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80 상승 =========================================================================
Table A.
2차 대전 당시 설립된 비밀특무기관으로, 필요하다면 대통령에게조차 보고를 올리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하는 기관이었다.
전쟁 당시 태평양에서 건져 올린 아카식 블레이드를 연구하여 미국의 과학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수십 년 간 그림자 속에 숨어, 미국의 과학 수준을 좌지우지해온 기관. 그러나 한서진의 존재감이 날로 커져감에 따라 조금씩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최고 위원들의 결정으로 창설 수십 년 만에 해산을 결심했다.
‘미국은 더 이상 TA가 필요하지 않다.’
최고 위원들 사이에서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TA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한서진이 전부 할 수 있었다. 세상은 에테르 과학 문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었고, 한서진은 그 절대적인 지식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수십 년 간 구축한 조직 노하우를 아쉬워한 한서진이 연방 정부와 빅딜을 한 끝에, TA는 그의 휘하로 들어오게 되었다.
TA전략연구소라고 조직명을 개명하고, 양지의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 Table A는 연구개발 그 자체보다는, 지식 개발의 지원과 보존,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전략 방안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즉 과학 지식 그 자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 개발에 몰두한다.
여기에는 예산을 운용하는 것, 세계 유수의 대학 및 연구소들 간의 연합관계를 형성하는 것, 이미 SJ그룹이 가지고 있는 특허 등의 지적 재산을 이용해 국제 정치나 경제에 간섭하는 것, 등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어떡하면 한서진 박사가 가진 힘을 국제 사회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과시할 수 있을까, 그 전략을 짜는 연구소라고 보면 된다. 그 외는 다 멋있어 보이려고 덕지덕지 갖다 붙인 수식어니까.”
연구소장은 한서진이지만, 부소장 겸 소장 대행인 니트론이 사실상 최고기관장이나 다름없었다. 한서진은 그저 이름만 걸어두었다고 보면 된다.
“거기에 덤으로 미국의 국익도 끼워 팔기로 넣고.”
“…….”
“다들 표정이 왜 그렇지? 내가 틀린 말 했나?”
한대 Table A의 최고 위원이었고, 지금은 상임이사는 직함을 맡고 있는 구프게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너무 적나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들 당황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는 상임 이사뿐만 아니라 실무진들도 와 있습니다.”
“조직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네. 이건 내 신조일세.”
‘실무를 떠맡으신 게 어지간히 억울하신가 보군.’
구프게니를 비롯한 상임 이사들은 이해한다는 듯이 자기들끼리 눈을 맞췄다. 그들은 모두 한때 Table A의 최고 위원이었던 이들이었다.
“지금 SJ그룹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통합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는 걸세. 모든 조직이 다 따로 놀고 있어.”
“한서진 박사님은 얼마 전 지주회사 에스코너를 중심으로 계열 정리를 완료하셨습니다만.”
“그건 재산 관계를 정리한 것뿐이잖아.”
“…….”
“지금 SJ그룹에 묶인 회사나 연구소들을 보게. 다 각자 개인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가끔 자기들끼리 협업을 하기도 하지만 주먹구구식이란 말이야.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통일된 방향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몇 몇은 공감한다는 듯이 조그맣게 끄덕였다.
심지어 서로 다른 조직 및 부서 간에 예산 사용이나 연구 주제가 겹치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각 계열사나 연구소가 서로 철저히 독립된 주체라는 점에 있었다.
지주회사인 에스코너가 그런 교통정리를 해줘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에스코너는 지주회사다 보니 그저 재산 관리만 한다. 각 회사나 연구소의 경영 및 전략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그러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다.
“회장이라는 사람이 그룹을 나 몰라라 내팽개쳐두고 자기 개인 연구에만 빠져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산하 조직이 모두 따로 논다.
SJ그룹의 고질적인 특징이자, 개성이기도 했다. 하나하나가 포브스 최상위권에서 놀고 있는 공룡이다 보니, 다들 알아서 혼자서도 잘 설치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서로 간에 사업이나 활동성에서 부딪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같은 SJ그룹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적당히 양보하고 물러서지만,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가 잦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었다.
“휘하 계열 간에 의사소통과 교통정리를 해줄 유권기관을 만듭시다. 이름은 일단 대충 통합전략본부 정도로 하고, 뭐 나중에 바꾸면 되겠지.”
“H컨설턴트가 지금 그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나요?”
“H컨설턴트는 한국에서만 활동하잖소. 그것도 거의 한 박사 이미지 홍보 위주로 활동하고. H컨설턴트의 이름값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지.”
“하지만 H컨설턴트에는 사모님이 계신데. 박사님 여동생분도 계시고요.”
“그 두 분은 내가 생각하는 통합의사기구하고는 정체성이 맞지가 않아.”
“하긴, 그건 그렇습니다.”
몇 몇 상임 이사들이 공감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니트론은 이에 자신감을 얻고 밀어붙였다.
“대충 통합전략본부 같은 거 만들어서 한서진 박사 직속기구로 갖다 넣읍시다. 본부장이 한 박사 의중을 확인해서 SJ그룹의 교통정리를 총괄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면 이 공룡들이 더 이상 쓸데없는 힘 낭비는 안 하겠지.”
“그러면 그 기구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게 되는 거 아닌가요?”
“폭주하는 권력이 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달아야겠지. 우리 TA전략연구소도 그 감시책 중 하나가 되어야 할 테고. 아무튼 SJ그룹을 지금 이대로 놔두는 건 좋지 않아요.”
회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대체로 니트론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했기에, 빠른 속도로 방향이 잡히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논제는 가칭 통합전략본부의 초대 본부장으로 누구를 추천하느냐였다. 한서진한테 알아서 결정하라고 하면 그 인간은 그냥 공석으로 놔둘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H컨설턴트 부사장 친구가 괜찮을 것 같은데요.”
“김범석 부사장이?”
“사람이 일 욕심은 많은데 권력 욕심이 없습니다. 주제 파악도 확실하고, 눈치도 빠르고요. 통합전략본부가 움직이게 될 권력의 크기를 생각하면, 사욕이나 야심이 큰 사람은 그 자리를 맡아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 김범석 부사장이라…….”
SJ그룹 내에서는 제법 유명한 인물이었다. H컨설턴트의 사실상 최고경영자로서 무리 없이 조직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덕분에 한지혜와 송하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사실 H컨설턴트 부사장에 머무르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죠.”
“그럼 투표로 해결할까? 어차피 우리가 결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초대 본부장으로 추천을 할 뿐이니까 다들 맘 편하게 거수하도록. 찬성하는 사람?”
TA전략연구소에서 추천하면 한서진은 별 말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추천이 사실상 확정이나 다름없는 상황, 다른 이사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만장일치로군. 좋아, 그럼…….”
그 순간 스마트폰 진동음이 일제히 울렸다. 그것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상임 이사 7인 전원의 스마트폰이 미칠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한둘이 그랬다면 매너 모드도 안 하느냐고 타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임 이사 전원에게 동시에 온 연락, 그들은 안색이 굳어져서 각자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니트론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오늘 회의는 일단 여기서 끝내지.”
그는 재빨리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다른 상임 이사들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TA전략연구소 중앙통신실로 향했다.
“해저 지진이라고?”
“3분 전에 태평양에서 확인된 겁니다. 그런데 지진의 양상이 매우 이상합니다. 일반적인 지진하고 전혀 다릅니다.”
중앙통신실에 도착해서 진동파를 확인한 니트론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가 비록 지진 전문가는 아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강한 진동이 짧게 한 번, 그 사이에 약한 진동이 연속적으로 흐르고, 다시 강한 진동이 짧게 한 번, 이것의 반복이라…….”
진동의 크기와 주기는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상임 이사들의 안색이 굳어져 갔다.
“SJ사이트의 재해 예측 경보는?”
“일반적인 해저 지진으로만 표기하고 있습니다.”
“에테르 폭주 같은 게 관여하지는 않았다는 뜻인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에테르 스톰이나 폭주가 간섭된 재해라면 SJ사이트가 분명히 경고를 했을 테니까요.”
“지진 전문가들은 뭐라고 하지? 아무런 의견도 좋네.”
“일반적인 지진 양상이 아닌, 대단히 특이한 패턴이라고만 입을 모을 뿐입니다. 다만 진동파를 보면 대단히 큰 에너지를 품은 지진이 틀림없는 듯한데, 주변에 전해지는 피해가 거의 없습니다. 이 정도 에너지면 벌써 상당한 규모의 해일이 발생해야 정상이라고 합니다.”
니트론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무언가가 아주 제대로 잘못되었다고, 온몸의 세포가 외치고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통화를 시도해도, 한서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쿵.
암흑을 향해, 오른팔을 힘껏 뻗는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뚫고 팔을 집어넣은 뒤, 그 끝에 닿는 것을 있는 힘껏 움켜쥔다.
그리고 다시 왼팔을 힘껏 뻗는다.
쿵.
힘껏 전진하자, 뜨겁게 녹은 암석이 얼굴을 뒤덮었다. 팔을 적시고, 늑골을 따라 골반까지 흘러내린다.
쿵. 쿵.
다시 오른팔을 힘껏 뻗어 끝을 움켜쥐고, 그렇게 몸을 지지한 채 왼팔을 또 앞으로 뻗는다. 두 팔을 번갈아 앞으로, 위로 뻗으며, 조금씩이지만 천천히 나아간다.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
빛이 없는 암석 덩어리를 뚫고 전진하며, 백골의 시선은 오롯이 한 방향만을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엄청난 힘의 자태가 느껴진다. 보이지 않아도 눈이 멀어버릴 만큼.
그 힘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절대 잊을 수 없는 향취가 느껴졌다.
지나온 길의 저 아래에서, 아련한 환청이 들린다.
―폐하, 기어이 가시렵니까…….
백골은 웃었다.
자신이 지나온 길, 저만치 아래에서 들려온 환청. 그러나 그것은 실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린 것이었다.
백골은 다시 팔을 뻗었다. 오른팔을 뻗고, 왼팔을 뻗고, 그렇게 길을 만들었다. 녹은 암석과 단단한 바위를 뚫고 자신이 상승할 수 있는 통로를 뚫었다.
그 틈으로 밀고 들어가며,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또 다른 세상을 향해 전진했다.
한 점 빛도 들어오지 못하는 깊은 심해.
단단한 암석의 바닥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거대한 뼈의 손이 튀어나왔다. 바닥을 짚고 있는 힘껏 힘을 주자, 균열이 더욱 커지며 마침내 백골이 심해로 빠져나왔다.
「여기는 칵터스 1호, 거대한 심해 생물체 발견! 빠른 속도로 수면을 향해 부상하고 있다!」
「으아앗! 상승한다! 상승한다!」
끝없는 상승이 마침내 끝나고, 거대한 물보라가 사방을 향해 튀었다.
수면에 부상한 채 백골은 잠시 움직임이 없었다.
뜨겁게 쏟아지는 태양의 빛이, 오래 전에 생명을 정지한 몸에 깊은 활기를 불어넣는다.
백골의 머리 위의 왕관이, 태양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두 팔을 크게 벌린 백골은, 그 생명의 기운을 마음껏 만끽하듯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