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588화 (588/609)

00588  군주의 칼  =========================================================================

‘폐하, 이곳은 레노지안이 아닙니다. 우리의 왕국이 아닙니다.’

왕은 타르온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 안에 비친 노신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낡고 헤진 로브를 입은 그는 뼈밖에 남지 않았다. 저것은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왕의 눈이 자신의 두 손을 향했다.

피투성이가 된 갑옷, 그 사이로 빠져나온 굳은 손가락.

오랜 전투의 흔적이 여실히 묻어있는 모습이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불현듯 그 모습이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림을 덮은 낡은 덧칠이 벗겨지듯이 떨어져 나가며, 그 아래 감춰진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피투성이 갑주는 어느새 사라지고, 새하얗게 빛나는 뼈마디만이 남아 있었다.

왕의 눈이 다시 타르온의 눈동자로 향했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노신하와 마찬가지로 뼈만 남은 사자(死者)의 것이었다.

그제야 왕의 눈이 타르온의 온몸을 향했다. 낡은 덧칠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벗겨지고 있었다. 두터운 비늘은 온데간데없고, 뼈만 남은 머리와 빛으로 구성된 육신만이 존재한다.

왕은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믿음으로 자신의 뒤를 따라온 수많은 신하와 백성들, 그들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많은 이들이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왕은 뼈마디만 남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딱딱한 성대를 억지로 비틀고 나온 마찰음이 울렸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 소…….」

‘모든 것은 십 수억 년 전에 끝났습니다. 레노지안은 이미 그 운명이 다했으며, 이곳에서는 새로운 생명의 운명이 시작된 지 오래입니다.’

노신하는 하늘 위에 높이 떠 있는 태양을 가리켰다.

‘저것이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던 신좌, 태양입니다.’

눈동자가 사라진 왕의 눈빛이 흐릿하게 태양을 향했다.

「태양…… 신좌…….」

‘기억해 내십시오, 폐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폐하가 어떤 결심을 하셨는지.’

아서 왕은 리미트리스 드림에서 수차례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잠들 때마다 다음에는 자신이 깨어나지 않기를, 꿈을 현실로 오롯하게 받아들이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그의 정신은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망가져갔다. 오염되고 있었다.

이번에 깨어난 그는 지상을 레노지안으로 착각했으며, 성전에 패배하여 멸망한 왕국을 기억하지 못했다.

꿈과 현실, 허구와 기억, 그것이 서로 뒤섞이며 알아볼 수 없는 형체로 변질된 것이다.

「나는…… 아서…… 멸망한 왕국의 군주…….」

‘그러나 폐하의 백성들은 폐하의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폐하의 고결한 희생 덕분입니다.’

「희생…… 나의 희생…….」

왕은 흐릿하게 중얼거렸다.

멸망의 순간이 희미하게나마 기억난다. 그리고 자신과 왕비, 노신하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도.

―리미트리스 드림은 영웅이 죽은 후에도 영원히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고결한 축복입니다.

―폐하, 저를 희생하세요. 제가 축복을 여는 제물이 되겠어요.

―모든 백성들의 혼을 짐의 꿈에 담겠소. 비록 육신은 사그라지더라도, 그들이 짐의 꿈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기를…….

기억난다.

왕비가 희생하고, 자신이 그릇이 되었으며, 그리고 백성들의 혼을 이 안에 담았다. 그들에게 끝나지 않는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해주었다.

중간 중간 꿈속에서 위화감을 느낀 자신이 깨어날 때마다 노신하는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면 자신은 다시 잠이 들었고, 꿈은 문제없이 계속 이어졌다.

―잊지 말아요, 폐하. 당신이 꿈을 꾸는 이유를…….

그때 희미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왕비의 목소리다. 그러나 들어본 적 없는 속삭임이다.

무엇을 잊지 말라는 걸까?

―리미트리스 드림을 여는 것은 도피가 아니에요. 현재의 시간을 묶어두는 게 아니라, 후대에 미래를 전하는 것. 다시 한 번 레노지안의 번영을 씨 뿌리기 위한 오랜 인내…… 그것이 우리가 희생하는 이유…….

‘부활의 그날까지, 백성들의 혼을 온전히 보호하겠소.’

―새로운 미래가 싹트는 그곳에서 먼저 기다릴게요.

생각나고 말았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약속이.

아서 왕은 혼란스러웠다.

그 중요한 약속을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

그렇게 무수히 꿈에서 깨어나고 잠들기를 반복했으면서, 왜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때 저를 찾아주세요, 폐하.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왕은 깨달았다.

완벽한 꿈에서 자꾸만 깨어났던 이유는, 왕비가 없다는 위화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꿈을 시작하기 전 왕비와 맺은 굳건한 언약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 약속을 잊어버렸던 것일까.

왕의 눈빛이 노신하를 향했다. 그는 왕의 심경을 알아차린 듯 쓰게 웃고 있었다.

「코르비우스, 경이 막았구려. 짐과 왕비의 약속을…….」

‘두 분의 약속, 그것은 레노지안의 진정한 소멸을 앞당길 뿐입니다.’

「우리는 군주로서 레노지안을 부활시킬 책무가 있소.」

‘그 책무의 이행은 소멸의 결과만을 낳습니다.’

노신하가 모든 것을 막고, 통제하고, 차단했다. 왕은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꿈의 주민이되, 꿈에 속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며 생각했고, 진실을 인식했다. 그것은 꿈을 현실로 착각하며 살아온 왕보다 더욱 힘든 시간이었다.

노신하는 뼈마디만 남은 손가락을 높이 들어, 하늘 위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광원을 가리켰다.

‘신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한서진은 에테르 폭탄을 주한미군에 제공했다. 주한미군은 전사한 장병의 유해를 취급하듯이 소중하게 챙겼다.

“부디 이게 사용되는 일이 없기를 빌 뿐입니다.”

주한미군에게 에테르 폭탄을 건네는 자리에서 한서진이 한 말이었다. 그 자리를 함께 하던 존 캐롤 의원이 쓰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핵보다 더한 의미를 지닌 무기로군요. 무슨 마음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에테르 폭탄을 건네고, 한서진은 그 자리를 떴다. 그는 곧바로 연구소로 향했다.

이미 세팅을 마친 BII 장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살검 대신 오리할콘 코어를 장착한 타르타로스 3와 연동되어 작동하는 장비였다.

과연 이전의 성능에 비해서 얼마만큼의 성능을 낼 수 있을지, 초조한 마음이 자꾸만 생긴다.

‘해보자.’

그는 BII에 접속했다. 현실의 모든 감각이 순식간에 꺼지고, 다음 순간 그는 가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에 와 있었다.

지구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현한 세상, 이전 데이터를 저장해두고 있었기에 손쉽게 복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어가 바뀐 까닭에 즉각적인 업데이트는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지구 환경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지 못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BII에 접속한 목적은 국소적인 것이니.

의식을 통해 명령을 내리자 순식간에 환경이 바뀌었다.

그의 의식체는 어느덧 일본, 곤겐산에 도착해 있었다. 현재 곤겐산의 환경,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복원한 가상공간이다.

당연히 타르온과 아서 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한서진의 의식체는 신장 수십 미터가 넘는 거인이었다. 아서 왕의 체격에 자신의 체격을 맞춘 것이다. 이곳은 타르타로스 3가 현실의 환경을 복사해서 재현한 가상공간, 무엇이든 가능한 곳이니까.

아서 왕은 한서진의 의식체가 코앞에 있음에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금의 미동조차 없는 모습은 마치 생명 활동이 완전히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반경 150km 내에는 사람의 기척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곤겐산을 에워싼 핵탄두 탑재 차량들은 전부 무인 차량이었다.

바로 그때 왕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한서진을 찾아낸 듯, 이쪽을 똑바로 바라본다.

해골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광원을 직시한 순간, 한서진은 굳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의식체가 마비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순간 눈동자처럼 빛나는 두 개의 광원이 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느 순간 광원이 그의 의식체를 집어삼키며,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멀리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린다.

힘들게 몸을 일으킨 한서진은 저 멀리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갈라진 균열에서 쏟아지는 에너지,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주변의 시공까지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봤어요……. 신계에 존재하는 세상을…….”

어디선가 죽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냘픈 목소리는 그의 귀에도 익은 것이었다.

한서진은 서둘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스칼린 왕비가 왕의 품에 안긴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무런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광활한 대지……. 그곳을 봤어요…….”

스칼린 왕비는 아직도 그곳의 풍경이 눈에 선한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어딘가를 쫓고만 있었다.

“왕비, 정신 차리시오.”

“하늘을 뚫는 과정에서 체내 에테르 흐름이 모두 일그러지는 손상을 입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치유 마법을 쓴다 하여도…….”

“그래도 시도하시오!”

왕이 일갈하자 노신하는 안타까운 얼굴로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왕비는 왕의 반려이지만, 노신하의 딸이기도 한 사람. 슬픈 마음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폐하, 이제 결심하셔야 합니다.”

“…….”

“왕비 전하의 숨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숨이 끊어지면 그마저도 시행하지 못합니다. 부디 왕비 전하의 뜻을 저버리지 마소서.”

왕은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왕비의 손을 자신의 뺨에 댔다.

왕비는 힘들게 그를 바라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이별이…… 아니에요. 잠시…… 만나지 못할 뿐…….”

“…….”

“약속해줘요. 새로운 미래가 싹트는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저를 찾아주기를…….”

“약속하겠소.”

왕은 굳건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부활의 그날까지 백성들의 혼을 온전히 보호하겠소. 다시 한 번 레노지안의 번영을 이뤄내겠소. 그때 반드시 그대를 찾아내겠소.”

노신하가 침통한 얼굴로 지팡이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의 균열은 계속해서 커지며, 땅에 퍼붓는 막대한 에너지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시행하겠습니다, 폐하. 부디 좋은 꿈을 꾸소서.”

그들을 중심으로 새하얀 빛이 번져 나가며, 대륙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다음 순간, 빛이 사라지며 칙칙한 어둠만이 온 세상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대륙을 뒤덮은 시신들은 부패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씩 바스라지고 있었다.

한서진은 그들이 모두 백골로 산화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백골이 된 왕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이따금씩 잠꼬대를 했다. 레노지안의 모든 혼을 자신의 안에 가둔 왕은, 시간이 얼어붙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다.

시간이 쏜살처럼 흐른다.

언제까지나 미동도 하지 않던 노신하의 유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야 하는 그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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