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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92화 (592/609)

00592  군주의 칼  =========================================================================

“그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어린 왕자를 품에 안은 채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칼린 왕비는 점잖게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붉게 치장된,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은 소녀가 짓궂은 미소를 띠고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온.”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더구나.”

“그냥 꽃을 보고 있었어.”

소녀는 초룡 타르온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었다.

차갑고 도도한 듯하면서도 미성숙한 소녀의 매력이 공존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은 매번 보는 이들의 찬사를 자아냈다.

완성된 성숙미를 자랑하는 스칼린 왕비와는 대조되는 매력을 지니고 있어, 둘이 나란히 함께 서면 그 어떤 명화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그림이 된다.

“왕자는 건강한 것 같구나.”

“무슨 일이야?”

“내가 꼭 용무가 있어야지만 그대를 찾을 수 있는가?”

“폐하한테 서운한 거 있니?”

정곡을 찔린 듯 타르온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어깨를 잠시 으쓱하더니 맥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요즘 리온이 날 타주지 않는다. 그래서 서운하다.”

“폐하는 요즘 국정 때문에 바쁘셔. 전투 훈련에 쏟을 시간이 별로 없으실 거야.”

“하지만 그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타주던데? 난 그게 서운한 거다.”

“그, 그거랑 이거는 전혀 다른 거잖아!”

스칼린 왕비는 질겁을 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어린 왕자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그저 다행일 뿐이다.

“심심하고, 지루하다. 리온이 바쁘니 그대라도 나를 타주면 좋겠군.”

“휴, 알았어. 시녀한테 왕자를 부탁할 테니까 가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다.”

타르온은 좋아라 하며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스칼린 왕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시녀들이 공손히 왕자를 안아들었다.

스칼린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몸이 흰 빛에 휩싸이더니, 치렁치렁한 드레스 대신 날렵한 기사의 갑옷이 대신 나타났다.

“왕자를 부탁하겠다.”

“예, 왕비 전하. 편히 다녀오십시오.”

시녀들이 깍듯히 허리를 숙여 보였고, 스칼린은 잠든 왕자의 얼굴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뒤 그 자리를 떠났다.

거대한 연무장에는 이미 초룡의 모습으로 변한 타르온이 날개를 가볍게 펄럭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동작 하나만 봐도 이미 녀석이 신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칼린은 가볍게 발을 굴러 타르온의 등에 착지했다.

한 차례 포효를 내지른 타르온은 날개를 힘껏 펄럭이며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상승했다.

“타르온, 어디를 가고 싶니?”

「바다. 크로윈 고기가 먹고 싶다.」

크로윈은 대양에 서식하는, 거대한 문어를 닮은 해양 괴수였다. 용족이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 간만에 크로윈 사냥이나 하자.”

타르온은 신이 난 듯 크게 방향을 틀었다가, 지평선 너머를 향히 힘껏 비행을 시작했다.

어느덧 육지를 완전히 벗어난 둘은 푸른 바다 위를 아무런 방해 없이 빠르게 날고 있었다. 스칼린은 이마에 손을 댄 채 넓은 바다를 수색하듯이 살폈다.

“이쯤이면 크로윈의 흔적이 잡힐 때가 됐는데…….”

「아직 안 보이는가?」

“저쪽으로 가보자. 좀 더 높이 상승해줄래?”

「알겠다.」

타르온은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높이 상승했다. 스칼린이 해양 괴수의 기척을 찾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때, 문득 타르온이 물었다.

「왕비, 그런데 하늘 너머에는 뭐가 있나?」

“신계가 있지.”

「리온의 조상이 빼앗겼다는 세상?」

“응. 우리가 언젠가 되찾아야 할 곳이기도 해.”

「리온은 내가 있어야만 그 쟁탈전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맞아. 타르온, 네 초룡의 힘 없이는 최후의 성전에서 승리할 수 없으니까.”

「흠, 잘 모르겠다. 리온과 그대는 지금도 충분히 풍족해 보이는데, 굳이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저곳으로 넘어가야 하는가?」

“당연하지. 우리의 염원이니까.”

자신있게 대답하던 스칼린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염원……?’

이상하게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아련하게 울렸다.

스칼린은 눈을 들어 하늘을 주시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저 하늘은 레노지안을 가두고 있는 거대한 벽이며, 그 너머에는 카드리안 가문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신계가 존재하고 있다.

하늘벽을 뚫고 신계에 도달하여, 카드리안 가문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신을 무찔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레노지안 왕가의 오랜 숙명이다.

‘……!’

그 순간 아찔한 통증이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기이한 풍경이 단막극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단단한 돌로 지어진 직사각형의 거주지, 반듯하게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쇳덩어리 마차, 하늘을 날아다니는 철로 된 거대한 새…….

까마득하게 높은 성의 꼭대기에서, 그 복잡한 풍경을 내려다보는 한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시 저게 신인가? 하는 의문을 품는 순간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는 바로 리온이었다. 아니, 리온을 닮은 사람이었다.

“허억!”

그 순간 스칼린은 숨을 몰아쉬며 환영에서 깨어났다. 타르온이천천히 날갯짓을 하며 물었다.

「그대, 무슨 일인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스칼린은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방금 본 환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봤거든. 우리 전생.”

그 짧은 대답을 시작으로, 긴 고백이 이어졌다.

“꿈을 통해 내 전생을 봤어. 그리고 특별한 힘을 얻었지. 전생에 내가 가졌던…….”

“특별한 힘이요?”

“난 그걸 통찰안이라고 불러.”

한서진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세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길어졌지만 송하나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귀담아 들었다.

몇 번이나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필사적으로 감정을 다스리며 계속 들었다.

통찰안, 레노지안, 그리고 신효진과 스칼린…….

마지막으로 타르온까지 닿았을 때, 송하나는 긴장한 나머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꿈속…… 아니, 전생의 저는 저주에 걸린 게 아니었던 거네요.”

“맞아.”

“뭐야, 보이기만 하고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으니까 진짜 저주에 걸린 줄 알았잖아요.”

송하나는 왠지 허탈하다는 듯이 풀썩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쓸쓸한 눈빛으로 먼 곳을 주시했다. 턱을 괸 모습이 비에 맞은 병아리처럼 처연해 보였다.

“그래서 오빠가 신효진 씨하고 각별히 지냈던 거군요. 두 사람은 전생을 동시에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

“이상하게 저도 효진 씨를 볼 때마다 남같지가 않았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내 남자를 빼앗아갈지도 모르는 경쟁자, 당연히 밉거나 경계심이 들어야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효진 씨한테 그런 적개심이 들지 않았어요.”

“……알아.”

만약 정말 그랬다면 송하나는 신효진과 친구가 되는 것 대신 더 강경한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서진이 그것을 만류할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송하나는 신효진과 친구가 되는 것을 택했고, 덕분에 셋의 인연은 복잡한 관계로 얽히게 되었다.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요?”

“……미안해.”

“전 이유가 듣고 싶은 거예요.”

“네가 전생에 연결되어 있는 건 나도 오늘 알았어.”

“그건 알겠어요. 하지만 다른 것들은요? 그냥 꿈이 아니라 실제 오빠가 겪은 전생이고 진실인데, 저한테는 말해주면 안 됐나요?”

“……네가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원치 않았어. 내가 효진 씨랑 전생에 그런 관계였다 해도,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둘 생각도 없었고. 사실 난 기억도 못하는 전생일 뿐이야. 그저 꿈에서 여러 번 봤을 뿐이지.”

“오빠 참 나쁘다.”

“……?”

“전 지금 효진 씨한테 제가 밀렸다는 것 때문에 서운한 거라구요. 그래서 투정부리는 거라구요. 그런데 꼭 그렇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야겠어요?”

촉촉하게 젖은 듯한 눈빛이 가만히 바라보자 한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두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토닥였다.

“미안해.”

“치, 맨날 나만 엎드려 절받기야.”

그녀는 괜히 작게 투덜거리다가, 대형 화면 속의 화룡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지금 저게 전생의 저란 말이죠?”

“아마도.”

“그리고 저 해골 기사가…….”

“전생의 나야.”

“우리 둘 다 전생에 꽤나 멋있는 포지션이었네요. 그래서 현생도 멋있는 포지션으로 사는 걸까요?”

한서진은 조금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큰 충격이나 좌절에 빠지지 않는 점이 대견했다.

“좋아요, 오빠……. 그럼 전생의 오빠와 제가 지금 원하는 게 뭔가요? 왜 저러고 있는 거예요?”

“레노지안의 부활이지.”

“하지만 이미 멸망한 나라를 어떻게 부활시켜요?”

“그건 나도 몰라. 일단 지금 알 수 있는 건 저 검을 지켜야 한다는 거지.”

한서진은 봉인 마법진에 갇힌 채 둥둥 떠 있는 신살검을 가리켰다.

“전생의 나, 아서 왕은 저 검을 되찾으려고 해. 하지만 지금은 검의 기척을 잃어버려서 진격을 멈춘 상태지.”

“그럼 만약 저 검을 뺏기면…….”

“아서 왕이 승리하는 거지. 그게 어떤 결과가 될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인류에게는 절대 좋지 않을 거야.”

“제 생각에도 그래요.”

송하나는 덤덤히 화면을 응시하다가 다시 그에게 눈을 돌렸다.

“그럼 효진 씨가 깨어나는 게 일단 관건인가요?”

“아마도? 효진 씨는 전생의 힘을 되찾았거든. 어쩌면 지금의 아서 왕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지도 몰라.”

“효진 씨는 언제 일어나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혹시 제가 도움이 될 순 없나요? 저도 그래도 전생의 꿈을 꾸고 있는데, 시도해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요? 오빠도 꿈에 몇 번 인위적으로 들어갔었다면서요.”

한서진은 가만히 생각했다.

송하나의 꿈을 통해 리미트리스 드림에 잠긴 신효진에게 접촉을 시도한다?

‘아주 근거 없는 시도는 아닐 수도 있겠다.’

어차피 지금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다.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

왕은 눈을 부릅떴다.

분명히 보았다. 그래서 움켜쥐었다.

손안에 닿는 느낌이 선명했거늘,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왕은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주변의 풍경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감각이 또렷해진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타르온에게 중심을 기댔다.

넓은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해수면에 비치는 황금색 광택은, 자신이 알던 레노지안의 바다가 아니었다.

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눈부신 태양이 밝은 햇살을 끊임없이 떨어뜨린다.

왕은 타르온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붉게 빛나는 깃털이 녀석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타르온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헤진 망토를 두르고 왕관을 머리게 쓴, 앙상한 뼈만 남은 기괴한 모습.

그러나 왕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짚는다.

다음 순간 눈부신 빛이 왕의 전신을 감싸는가 싶더니, 황금색 피부가 살아 있을 때처럼 왕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것은 빛의 에너지로 이뤄진 육신, 그러나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에는 그 대신 어둡고 푸르게 빛나는 두 개의 광채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2일에 돌아온다 해놓고 양치기 소년짓을 해버렸습니다.ㅠㅠ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여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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