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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98화 (598/609)

00598  매듭을 묶은 자  =========================================================================

두 거인의 싸움은 전 세계에 생중계로 보도되고 있었다.

원래 미국은 보도 통제를 하고자 했으나, 러시아에서 먼저 영상을 공개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미국도 적극적으로 전투 영상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수십 억 인류는 초월적인 존재들의 싸움에 그저 전율했다.

그들이 서로 부딪치고, 마법을 날리고, 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대지가 갈라지고, 지하수가 분수처럼 샘솟으며, 풍랑이 몰아친다.

신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싸움이었다.

아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신화의 한 페이지나 다름없었다.

오죽했으면 부정하는 이들까지 나왔을까.

―이것은 조작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합동으로 전 세계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지금 하고 있는 기만을 당장 그만 둬라!

대다수는 그런 어리석은 부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신화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했다.

빛의 거인이 죽음의 군단과 그 군주를 물리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지구에 평화를 되찾아주기를.

전투 영상을 보는 H그룹 회장 백철중은 유독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 빛의 거인이 지금 우리 한 박사라는 말이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정부를 통해 알아봤는데 부정하지 않더군요. 정확히는 에테르를 활용해 만들어낸 분신 같은 존재에 가깝다고 합니다.”

“에테르란 정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군…….”

백철중은 영상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것은 이미 신들의 싸움이었다.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들의 격투였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전율하고, 저절로 경이감이 차오른다.

죽은 기사들의 왕이 잠시 주춤한 사이, 수많은 군마와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탄이 터져 나올 만큼 재빠르게 움직이며 군진을 형성했다.

수천의 기사들이 일제히 칼을 들어 올린다.

칼끝에 맺힌 푸르스름한 빛이 서로 엮이며, 하나된 빛의 파장으로 재탄생된다.

이 순간 그들은 군단이면서, 동시에 하나였다.

영상을 통해서도 그들이 지닌 무시무시한 위력이 살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서진이 질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몰린 전 세계 인류의 신뢰와 기대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저들을 물리쳐줄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백철중은 오히려 전투가 끝난 뒤 전개될 미래를 생각했다.

지금까지 한서진은 ‘인간 같지 않은 놀라운 과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지식과 기술을 쏟아내고, 그로 인해 전대미문의 부와 명예를 움켜쥔 인물이었다.

재해를 예보하고, 불을 완벽히 다스리며, 하늘의 눈동자 시스템으로 인간의 개별 범죄까지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인류가 목도한 것에 비하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화의 한 페이지에서 나올 법한 저 위대한 전투, 그것을 보고 난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그를 대할 것인가.

‘온 세상이 우리 사위를 경배할 것이다.’

백철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서진은 인간을 초월한, 살아 있는 신이 된다. 대중은 그가 인간의 몸을 빌려 현신한 신으로 생각할 것이다.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천의 기사들이 군마를 이끌며 군진을 갖추고, 포위망을 형성해나갔다. 정교하게 짜인 움직임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다.

통찰안에 그들이 뿜어내는 힘의 흐름이 비친다.

아서 왕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에테르가 수많은 기사들과 일일이 공명하며, 그들의 호흡을 하나로 엮고 있었다.

이미 아서 왕은 그들과 하나였고, 그들은 아서 왕과 한 몸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히 군주와 기사들이 아닌, ‘레노지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한서진의 분신이 아서 왕을 향해 의사를 전달했다.

―아서 왕, 내 말이 들려?

분명히 생각이 전달되었을 텐데, 아서 왕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빛으로 구성된 얼굴 피부는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이 건조하다.

그럼에도 한서진은 계속 말했다.

―레노지안은 오래 전에 멸망했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났어. 이 지상에는 새로운 생명들이 번성한지 오래다. 이 흐름을 거스르려고 하지 마.

아서 왕이 천천히 칼을 들어올렸다. 그 움직임에 맞춰 기사들도 일제히 움직였다. 하나 된 움직임을 관통하는 거대한 에테르의 흐름이 보였다.

―당신은 현명한 군주잖아?

한서진은 거듭 외쳤다.

이미 그와의 대화는 한 차례 실패했었지만, 최후의 수단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대화를 시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서 왕에게는 그런 마음이 닿지 않은 모양이다.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서는 천천히 움직이며 힘을 끌어올렸다.

에테르가 빠르게 회전하며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흐름이 군단 전체를 감싸며 푸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아서 왕이 검 끝을 앞으로 뻗었다.

그에 맞춰, 군단 전체가 정면을 향해 검 끝을 뻗었다.

충만한 에너지가 스스로를 불태우며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무겁게 장전된 거대한 직격이 마침내 불을 뿜듯이 군단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크윽!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힘을 끌어올려 방어막을 전개했다. 곧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부딪쳐왔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았다가는 영혼까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군단이 힘을 모아 쏘아내는 에너지 파동, 그것은 핵무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방향이 조그만 틀어진다면 그대로 지구를 반대편까지 관통해버릴 것이다.

신살검으로 만든 육신이 황금색으로 물들어갔다. 금색 화염이 온몸에 붙은 채 넘실거린다.

황금빛 몸체를 향해, 군단이 쏜 에너지 파동은 쉼 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대지가 갈라지고 지형이 뒤바뀐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지도를 새로 고쳐야 할 것이다.

―아서! 제발!

한서진은 온몸에 부딪쳐오는 충격에 저항하며, 군단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럴수록 군단이 쏘아내는 파장은 더욱 강해지고, 진해지고 있었다.

그도 물러서지 않았다. 온몸에서 쉴 새 없이 거대한 힘이 끓어올랐다.

신을 죽일 검, 그 기적이 보유한 막대한 힘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아서!

한서진은 속도를 높이며 힘차게 도약했다. 빛으로 된 검을 쥐고, 자신을 덮치는 에너지 파동을 힘차게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이쪽을 바라보는 아서 왕의 얼굴이 똑바로 보인다.

자신을 향해서 덮쳐오는 검을 보고, 아서 역시 검을 고쳐 쥐며 응수를 취했다.

빛과 파동의 격돌 속에서, 마침내 둘의 검이 맞부딪쳤다.

콰아앙!

땅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사방을 반으로 쪼갰다. 일본 열도 전체가 뒤흔들리고, 그 충격파는 한국을 넘어서 중국과 러시아까지 도달했다.

둘은 검을 서로 맞댄 채 부르르 떨었다. 조금도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거대한 경합을 이기지 못한 땅이 쩌적거리며 갈라지고, 곳곳에서 용암이 솟구쳐 흘렀다.

마치 지옥이 땅으로 솟구친 듯한 광경 속에서, 한서진은 부딪친 검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아서 왕의 의지를 느꼈다.

―아……서?

한서진은 왕과 눈이 마주쳤다. 빛으로 이뤄진 동공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지만, 검을 통해 그의 최후의 사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지 마. 당신은 현명한 군주잖아. 이미 모든 건 오래 전에 끝났어.

‘군주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왕국의 백성들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짐이여.’

왕이 웃었다.

한서진은 어떤 설득이나 회유로도 그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타협할 수 없는 군주로서의 책무, 오래 전에 죽은 몸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 질긴 각오였기에.

혼을 잃어버린 망념이란 소멸할 수 있을 뿐, 결코 변화할 수 없으니.

한서진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굳게 느꼈다.

―나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책임져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아서,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군주 된 자의 도리. 이해한다.’

―미안, 미안해…….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빛이 터져 나왔다. 마치 별이 폭발하듯 엄청난 섬광이 사방을 뒤덮으며,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끝없이 펼쳐진 폐허 위에, 한서진의 분신이 서 있었다.

통찰안에 비춰진 대지는 반경 수백km 안에 멀쩡히 존재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도, 도로도, 자동차도, 집도, 빌딩도, 대교도, 그리고 산조차도.

군단의 숨을 끊은 충격파는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켜버렸다.

수천의 군마와 기사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해버렸다.

한서진의 분신은 눈앞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초룡을 말없이 주시했다. 빛으로 만들어진 몸을 완전히 잃은 초룡은, 처음 미군이 인양했을 때의 황금빛 두개골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머리뼈만 남은 그 모습에서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죽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타르온…….’

문득 가슴이 막막해져 왔다.

오래 전 운명을 함께 한 전우이자 동반자, 그리고 지금 옆에 있는 반려의 전생. 그런 존재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으니,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아서 왕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다치긴 했지만, 그의 모습은 비교적 멀쩡했다.

최후의 순간, 타르온이 끼어들어서 직격을 대신 맞고 희생한 덕분이었다.

‘폐하,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조용히 나타난 코르비우스가 왕 앞에서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왕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경은 어찌 자꾸 짐을 막으려 하시오?’

‘지상에는 또 다른 생태계의 운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빼앗으려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난 그저 레노지안을, 다시 한 번 백성들의 운명을 부활시켜 주고 싶었을 뿐이오. 그게 잘못되었다 생각하시오?’

‘왕으로서 폐하가 지니신 신념과 책임감은 황공한 일이오나, 이 세계를 이룬 법칙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받아들여주소서.’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진 자세 그대로 하늘을 우두커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아서 왕이 대단하다 해도 최후의 직격이 남긴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지, 그 모습에서는 일말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코르비우스…… 지난 억겁의 세월 동안 그대가 우주를 관조하며 법칙과 지식에 통달했음을 알겠소.’

코르비우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아마 긍정의 뜻이리라.

왕은 다시 말했다.

‘그 힘으로 어이 하여 짐을 돕지 않고, 또 다른 짐을 돕고 있는 거요?’

순간 불길한 느낌이 한서진의 의식을 휩쓸었다.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무력하게 쓰러진 왕……. 하지만 그의 의식에서는 패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가 보였다.

‘레노지안의 지배자, 아서 카드리온 슐트제너윈 코트발 1세가 명령한다.’

그 순간 지잉 하고 정신이 울렸다. 찰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흐트러진 것처럼 보였다. 왕을 중심으로 에테르의 흐름이 폭주를 일으키고 있었다.

한서진은 재빨리 왕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몸이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는다. 육신을 구성한 에테르가 조금 전 왕이 한 말에 속박된 듯 경직돼 있었다.

‘짐의 현명한 스승이자, 인자한 장인이며,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코르비우스 경, 그대가 보유한 모든 힘과 지식을 넘겨다오.’

왕명, 왕가의 혈통에 대대로 각인된 권능.

다수의 군중을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힘으로, 한 개인의 굳은 의지까지 조율하지는 못하는 것.

그 권능은 하나의 점으로 끝없이 뭉쳐진 채, 오직 한 사람의 영혼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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