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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86화 (586/609)

00586  군주의 칼  =========================================================================

왕은 보았다.

작은 소인들이 왕국의 땅을 차지하고, 제 주인처럼 행세하며 살고 있는 광경을.

자신의 귀중한 백성들은 땅을 빼앗긴 채 내쫓겨나 비참한 운명을 누리고 있는데, 저들은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자기들 것이었던 것처럼 떵떵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걸었다. 검을 들었다. 자신의 백성들의 터전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그러나 손에는 검이 없었다.

‘또 다른 짐이여, 대답해다오.’

환청은 조금씩 또렷해졌다. 귀를 틀어막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영혼에 대고 직접 말을 거는 것처럼, 그 어떤 매질도 거치지 않고 직접 들어온다.

한서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저 멀리 지평선 너머를 노려보았다.

느껴진다.

저곳에서 자신을 찾는 과거의 자신이. 아니, 그 망념이.

“……아서 왕.”

그가 자신의 검을 찾으러 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검을 되찾는 것은 오히려 시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현재의 시간을 묶어두는 게 아니라, 후대에 미래를 전하는 것. 다시 한 번 레노지안의 번영을 씨 뿌리기 위한 오랜 인내.

―절망의 끝에서 그저 버티려 한 게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싹틔우기 위한 희망입니다.

스칼린 왕비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하다.

그녀는 신살검을 다시 깨웠고, 그리고 그 힘에 반응하여 아서 왕이 일어났다.

레노지안의 재건, 그것이 바로 십 수억 년의 꿈이 설계한 희망이었으니.

검을 손에 넣은 아서 왕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절대 검을 빼앗겨선 안 돼.”

해골 기사는 이와테현의 곤겐산에 자리를 잡은 이후,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일본을 비롯한 각국 정부는 무인 정찰기와 원거리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그 모습을 감시했다. 해골 기사는 생명 활동이 완전히 정지한 것처럼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긴장감을 내려놓지 않았다.

공조 관계를 구축한 미러 임시 동맹은 자신들이 지닌 모든 군사력의 포문을 일본으로 돌렸다. 탄도 미사일의 좌표를 일본으로 설정하고, 위성의 눈을 일본으로 돌렸다. 수십 기가 넘는 원자력 잠수함이 일본을 에워싼 채 언제든 미사일 사일로를 열 준비를 마쳤다.

수송기를 타고 온 무인 차량은 핵탄두를 실은 채 곤겐산을 동그랗게 감싸듯 포위했다.

러시아와 미국이 그런 포위망을 갖춘 이상, 전 세계 화력의 80% 이상이 일본을 정조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 내각은 최후의 저지망이 형성된 것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발 그 스위치가 눌리는 일이 없기를 빌었다.

최종 스위치가 눌리는 순간, 해골 기사를 제거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일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테니.

해골 기사가 곤겐산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덕분에, 일본 정부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국민들을 해외로 탈출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다.

1억이 넘는 인구를 항공기와 선박만으로 탈출시키는 것은 지나친 무리였다. 해골 기사가 지금 당장이라도 파괴 활동을 시작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일본 정부는 한국과 협상에 임했다.

“웜홀 설치로 일본 국민의 피난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대신 일본이 보유한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재를 증여하시고, 또 그 외의 다른 문화재를 50년 간 대여해 주십시오.”

협상에는 H컨설턴트가 대신 나섰다. 웜홀은 개인의 사유물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일본이 보유한 한국의 문화재는 증여, 그 외 타국의 문화재는 100년 간 대여.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90%가 넘는 국민들이 아직도 공항과 항구 주변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리고 말이 대여지, 사실상 증여나 다름없다는 것을 양자 모두 알고 있었다. 100년 대여로 일단 점유를 넘겨받은 뒤, 후에 적당한 구실과 명분을 붙여 증여로 전환하면 그만이니.

결국 일본은 협상을 체결했고, 일본 전역에 수십 개의 임시 웜홀이 열렸다.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조달하여 반영구적으로 유지되는 일반 웜홀과 달리, 공급하는 에너지가 끊기면 닫혀버리는 임시 웜홀이었다.

한국 정부는 과거 북한 난민들을 수용했던 곳을 급히 리모델링해서 재활용했다. 800만 명을 수용했던 시설들에 2,000만 명이 넘는 일본 피난민들이 밀려들다 보니, 콩나물시루처럼 복잡한 북새통을 이뤘다.

식료품 등 모든 생활 물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미국과 유럽 등에도 나눠서 분산 수용했지만, 현장의 혼란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1억 인구가 한꺼번에 피신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혼란을 동반하는 작업이었다. 수십 개의 임시 웜홀을 이용했으니 그나마 나은 것이다. 항공기와 선박에만 의존했다면, 일본 땅을 벗어나는 데만 몇 달 넘게 걸렸을지도 모른다.

웜홀의 위력은 대단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일본 국민의 99% 이상을 대피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세계는 이 말도 안 되는 쾌거에 찬사를 보내며, 한편으로는 곤겐산에 터를 잡은 해골 기사가 언제쯤 움직일지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종말이 다가왔다! 모든 것이 멸망할 것이다!

―믿으라! 그러면 구원받으리라!

해골 기사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검색어만 치면 해골 기사에 관련된 이미지와 동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각국 정부는 더 이상의 정보 통제를 포기했다.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일본 육상 기지에서 쉴 새 없이 미사일과 장거리 포탄을 쏘아대는 모습은 UCC 순위권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리할콘 괴조가 충격파를 뿜어 만들어낸 해일에 이지스 함대가 전복돼서 가라앉는 영상은 세계 시민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전투기도, 전투함도, 미사일도 안 통하는 상황인데 왜 아직까지 핵을 안 쏘는 거냐? 일본 국민들도 죄다 대피했으니 이제 핵을 써야 하는 거 아니냐?

―핵을 쓰면 일본 국민들은 돌아갈 곳을 잃는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살란 말이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리치킹을 제거하는 거다. 군함들이 충격파 한 방에 전복돼서 전멸하는 거 봤지? 리치킹이 해골새 타고 전 세계를 휩쓸면서 그 충격파를 쏴대면 인류 멸망이야. 뭐가 중요한지 몰라?

―핵 공격은 이미 시도했었대. 근데 실패했다더라.

―뭐? 핵 터지는 건 못 봤는데?

―핵이 아예 터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던데. 리치킹이 뭔가 힘을 써서 핵분열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은 거 같대.

전 세계의 눈과 귀는 일본을 향했다.

이 순간만큼은 전 세계 모든 인간들은 한 마음, 한 뜻이었다. 인류가 이렇게 하나로 뭉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인류가 이길 수 있을까?

“핵 포위망 1차 구축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구축망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케인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의 보고에 끄덕였다. 언제 어느 때도 유머 감각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게 미국 정치인이지만, 해골 기사가 등장한 이후 그는 공식석상에서 웃음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 핵전력의 90% 이상이 현재 일본을 조준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즉발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대륙간탄도, 핵잠수함, 함대 핵미사일이 일본을 사정권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 핵탄두를 실은 무인 차량들이 데스 나이트가 있는 곤겐산을 사방에서 포위한 상태입니다.”

러시아는 미사일 위주로 핵 감옥을 짰지만, 미국은 장거리 타격 수단 외에 핵을 실은 무인 차량으로 곤겐산을 사방에서 감싸는 체제도 추가했다.

그 모든 핵 공격이 투하되면, 일본은 형체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한국에도 영향력이 미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한국의 남부 지역은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정부에서 피난을 시행하지는 않고 있으나, 살던 지역을 떠나 북쪽 지역 혹은 해외로 빠져 나가는 인구도 제법 되었다.

“종말 스위치가 눌리면 한국도 피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겁니다.”

미국은 그 사실을 알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서진 가족이야 종말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 웜홀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넘어오면 그만이니.

또한 모든 핵 공격이 널리 퍼지는 게 아니라 곤겐산을 중심으로 집중 타격을 하기 때문에, 핵충격 에너지가 직접 한국을 덮치지는 않을 것이다. 방사능과 낙진 등의 2차 피해는 어쩔 수 없겠지만.

“현재로서는 일본 국민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더 큰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현재 수용 상황이 어떻게 됩니까?”

“한국이 1천 만 명 정도를 받아들였고, 우리 미국이 4천 만 명 정도를 받아들였습니다. 캐나다가 500만 명, 러시아가 300만 명 정도를 받아들였고, 그 외는 유럽이 받아들였습니다.”

1억이 넘는 인구가 아무런 예고 없이 살던 지역을 버리고 집단 피신을 간 상황이다. 생활 물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특히 먹을 것과 잠자리 때문에 피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멀쩡히 잘 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환경이 뒤바뀐 것이다. 정상적인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전투 식량, 비상식량으로 하루 세 끼를 해결해야 하니,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배급망을 갖춰서 인스턴트가 아닌 정상 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했지만, 정형화된 메뉴의 단체 식사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은 세계에서도 순위권에 꼽히는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숙박업은 호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피난 일본인을 받아들인 지역의 숙박업소는 현재 빈 객실이 전혀 없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장기투숙객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은 호텔, 콘도, 모텔 등 가리지 않고 싹쓸이했다.

“신살검을 찾고 있구나.”

한서진은 미국이 군사 채널로 보내주는 영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예전이라면 하늘의 눈동자를 통해 앉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다봤겠지만, 신살검이 타르타로스 3와 분리된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아서 왕은 벌써 며칠째 일본에 눌러앉아 꼼짝도 않는다. 그리고 그 타이밍은 그가 신살검의 기척을 감추는데 성공한 순간과 동일했다.

신살검의 존재감을 잃어버린 아서 왕은 그 자리에 일단 멈추고, 검이 어디에 있는지 탐색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성이 얼마만큼이나 남아 있을까?’

한 번 대화를 시도해보고 싶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다.

타협의 여지가 있는지, 아니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야 하는지.

한서진은 아서 왕이 지닌 힘이 두려웠다. 굳이 신살검이 없어도, 그는 지금 가진 힘만으로 지구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생전에 인자한 군주였다는 점, 지금도 레노지안 백성들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희박한 희망을 걸 뿐이다.

바로 그때였다. 모니터에서 미칠 듯한 경고 알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곤겐산을 중심으로 에테르 농도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반원을 그리며 넓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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