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7 죽음의 군단 =========================================================================
미군이 날린 무인기 정찰대는 빛의 거인이 해골 기사의 앞을 막아서는 광경을 생생하게 잡아냈다.
거인은 어림잡아 수십 미터가 넘어가는 키에, 온몸이 온통 빛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잘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굉장히 닮아 있었다.
“저 얼굴은 한서진 박사가 아닌가?”
“맞는 것 같습니다, 밋처 사령관님.”
“아니, 한서진 박사 얼굴이 어떻게 저기에…….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미군 사령부는 혼란에 빠졌다.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 한서진 박사 본인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아바타 같은 것일 겁니다. 어찌 되었든 살았습니다. 한서진 박사가 죽음의 군단을 물리칠 방법을 찾아낸 건지도 모릅니다.”
아마 에테르 같은 것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로봇, 혹은 아바타 같은 것이리라. 에테르는 전능한 힘이니까 무엇이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녹화해!”
“이미 해골 기사가 출현한 시점부터 줄곧 모든 것을 녹화하고 있었습니다.”
“단 한 장면도 절대 놓치지 않게끔 좀 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소리일세.”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드디어 한서진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에 사령부는 부푼 희망을 품었다.
핵병기도 통하지 않는 전대미문의 괴물이지만, 한서진이라면 다를 것이다.
한서진의 의식은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본신에 머물러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신살검으로 빚어낸 아바타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육신이 두 개가 불어난 느낌은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충만감을 주었다. 그는 평성 신 연구소 사옥에도 있었고, 일본 열도에도 있었다.
그는 아바타에 정신을 좀 더 집중했다.
아서 왕이 심연에 물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으로 이뤄진 피부가 뒤덮은 육신은 더 이상 해골 기사라고 부를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타르온도 마찬가지, 붉은 빛의 깃털로 온몸이 뒤덮인 모습은 용암에서 갓 뛰쳐나온 불의 용을 보는 듯했다.
반면 그 뒤를 따르는 기사 군단은 하나같이 해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한 쌍의 안광이 끝없이 줄을 서 있는 광경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섬뜩한 공포를 느낄 모습이었다.
아서 왕이 천천히 한 손을 들어올렸다.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가며, 검의 형상을 갖췄다.
한서진 역시 오른손을 수평으로 뻗었다. 손바닥에서 빛이 뿜어지며 검의 형상을 갖췄다.
아서 왕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한서진도 그를 마주보며 걸어갔다.
둘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발자국을 떼어놓을 때마다 대지가 무겁게 울린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힘차게 도약하며, 빛의 검을 내리그었다.
검이 서로 부딪치자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며, 광휘로 이뤄진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이것이 신살검의 힘……!’
검과 검이 서로 충돌하던 순간, 한서진은 막대한 힘의 파동을 느끼고 전율했다. 이런 거대한 힘을 두 손으로 직접 구현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서 왕이 다시 등을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어느덧 그의 손에 쥐어진 빛의 검이 줄어들고 있었다. 검 대신 다른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한서진도 그를 따라 검을 취소했다. 두 팔을 머리 위를 향해 크게 뻗은 채, 손끝에 힘을 집중했다.
이글거리는 화염 구체가 손끝에 만들어졌다. 산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위력이 느껴진다.
한서진은 화염 구체를 아서 왕을 향해 힘껏 쏘았다. 구체는 붉은 궤적을 남기며, 아서 왕을 향해 쏜살처럼 쇄도해나갔다.
아서 왕이 손바닥을 세워 앞으로 뻗었다. 푸르스름한 반투명한 빛의 벽이 그 앞에 나타났다. 한서진이 쏜 화염 구체는 빛의 벽에 부딪치며, 그대로 흡수되듯이 소멸했다.
빛의 벽이 사라졌다.
아서 왕은 안광을 빛내며 노려보다가, 왼손을 뒤로 뻗었다. 무형의 기운이 왼손에서 뻗어나가며, 대지를 크게 휘감았다.
땅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서진은 아서 왕이 뿜어낸 에너지가 거대한 산을 봉쇄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산의 아랫부분이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지면과 뚝 분리돼서 높이 떠오른 것이다.
높이 100미터가 넘어가는 커다란 산이 허공으로 천천히 상승했다. 그것은 마치 마법 같은 광경이었다.
아서 왕은 뒤로 뻗은 왼손을 힘껏 앞을 향해 휘둘렀다. 허공에 떠오른 산이 팔의 움직임에 맞춰 한서진을 향해 쇄도했다.
단순히 산을 들어올려 집어던진 공격이 아니었다. 한서진은 산을 구성한 암석과 흙에 날카롭게 맺힌 에테르를 느꼈다.
한서진은 높이 도약해서, 떨어지는 산을 피했다.
콰아아앙!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지가 진동했다. 부서진 흙과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흙과 돌이 섞인 비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단순히 암석이 부서진 잔재가 아닌, 충만한 에테르를 머금은 질량이다.
산을 던진 곳은 거대한 크레이터가 패였다. 언뜻 보기에는 운석이 충돌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아마 우주에서도 또렷하게 보였으리라.
‘좋아.’
한서진은 허공에 떠오른 채 정신을 집중했다.
대지가 그의 의지에 반응하듯 격렬하게 떨렸다. 쩌적거리며 땅에 금이 가는가 싶더니, 축구장 몇 개를 합친 듯한 면적의 땅이 도려내듯이 허공에 떠올랐다.
허공에 둥둥 떠오른 땅은 온통 푸르스름한 빛으로 휩싸여 있었다. 에테르 에너지를 머금은 거대한 땅덩어리는 그 자체로 전략병기나 마찬가지였다.
한서진은 아서 왕을 향해 주저없이 힘껏 던졌다.
아서 왕은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의 등뒤에서 타르온이 힘껏 날갯짓을 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용의 입에서 거대한 파동이 쏟아져 나오며, 에테르를 머금은 땅덩어리와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폭발적인 섬광이 사방으로 뻗쳤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강한 빛, 그리고 고막을 찢어발기는 소음이 하모니를 이루었다.
빛이 멎은 자리에는, 아까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패여 있었다. 본래 대지가 갖고 있던 형상은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폐허가 펼쳐져 있었다.
전술핵이 터진다 해도 이보다 더 위력적이지는 않으리라.
한서진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숨이 차서가 아니다. 신살검으로 빚어낸 이 육신은 호흡이나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대한 힘이 불러일으키는 짜릿함이 그의 의식을 떨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에테르의 힘.’
에테르를 과학으로만 취급했을 때에는 느껴보지 못한, 원초적인 짜릿함이 의식을 고양시킨다.
힘을 쓴다는 것, 힘을 휘두른다는 것, 그것이 이렇게나 큰 희열을 주는 행위였단 말인가.
한서진은 크게 웃었다.
거대한 힘을 마음껏 쓸 수 있고, 또 그 힘을 받아줄 수 있는 상대가 있다. 인류의 위기를 등에 짊어지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무력, 그 원초적인 권력에 그저 함몰돼 있을 뿐이었다.
한서진은 정신을 집중해서, 더욱 더 힘을 끌어올렸다. 아서 왕을 똑바로 노려보며, 자신의 온몸을 에테르로 불태웠다.
백악관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의 눈은 충혈돼 있었으며,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어떤 이는 눈썹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고, 어떤 이는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케인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과 참모들은 거대한 모니터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감탄이 나올 만큼 놀라운 집중력이다.
이따금씩 굉음이 터지며, 눈이 멀 듯한 섬광이 화면에서 쏟아져 나온다. 폭발이 한 번 터질 때마다 거대한 구멍이 파이고, 땅이 뒤집어지며,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두 거인의 치열한 전투는 눈을 뗄 수 없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산을 집어던지고, 땅을 뜯어서 휘두른다. 그들이 한 번 부딪치고 떨어질 때마다 천지가 울부짖고, 주변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말문을 잇지 못하던 케인 대통령이 겨우 입을 열었다.
“마치 신들의 싸움을 보는 듯하군…….”
“해골 기사를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줄은 몰랐습니다.”
참모들도 감탄과 경의를 금치 못했다.
잘 모르는 자신들이 보기에도 한서진을 닮은 빛의 거인이 해골 기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니, 해골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으니 해골 군주라고 불러야 할까.
미세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해골 군주는 분명 빛의 거인의 힘에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케인 대통령은 정지원이 한 말을 상기했다.
‘믿을 만한 희망이 생긴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버티십시오.’
이만하면 믿을 만한 희망 정도가 아니었다.
인류가 더 이상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확실하게 믿음직스러운 카드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 불안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신이나 다름없는 힘이다.’
이미 한서진이 에테르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여러 번 목도한 바 있다. 하늘의 눈동자를 비롯한 그의 여러 무기는, 그가 손짓 하나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에 둘 수 있는 강력한 파워였다.
물론 케인 대통령은 충실한 한서진의 지지자였다. 그는 한서진이 가진, 정의에 대한 책임감을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그가 정의로운 미국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 그가 가진 힘이 아무리 거대한들 걱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
신이라 오해받아도 마땅한 힘이다. 아니, 정녕 인간이기는 할 것인지조차 이제는 의심스럽다.
전 세계가 그 힘을 목도하고 만 것이다.
미국을 제외한 타국 시민들은 과연 그 사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다른 폭동과 혼란, 공포가 지구에 재림하지는 않을까?
타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내에서도 한서진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이들이 생겨날지 모른다.
미국 대통령인 자신조차 한서진과 해골 군주의 전투를 보며 신들의 싸움이라 느꼈다. 하물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너무 많은 이들이 목격해버렸군.”
“그렇습니다, 각하. 이 사태가 수습된다 하더라도 향후 여러 가지 진통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건지도 모릅니다.”
한서진을 놓고 벌어지는 두려움과 갈등, 그것이 스타트 라인에 서게 될 것이다.
그를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로 인정하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날, 그 두려움과 갈등은 종식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 험난한 과정에서 야기 될 무질서가 걱정일 뿐이다.
지금 신들의 전투가 보이는 위용에 취해있기보다는, 향후 세계 시민들의 두려움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이었다.
그때였다.
“각하! 저것을 보십시오!”
어떤 참모의 부르짖음에 케인 대통령은 급히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해골 군주를 다르는 수많은 군마와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