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595화 (595/609)

00595  죽음의 군단  =========================================================================

거짓된 환영이 벗겨지고 있다.

세상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덧씌운 덧칠, 그것이 껍질이 떨어져 나가듯이 벗겨지고 있었다. 생명이 지워지며 나타난 것은 그 아래 자리 잡고 있던 죽음이었다.

마치 컬러화면에서 색을 벗겨내며 흑백 화면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었다.

옷, 무기, 피부. 생명의 기운이 벗겨지며 드러난 것은 이미 멸망한 세상.

스칼린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돌처럼 굳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이 모든 것이 정지했다.

한순간에 해골로 변해버린 기사와 마법사, 용, 그리고 백성들. 그 사이에서 굳어있던 스칼린은 마침내 천천히 한서진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폐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왜, 왜 병사들이…….”

“저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어요. 당신은 레노지안 왕가의 스칼린 왕비가 아니라 신효진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신효진이라고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요…….”

스칼린은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로워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한서진은 더욱 냉정하게 몰아붙였다.

“언제까지 꿈에서 도망만 칠 겁니까?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세요.”

“아아, 아아아…….”

“과거에 함몰돼 있지 말라고요. 효진 씨는 이제 강하고, 행복한 사람이에요.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고 꿈으로 도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서진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채, 억지로 자신을 직시하게 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 또박또박 말했다.

“레노지안은 이제 없습니다. 그만 깨어나세요.”

그녀의 눈동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한서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 아니면 현실로 돌아가는 것?

한서진은 답답해서 뭐라 외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그는 불현듯 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등 뒤 너머를 향하고 있음을.

뒤를 돌아본 그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하늘이……!’

시간의 흐름이 멈춘 지금, 하늘만이 홀로 그 정적에서 벗어난 듯 갈라지고 있었다. 거대한 균열에서 눈부신 광채가 쏟아지며 대륙의 모든 것을 뒤덮는다. 빛을 뒤집어쓴 병사들의 뼈마디가 먼지처럼 조금씩 바스러지기 시작한다.

‘무너지고 있다!’

한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신효진, 그녀의 꿈이 만들어낸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붕괴할 것처럼.

어느 순간 흔들림이 멎었다. 동시에 흩날리던 파편들이 천천히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먼지로 바스러지던 살점이 다시 뼈에 달라붙고, 삭아가던 갑옷과 무기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황한 한서진은 스칼린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당겼지만, 변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폐하, 모든 것이 되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렸다. 칙칙한 안개 너머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온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는 낡고 헤진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해골 마도사였다. 생전의 모습을 잃었지만 두 눈을 대신한 광채만큼은 살아 있는 듯이 강렬하다.

“당신이 저를 불렀나요?”

―예, 오직 폐하만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당신 혼자만 리미트리스 드림에서 벗어나 있는 거죠?”

노신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쥐고 있던 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지팡이 끝의 수정구에서 푸른 빛이 뿜어지며 허공으로 번졌다.

빛은 곧 사그라졌고, 그 자리에는 한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금속의 형체를 잃고 빛의 검신만이 남은, 한서진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모습.

빛으로 된 신살검은 천천히 움직여 한서진의 눈앞에 멈췄다. 검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한서진은 노신하에게 눈을 옮겼다.

―왕비 전하는 꿈의 잔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왕비 전하가 나약해서가 아닙니다. 꿈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입니다.

13억 년을 넘게 존재해온 축복. 그 위력은 한 사람의 영혼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리라.

―과거, 리미트리스 드림은 레노지안을 보존하기 위한 축복이자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은 모든 것을 변질시키고, 타락시켰습니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이제 그 자체로 생명을 얻고 말았습니다. 환생한 왕비가 다시 끌려 들어온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한서진은 품에 안은 스칼린의 눈빛을 내려다보았다. 초점이 사라진 그녀는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빛의 검을 쥐었다. 검이 지닌 방대한 힘이 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거대한 힘의 파도, 그 흐름에 취한 채 모든 것을 맡겼다.

조금씩 멀어지는 노신하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린다.

―베어버리십시오. 모든 것을……. 꿈이 만든 세상도, 그리고 꿈이 움직이는 과거의 폐하도…… 모두 베어버리십시오.

온몸이 뜨겁다.

눈을 뜬 한서진은 두 손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검이 전하는 강대한 에너지에 몸이 터질 것만 같다. 폭발할 것만 같다.

세상의 흐름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종점을 찍은 이상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반복하고자 함이리라. 노신하의 당부가 귓가에 조용히 울린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이미 그 자체로 생명을 얻고 말았습니다.’

신효진이 꿈에 끌려 들어온 것도, 아서 왕의 유해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도, 그 모두가 이미 통제할 수 없게 된 흐름이 낳은 결과였다.

노신하는 오래 전에 그것을 알았기에 홀로 꿈에서 벗어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저주받은 지하 세계에 모든 것을 암장해두려 했던 것이리라.

힘에 취한 육신의 떨림이 심해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서진은 검이 분출하고자 하는 힘을 간신히 억누른 채,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코르비우스. 당신과 길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저 또한 오래 전에 죽은 망령. 지금 폐하와 대화하는 것은 저의 기억이 남긴 망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억 한편에조차 담아두지 마십시오.

죽음의 군단을 이끄는 아서 왕과 동일한 처지라는 뜻인가.

한서진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두 손에 쥔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검에서 솟구치는 빛이 눈을 멀게 할 듯이 강렬해졌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뒤집어지려 하는 세상이 감추고 있는 진실이, 이미 생명 그 자체가 되고 만 리미트리스 드림이 생존을 향해 키운 욕망의 크기가.

레노지안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몸부림쳤다. 그 최후의 결과가 바로 리미트리스 드림. 먼 훗날 화려한 부활을 위해 남겨놓은 한 조각 희망.

그 희망은 오랜 세월을 이겨내며 생명으로 진화했고, 그저 자신이 탄생한 의의를 이루려 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너도 가엾구나.’

한서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손을 거두지 않았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몸을 움직였다.

높이 들어 올린 검이 하늘, 땅, 세상을 향해 사선으로 천천히 모든 것을 내리긋는다. 검에서 뿜어지는 빛이 세상을 반으로 가르며 끝없이 뻗어져 나간다.

초기화를 앞두던 세상이 고통에 가득 찬 단말마를 지른다. 검이 남긴 균열, 두 조각으로 베인 꿈의 상처에서 거품처럼 부푼 환영이 쏟아져 내렸다. 그건 마치 몸이 잘리고 쏟아지는 내장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검에 담긴 절대적인 힘이 13억 년을 넘게 살아온 꿈의 세상을 죽였다. 철저히 부수어버렸다.

한서진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꿈을 이루는 힘이 흩어지며 소멸하고 있음을. 이제 꿈의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노신하의 목소리도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듯 멀어지고 있었다.

―현명한 군주가 되시길, 충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신효진은 눈을 떴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이 허전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몸 안에서 빠져나간 듯한 기분이다. 그것이 뭔지 알 수 없다는 답답함이 자꾸만 가슴을 맴돈다.

“효진아, 정신이 들어?”

걱정에 잠긴 송하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잠시 동안 신효진은 어리둥절했다.

“하나 씨?”

“이 년이 아직 정신이 덜 들었네.”

“이, 이 년이요?”

신효진은 당황했다. 아니, 송하나가 갑자기 자신에게 왜 욕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느닷없이 반말은 또 왜…….

‘아!’

그제야 잊고 있던 기억이 소급하듯 한꺼번에 그녀의 뇌리에 밀어닥쳤다.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얼마 만에 정신이 든 거야?”

“며칠 됐어.”

“……박사님은 어디 계셔?”

“눈뜨자마자 친구 남편부터 찾는 거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몹쓸 년이네.”

“……야야, 나 아직 적응 안 돼. 너무 모진 말은 하지 마.”

그제야 송하나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신효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느낌이 자꾸만 괴롭혔다.

“어디까지 알아?”

“웬만한 건 다 알지. 오빠가 말해줬어.”

“……전생에 박사님과 내가 어떤 사이였는지도?”

“어. 근데 무슨 상관이야. 이번 생은 어차피 내가 승자인데.”

“…….”

“왜, 탈것한테 지니까 억울하니?”

신효진은 풀썩 웃어버렸다. 몸을 뒤덮고 있던 긴장감이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빠져나갔다.

“박사님을 좋아했던 건 사실이야.”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알았어?”

“처음부터.”

“…….”

“그래서 내가 너 친구 삼은 건데, 몰랐니? 네가 친구 남친하고 썸을 탈 애는 아닌 것 같았거든.”

또다시 긴장감이 빠져 나간다. 금방이라도 몸이 축 늘어질 것 같은 허탈함이 대신 밀려들어왔다.

송하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생이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난 사실 별로 실감 안 나. 꿈으로 본 거랑 오빠한테 들은 게 다니까. 듣자니 너는 실제 경험처럼 생생하게 겪었다며? 그것도 매일?”

“…….”

“저번 생은 네가 이겼고, 이번 생은 내가 이겼다 치자. 다음 생은 그때 가서 생각하고.”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풀썩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을 알면서 이렇게 가볍게 정리해버리다니. 그 단단한 자신감이 부러웠다.

‘스칼린 왕비도 그랬었지…….’

어쩌면 자신이 진정으로 부러워하고 동경한 것은 바로 그런 자존감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됐어. 다음 생에도 그냥 네가 박사님 가져.”

“뭐야, 이제 우리 오빠 매력이 없어?”

“그건 아냐. 그래도 한때 왕비였던 몸이니까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양보하는 거지.”

“그게 왠지 기분 나쁘다?”

“그럼 이번 생에는 나한테 조금 양보하던가.”

“안 돼. 손가락 하나도 못 줘. 오빤 내 거야.”

“진짜 넌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신효진은 침대에 다시 털썩 누웠다. 배에 두 손을 포개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타르온과 리온을 놓고 티격태격했던 순간이 바로 조금 전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귀엽고 독점욕이 강한 초룡은 경쟁 상대이기도 했으며, 누구보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끝났구나.’

빛의 검을 쥐고 세상을 베어버리던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꿈속에 잠겨 있을 때 분명히 겪었던 일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제 레노지안의 꿈은 영영 끝났다는 것을.

간혹 ‘진짜 순수한 꿈으로서’ 겪을지는 몰라도, 다시 그 세상에 들어갈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허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시원한 감정이 가슴을 메우고 있었다.

“야, 송하나.”

“왜?”

“우리 아랍으로 이민 갈래?”

“닥쳐. 미친년아.”

============================ 작품 후기 ============================

아서 : ...얘들아, 나 좀 봐줄래? 나 아직 건재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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