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590화 (590/609)

00590  군주의 칼  =========================================================================

“으앗!”

한서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강제로 접속을 끊었다. 다음 순간 그는 곤겐산이 아닌 연구실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온몸에 오싹한 기운이 흘렀다.

왠지 추운 느낌에, 그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접속했던 공간은 지구의 데이터를 에테르로 수집하여 타르타로스로 구현한 가상의 공간이다. 즉 철저히 자신의 지배하에 놓인 가공된 세상이다.

그런데 아서 왕은 팔을 뻗어 자신의 의식체에 직접적으로 간섭해왔다. 아직도 그의 손에 잡힌 팔목의 서늘한 감촉이 남아 있는 듯했다.

“……잠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팔을 내려다본 한서진은 더욱 오싹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사람의 손뼈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낙인처럼 하얗게 눌러 붙은 그 흔적은, 어찌 보면 동상을 입은 것처럼도 보였다.

“이럴 수가…….”

한서진은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저 몸이 떨렸다.

자신을 선명하게 주시하던 왕의 눈빛이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레노지안의 백성들을 버리지 마라.

그 음성에 담긴 무게감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축축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한서진은 미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군사 정보 라인을 확인했다. 해골 기사를 비롯하여 양국의 대응 사태 등 모든 군사 정보가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채널이었다.

채널에 기록된 정보에서 한서진은 분명히 확인했다.

조금 전 해골 기사, 즉 아서 왕이 허공으로 팔을 뻗은 장면을.

‘…….’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양국은 이미 발칵 뒤집어진 채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케인 대통령은 이미 반쯤 핵 발사 버튼을 누른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라고 했다.

양국 대통령으로부터 교신 요청이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야기가 통하던가요?」

한서진이 대화를 시도해본다는 정보는 이미 양국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케인 대통령의 다급한 질문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통령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일단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 해골 기사는 바로 아주 오래 전 지구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왕입니다.”

「지구에서 살았던 인간들이라고요?」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지구에서 기원한 종족입니다.”

태양계의 탄생 비화, 그리고 제독의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고, 저들에게는 큰 충격이다.

「아주 오래 전이라면, 어느 정도나……?」

“적어도 13억 년 전입니다.”

두 대통령은 순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13억 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번성한 문명입니다. 저들이 멸망한 게 13억 년 전이라는 거지요. 그 문명의 흔적은 지금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는 지구 아래 가라앉아 있습니다.”

「맙소사.」

한서진은 차분히 설명했다.

레노지안이 정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와 상부 멘틀 등의 존재는 밝히지 않고, 그들이 에테르를 기반으로 발전한 문명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렇게 대단한 문명이 왜 멸망한 겁니까?」

키틴 대통령이 문득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한서진은 잠시 쓴웃음을 짓다가 대답했다.

“우리도 우발적 핵전쟁이 벌어지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

대번에 이해했는지, 두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지나치게 발달한 문명이 그 넘치는 힘이 잘못 흐르게 될 경우 스스로를 붕괴시킬 수 있음을 상기한 것이다.

「그럼 저 해골 기사의 목적이 뭡니까?」

“글쎄요…….”

신살검을 되찾고, 레노지안을 지상에 재건하는 것.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이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해골 기사…… 아니, 해골 군주는 자신의 안에 백성들의 영혼을 품고 있습니다.”

「영혼, 이라고요?」

케인 대통령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갑자기 여기서 영혼이라니.

「저들 문명은 영혼의 존재를 믿는단 말입니까?」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환생시켜 이 땅에 다시 그들의 왕국을 세우려는 모양입니다.”

「그, 그런 게 가능합니까?」

「백 번 양보해서 영혼이 존재한다 치더라도, 그들을 어떻게 환생시킨단 말인가요?」

“그건 저도…….”

말을 이으려다 말고 한서진은 멈칫 했다. 모니터 한쪽 구석에서 요란한 경고 신호가 번쩍이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곤겐산을 중심으로 넓혀가던 에테르 파동이 더욱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 반경은 어느덧 센다이까지 도달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곤겐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무인 차량이 포위하듯이 감싸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 차량들에 영향이 없을까?

그 이야기를 들은 두 대통령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한 박사,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핵을 써야겠어요.」

“그렇게 하십시오.”

「표적 중심부에 전자파 방해 영향이 있습니다. 무선 통신 중인 무인 차량들이 모두 연락이 끊겼어요.」

“에테르 폭탄을 쓰십시오.”

「알겠습니다.」

군사 채널에 새로운 정보가 올라왔다. 에테르 폭탄이 내장된 미사일이 곧바로 발사된 것이다.

한서진은 미사일이 곤겐산을 향하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이윽고 목표 지역 상공에 도달한 미사일은 장엄하게 폭발하며, 그 힘을 주변에 퍼트렸다.

‘에테르 농도가 낮아지고 있다!’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상 채널 속의 두 대통령들도 얼굴이 다소나마 밝아졌다. 이 정보는 지금 그들에게도 실시간 공유되고 있었다.

동시에 무인 차량이 탑재 중이던 핵이 일제히 터졌다. 순식간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높이 피어올랐고, 한서진은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바로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높이 솟구치는 듯하던 버섯구름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지상으로 급속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진짜로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강력한 존재가 핵폭발 에너지를 미칠 듯이 흡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거리 카메라가 보내오는 그 영상에서 한서진은 조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이 영상을 보는 이들은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돼.」

곤혹으로 가득한 두 대통령의 중얼거림이, 양국의 참담한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마침내 폭발 에너지가 모두 사그라졌다.

곤겐산을 중심으로 반경 5km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패여 있었을 뿐, 그 밖은 아무런 피해 없이 멀쩡했다. 미지의 힘은 핵폭발 에너지를 완벽하게 흡수한 것이다.

먼지와 섬광이 가라앉으며, 미지의 힘의 정체가 드러났다.

―캬아아아!

거대한 괴조, 아니 초룡이 머리를 한껏 높이 치켜들고 거칠게 울부짖었다.

오리할콘으로 된 두개골, 그리고 빛으로 이뤄진 온몸의 뼈.

그 기괴한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황금빛 섬광으로 온몸이 뒤덮인 녀석은, 마치 온몸이 빛과 불꽃으로 이뤄진 화룡을 보는 듯했다.

「설마 핵폭발 에너지를 흡수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구성한 건가?」

“유기물 신체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극도로 응축된 에너지 신체라 보는 게 옳습니다.”

「이런 게 가능합니까, 한서진 박사?」

“……에테르 문명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두 대통령은 정보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에 일단 감사했다. 만약 이 장면이 전 세계에 여과 없이 보도되었다면,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서진은 급히 인터넷 여론을 체크했다. 핵폭발은 벌써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순간이긴 했지만 버섯구름이 높이 피어올랐으니, 그 사실까지 감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핵 터트렸다!

―일본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핵 터진 곳이 하필 내륙이라 그 피해가 장난 아닐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해? 리치킹을 물리쳤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게 중요하지!

―핵까지 터트렸는데 설마 견뎌냈겠어?

―근데 이 영상, 뭔가 이상해. 핵이 터졌는데 후폭풍이나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아.

―누구 지금 이와테현 근처 촬영한 사진 있는 사람?

지금 국제 여론은 일본을 향해 눈과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시차 따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일본과 미국은 일본 입국을 철저히 통제했지만, 자기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는 기자들의 취재 정신까지 막을 순 없었다. 이미 피난 작전 전에 일본에 들어와 있던 그들은 핵폭발의 그 순간과 이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데 성공했다.

황금색 불꽃으로 이뤄진 화룡의 모습이 결국 민간에 보고되고 말았다. 두 대통령이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아무 의미 없게 되고 만 것이다.

―맙소사……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이거 그 해골 괴조 아니야? 설마 핵폭발 에너지를 흡수해서 저리 된 것은 아니겠지?

―생명체가 저런 게 가능해? 제발 아니라고 해줘!

전 세계 시민들이 일제히 신음했다.

특히 일본 국민들의 충격이 컸다. 핵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괴물들이라니!

한서진은 창백해진 채 신살검을 주시했다.

봉인 마법진에 갇힌 신살검은 지금 이 순간에도 격렬한 떨림을 퍼트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자신의 주인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마력 칩셋으로 펼친 봉인 마법진이 아니었으면 이미 아서 왕이 이곳으로 달려와 검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효진 씨라도 제발 정신을 차리면 좋은데.’

그는 이 순간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신효진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 잘못은 아니지만, 이 중요한 순간에 없다는 것이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때 벨이 울렸다.

그는 디스플레이 화면으로 방문자를 확인했다. 방문자는 다름 아닌 송하나였다.

“하나야, 무슨 일이야?”

“오빠. 저거 정말 괜찮은 거예요?”

그녀도 공개된 영상과 사진을 본 모양이었다. 한서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내가 잘 막아낼 거야.”

“하지만 핵도 소용이 없다면서요? 우리 멀리 피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는 일본과 가깝잖아요.”

“그게 좋겠네. 웜홀 타고 캘리포니아로 먼저 가 있을래? 가족들 모두 데리고.”

“오빠는요?”

“난 여기서 대책을 세워야지. 연구소가 웜홀을 넘어갈 수는 없잖아.”

“그럼 저도 여기 있을래요.”

“하나야. 그건…….”

“어차피 웜홀 타면 언제든지 넘어갈 수 있잖아요. 정말 위급해질 때까지는 여기 있을래요.”

한서진은 결국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녀의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다.

“근데 오빠, 이상한 게 있어요.”

“뭔데?”

“그 괴물의 모습…… 왠지 눈에 익어요.”

한참을 주저하던 송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표정에는 이걸 말해도 되나 하는 망설임이 짙게 묻어났다.

“어떤 괴물? 해골 기사?”

“아뇨, 해골 기사가 타고 있는 용 말이에요.”

“…….”

“처음에는 눈에 익다고 생각을 안 했어요. 하지만 아까 불꽃으로 온몸이 뒤덮인 모습…… 그게 왠지 눈에 익어요. 분명히 제가 봤던 기억이 나요.”

한서진은 차갑게 가라앉는 가슴을 억지로 외면한 채, 물었다.

“어디서?”

“꿈에서요.”

그녀는 잠시 망설인 뒤 조그맣게 덧붙였다.

“오래 됐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