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9 군주의 칼 =========================================================================
노신하의 유해는 천천히 움직였다.
모든 것이 멈춘 정적 속에서 그만이 홀로 움직이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한서진의 의식은 미동도 없이, 마치 정신을 빼앗긴 것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신하의 유해는 꿈의 밖에서 홀로 활동했다. 이따금씩 왕과 왕비의 주위를 돌거나, 혹은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의 움직임보다는, 사후의 반사 작용처럼 보였다.
노신하는 왕과 왕비의 곁을 일정 이상 떠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을 지켜보는 게 최후의 사명이기라도 한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났다.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가 산이 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한서진에게 그 세월의 흐름은 마치 한순간의 찰나처럼 짧게 느껴졌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노신하의 움직임을 살피던 한서진은 문득 그 의미를 깨달았다. 동시에 전기처럼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탐구하고 있다.’
노신하는 그저 무의미한 사후 반사 작용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던 때처럼, 안간힘을 다해 힘을 탐구하고 있었다. 마법을 갈고 닦으며, 지식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한서진은 통찰안을 개방했다. 노신하의 주변을 감싼 마력의 흐름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미약한 마력이지만, 노신하는 착실하게 그 힘의 크기를 불려 나갔다.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느리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은 채.
그 진득한 노력은 눈물겨웠으며, 또한 숭고했다.
한서진은 노신하의 마력과 집념이 추구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짚어냈다.
‘상부 멘틀?’
오래 전 레노지안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태양의 폭주를 막아낸 하늘 천장.
제독이 타고 온 우주선이 변형돼서 만들어진 그 천장을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서진의 시선이 천장 밖을 향했다.
천장 밖에서는 폭주하는 에테르 에너지가 사방에서 작열하고 있었다. 천장은 태양에서 쏟아지는 그 막대한 힘으로부터 레노지안을 보호하고 있었다.
상부 멘틀은 그 자체로 태양을 통제하는 거대한 마법진이나 마찬가지였다. 레노지안의 공격으로 마법진이 뚫렸고, 그 바람에 태양이 또다시 폭주하고 있었지만, 마법진은 스스로를 수복하여 태양의 힘을 다시금 제어하고 있었다.
노신하의 동공 없는 눈빛이 그 광경을 차분히 응시한다.
한서진은 볼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상부 멘틀을 넘어 태양까지 향하고 있음을.
죽은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쌓아올린 지혜는 태양과 상부 멘틀을 본질을 꿰뚫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뭐 때문에 레노지안이 멸망으로 치달았는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다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안타까워,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바로 진실을 꿰뚫어볼 절대적인 눈이다. 진리의 근원을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 힘이 있었다.
한서진은 정신을 끌어올렸다. 자신의 감각을 그에게 나누어준다는 느낌으로,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그의 시야가 자신의 시야 위에 겹쳐지는 게 느껴진다.
이 순간, 그 역시 동일한 감각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통찰안의 권능이 자신의 시야에 덧칠되는 것을.
노신하와 한서진의 시야가 하나로 겹쳐지며, 세상이 감추고 있는 진리를 꿰뚫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지식으로 변해, 뇌리로 직접 파고들어오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한서진은 세상을 보는 시야가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 황홀감은 모든 신경을 녹여버릴 만큼 강렬했고, 뜨거웠다.
진리를 이해하는 노신하의 통찰력.
그리고 진실을 꿰뚫어보는 통찰안의 권능.
시야의 동조를 통해 그 둘이 하나로 합쳐진 이 순간, 한서진의 영혼은 거대한 지식의 폭격에 휩쓸리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진리의 폭풍에, 그저 모든 의식을 빼앗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신비로운 경험 안에서 한서진은 문득 생각했다.
지금 노신하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하고.
그라면 통찰안의 시야를 통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탐구할 수 있으리라.
그가 보는 진리는 과연 어떤 것일까?
「아, 아…… 아아아…….」
별안간 흐느낌 같은 괴성이 새어나왔다.
노신하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노지안을 가둔 감옥,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태양의 무한한 힘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노신하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가 사라진 두개골 속의 암명이 똑바로 바라본다. 마치 한서진이 보이기라도 하듯이.
「폐하.」
노신하가 입을 열었다.
뼈를 억지로 물려서 쥐어짜낸 듯한 탁성, 그러나 한서진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놀라지도 않았다.
「이것을 저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먼 미래에서 이곳까지 찾아오셨군요.」
13억 년.
그 까마득한 시간을 넘어서, 군주와 충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노신하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한서진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소리쳐 묻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느냐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노신하의 시선 아래에서 그저 떨림을 억누르기만 할 뿐이다.
「하늘은 레노지안을 가두기 위한 감옥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마법진…….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을 전혀 몰랐었군요.」
아마 그에게 눈동자가 있었다면, 지금 무거운 회한이 서려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한 모든 짓은 그 마법진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 멸망을 앞당기고 만 것이었군요.」
한서진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노신하는 ‘자신’과 대화하고 있음을. 그러나 ‘그가 보는 자신’이 그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듣지 못해도 알 것 같았다. 그가 어떤 각오를 그 안에 새기게 되었는지를…….
「이제라도 신이 멈추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운명이라면…….」
그의 의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인지하고, 결심한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처럼 뇌리에 자리를 잡는다.
한서진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 빛을 보았다. 미래를 느꼈다.
노신하가 통찰안을 통해 본 레노지안의 운명이 눈앞에 사실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레노지안 문명이 지상에 자리를 잡는다. 지구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한다. 에테르 문명과 마법의 힘이 다시금 널리 퍼진다.
상부 멘틀. 태양을 통제하는 거대 마법진이자, 레노지안의 천장이며, 지상의 주춧돌인 그 거대한 힘이 폭주한다.
레노지안이 일군 에테르 문명을 위협으로 판단하여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그것이 마법진에 입력된 최후의 명령.
태양마저 폭발하며, 태양계의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
그때 한서진의 눈앞에 별안간 어떤 이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도 익히 아는 얼굴, 바로 제독이었다.
오래 전 태양계를 만든 창조주이자, 레노지안의 초대 군주였으며, 지금은 태양계에서 사라져 버린 존재.
―문명의 씨앗을 뿌릴 뿐, 통제하지 않는다. 지성체는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가 레노지안의 멸망을 방관했고, 먼 우주로 떠나버린 이유.
한서진은 그의 환영이 자신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 건지 깨달았다.
레노지안이 그러했듯이, 인류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통찰안을 통해 노신하가 내다본 미래였다.
‘이곳은 레노지안이 아닙니다, 폐하.’
왕은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의 절망을 받아내기만 할 뿐.
자신을 따르던 백성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지금 자신의 옆에 남은 것은 죽은 타르온의 유해와, 충신이 시공을 초월해 전달한 망념뿐이었다.
철저한 혼자였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폐하.’
“…….”
‘이곳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레노지안, 그 안식처뿐입니다.’
왕은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게 어딜 봐서 안식처란 말인가.
영원히 잊혀진 무덤일 뿐이다. 그 무덤에서 백성들의 혼을 품고, 축복의 기운이 쇠하기만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명의 순환에서 벗어나, 고독한 정지를 향해서 모든 것을 닫아버려야 한다고?
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왕비와의 약속에 어긋난다.
백성들에게 한 약속에 어긋난다.
군주의 책무에 어긋난다.
왕은 눈을 감았다.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눈동자를.
그리고 의식을 집중했다.
지금 이 죽은 몸에 남은 것은 망념의 잔재, 그것이 스스로를 아서 왕이라 여기고 유해를 움직이는 것이다.
찾아야 한다. 생명의 순환으로 돌아간 자신의 영혼을.
그래서 불렀다.
‘……이여.’
‘또 다른 짐이여.’
‘대답해다오.’
‘제발 대답해다오…….’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척을 향해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은 차원, 같은 우주에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죽은 몸에 남은 군주의 망념, 그것은 쉬지 않고 애타게 자신의 혼을 불렀다.
‘왕으로서 마지막 책무를 수행하라…….’
‘제발 대답해다오…….’
‘또 다른 짐이여…….’
느껴진다. 아주 익숙한 기운이.
그것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를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눈부신 빛이 바로 앞에서 일렁이는 것 같다. 흐릿한 형상이 만져질 듯이 가깝게 느껴진다.
왕은 팔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안개처럼 흐릿하던 주변의 형상이 거짓말처럼 걷히며, 선명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모든 환영이 사그라졌다.
한서진은 어느 순간 가상공간 속의 곤겐산에 돌아와 있었다. 아서 왕과 타르온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는 시간을 살폈다. 고대의 기억에 빨려 들어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한서진은 미동도 않는 아서 왕을 가만히 살폈다.
왕관을 쓰고, 헤진 망토를 두른 해골 군주의 모습. 그것은 어쩐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한서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미동도 않던 아서 왕이 앙상한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움켜쥐려고 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 팔목이 잡혔다. 그의 의지가 가상의 공간에 간섭한 것이다.
‘뭐야?’
한서진은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본래 눈동자가 있어야 할 두개골 속에 푸른빛이 눈동자처럼 빛나고 있었다.
백골이 낸 것이라기에 믿어지지 않는 선명한 음성이 또렷이 울렸다.
“레노지안의 백성들을 버리지 마라. 아서 카드리온 슐트제너윈 코트발 1세여.”
============================ 작품 후기 ============================
끝이 멀지 않았습니다.
긴 여정을 함께 해주신 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