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6 죽음의 군단 =========================================================================
눈을 떴을 때, 한서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충만함에 휩싸여 있었다. 혈관 구석구석을 타고 뜨거운 열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오빠, 정신이 들어요?”
걱정스러운 송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서진은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꽤 오래 기절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벼웠다.
“괜찮아요?”
“어, 아무렇지 않아. 오히려 아주 가뿐해.”
“조심하세요. 오른손.”
“오른손?”
무슨 말인가 싶어 내려다본 한서진은 살짝 굳었다.
자신의 오른손이 한 자루의 검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빛으로 된 신살검을 마치 유체물을 쥐듯이 잡고 있었다.
“박사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송하나의 뒤에서 신효진이 어색한 안색으로 자신을 바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문득 아까 꿈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리라.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이제 괜찮나요?”
“네.”
“오빠, 저한텐 할 말 없어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그런 건 효진이 없는 곳에서 해요, 좀.”
가볍게 타박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듯하다.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온몸이 깃털처럼 가볍고, 뜨거운 충만감으로 가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손짓 한 번으로 산맥도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오빠, 근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해골 기사 쪽 상황이 많이 심각한가 봐요.”
송하나가 군사 채널과 연동된 패드컴퓨터를 내밀었다. 수만 개가 넘는 메시지 폭탄을 보고 한서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메시지를 빠르게 확인했다. 긴급 자문이나 군사적 조언을 요구하는 내용이 많았다. 앞으로 ‘인류’가 어떡하면 좋은지에 대한 비관적인 질의도 상당했다.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일본 등 다양한 국가의 정상들이 보낸 메시지들이었다.
한서진은 채널창을 켜고, 정지원에게 콜을 보냈다. 그는 2초도 걸리지 않아서 즉각 응답했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 국제 외교장은 난리가 났다. 세계 정상들이 어미 잃은 병아리마냥 애타게 너를 찾고 있어.」
“정 사장님이 임시로 제 대변인을 해주셔야겠어요. 제가 지금 바빠서 일일이 대답해줄 여유가 없거든요.”
「그런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임시가 아니라 영원히 하라 해도 환영한다.」
“감사합니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세계 정상들을 모조리 무시해야 할 정도로 바쁘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이겠지?」
“희망이요?”
한서진은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안타깝게도 음성 통화 중이라 정지원은 그 웃음을 볼 수 없었지만.
“전부 끝난 뒤에 절 두려워하지나 말라고 해주세요.”
신효진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저도 도울 수 있어요. 돕게 해주세요.”
꿈은 끝났지만, 그녀에게 흘러온 스칼린 왕비의 힘은 아직도 건재했다. 현재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단독으로 전 세계 국가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서 왕이 이끄는 죽음의 군단을 상대하기에는 더 없이 귀중한 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서진은 거부했다.
“방어도 중요합니다. 효진 씨는 한국에 머무르며 방어 위주로 대응해주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죽음의 기사가 한 명이라도 상륙하면 대참사가 일어납니다.”
비(非)에테르 문명이 보유한 화력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다. 오로지 에테르를 이용한 파워만이 저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박사님 혼자 가서 싸우시려고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아무리 신살검이 박사님에게 힘을 불어넣었다지만, 박사님은 전투 경험 자체가 없으시잖아요.”
신효진은 그 점을 염려했다.
한서진은 신살검이 가진 무한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지만, 그는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칼 한 번 휘둘러본 적 없는 사람이다.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파워에서 아서 왕을 능가할지 모르나, 전투 경험과 숙련도에서는 비교 자체가 우스울 정도로 차이가 벌어진다.
송하나도 덩달아 걱정했다.
“효진이 말이 맞아요. 오빠는 가끔 저한테 힘으로 질 때도 있잖아요.”
“어, 그게 정말이니?”
“오빠가 힘이 약한 건 아닌데 지독한 몸치라서. 그리고 난 운동도 오래 했잖아.”
“세상에, 맙소사.”
신효진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한서진의 위아래를 흘끔흘끔 살폈다. 딱 오해하기 좋은 표정에 한서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나야, 그리고 효진 씨. 둘 다 사람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오빠. 효진이 도움 받아요. 마음 같아선 저도 돕고 싶은데…… 전 전생에 초룡이었다면서 왜 그 힘이 없는 거죠?”
만약 힘이 있었다면 자신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나설 기세였다.
한서진은 못마땅한 듯이 둘을 보다가 다시 말했다.
“제가 언제 직접 칼 들고 나가서 싸운다고 했습니까?”
“그럼요?”
“전 제 특기를 살려서 싸울 겁니다.”
“특기요?”
한서진은 잠자코 한쪽에 있는 BII 설비를 가리켰다. 신효진은 무슨 말인지 당장 이해하지 못했고, 송하나는 뭔가 깨달은 듯이 탄성을 터트렸다.
“오빠, 혹시?”
“신살검의 힘을 완전히 개방하면 에테르로 구성된 가공의 육신을 현실에 구현하는 건 어렵지 않아. 바로 시작할게.”
한서진은 제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타르타로스 3에 접속했다.
코어 노릇을 하던 신살검이 빠져 나갔어도 타르타로스 3의 성능은 여전히 견줄 대상이 없는 세계 최강이다. 여기에 신살검의 힘을 얻어 충만해진 통찰안이 가세했다.
‘보인다, 보여! 전부 다 보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개방에 한서진은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시선이 스치기만 해도 미처 밝혀지지 않은 우주의 법칙이 보였고, 질서가 그려졌다. 눈이 닿는 곳마다 저절로 질문이 만들어지고, 그에 대한 답이 떠오르며, 그 과정 역시 생생하게 그려졌다.
우주의 삼라만상을 꿰뚫어보고, 올바르게 판독하게 해주는 힘. 그것이 통찰안의 진정한 위력이었고, 한서진은 지금 그것을 마음껏 활용하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작업이 끝났다. 그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기까지는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 된 거예요, 오빠?”
“응, 다 됐어. 잘 봐.”
한서진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을 가볍게 앞으로 내밀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키보드를 경쾌하게 두드리며 명령을 입력했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빛의 검이 타르타로스 3의 전자회로와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경이로운 연결을 느낀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반걸음 물러났다.
지금 한서진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는 몰랐지만, 그가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 위로 빛의 검이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서서히 그 형체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빛이 갖추어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두 여자는, 그 형상이 점점 구체화되자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바, 박사님?
“이건 오빠잖아요!”
검이 변한 것은 또 하나의 한서진이었던 것이다. 온통 황금색 빛으로 이뤄진 또 하나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원래라면 BII의 가상현실 속에 임시로 생성하는 아바타를 현실로 구현한 거야. 즉 내 맘대로 움직이는 분신 같은 거지.”
신효진은 놀랍다는 듯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걸 보내서 싸우시려는 거군요.”
“맞아요.”
한서진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마치 명령을 하듯이 입을 열었다.
“가라.”
빛으로 된 아바타는 그 명령에 끄덕이거나 수긍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신살검을 변형시켜 만든 아바타는 그의 신체 일부나 다름없다. 두뇌가 손과 발에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해서, 손발이 두뇌를 향해 ‘Yes, my lord.’라고 경례를 붙이지는 않는다.
그저 시키는 대로 즉각적인 신경적 반응을 보일 뿐.
분신은 마치 허공에 녹아들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서진 박사가 조치를 취하는 중입니다. 지금 그에게 연락을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저를 통해서 하시면 됩니다.」
화면 속의 정지원을 보며, 케인 대통령은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니까 무슨 조치를 취하는지 그것만이라도 대강 말해주면 안 되겠어요? 지금 인류가 멸망 위기에 처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곳곳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믿을 만한 희망이 생긴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버티십시오. 어차피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습니까.」
아무리 한서진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있을까?
케인 대통령은 죽음의 군단의 가공할 모습을 연거푸 확인하며 신음을 흘렸다. 핵 공격 앞에서도 아무런 피해 없이 당당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 전 세계는 혼란으로 아비규환이었다. 곳곳에서 종말과 죽음을 외치는 이들이 선동과 파괴를 일삼았다. 경제 활동은 완전히 중단된 상황이었고, 행정력이 미비한 국가는 이미 국가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나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아직 치안력이 살아 있어서 막바지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걸, 남은 건 절망뿐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경찰과 군대 역시 겁에 질린 군중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죽음의 군단은 그 수를 빠르게 불리고 있었다.
이미 일본 전체는 과부하된 에테르 에너지로 완전히 뒤덮인 지 오래였다. 땅위에 존재하는 식물들은 모조리 시들어버렸다. 생태계 전문가들은 땅속과 대기, 그리고 물에 존재하는 모든 미생물과 세균, 바이러스까지 모조리 소멸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일본은 완전한 죽음의 땅이 되었다.
기적이 일어나 죽음의 군단을 모두 물리친다 해도, 일본인들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 열도는 체르노빌 그 이상의 오명을 쓰고, 영영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불모지로 남을 것이다.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일본인들의 처우, 그리고 영토를 상실한 일본의 국가로서의 지위 등의 국제정치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는, 지금 단계에서는 배부른 사치였다.
만약 신이 내려와서 저들을 섬멸해줄 테니 일본인에게 한 개 주를 국가 영토로 양도하라고 해도, 케인 대통령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상황실 요원이 벌떡 일어나서 대통령을 돌아봤다. 급보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각하! 85번 모니터를 봐주십시오! 새로 추가 된 영상입니다! 지금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통령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85번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쪽을 향해 진격 중인 해골 기사의 앞을 무언가가 막아섰다. 처음에 조그만 황금빛이었던 그것은 점차적으로 커지더니, 이내 해골 기사에 맞먹는 거대한 빛의 거인의 모습을 갖췄다.
빛으로 이뤄진 거인의 모습을 홀린 듯이 한참 동안 바라보던 대통령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한서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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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왜 거기서 나와...?
ps : 늦어서 죄송합니다. 막바지로 향하니까 글이 넘나 안 써져서 저도 힘들었습니다. 이건 진짜 제 고질병인 모양입니다.ㅠㅠ
힘내서 완결까지 달려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