회수할 건 최대한 회수하려고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욕심 부리지 말고, 한국에서 주로 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