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9 상승 =========================================================================
그 뒤로도 스칼린은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 송하나와 매일 붙어 다니며 열심히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그것은 마치 최대한 많은 추억을 쌓아두려는 것처럼 보였다.
한서진은 그런 모습에 애잔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녕 그녀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가를 번뇌했다.
그녀가 마음을 돌려주기만 하면 될 텐데. 이미 끝난 과거, 레노지안을 지우기만 하면 될 텐데.
그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그녀는 신효진이 아니다. 신효진이 아는 스칼린 왕비도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레노지안의 왕비로 군림한, 군주의 반려자이자 기사이다.
모든 것이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왕비로서의 책무를 잊지 않고, 끝내 현생에 재림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각오를 과연 꺾을 리가 있겠는가?
한서진도 그냥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녀와 대립하게 되는 순간을 착실하게 대비했다.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효과적으로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스칼린 왕비는 모든 면에서 인간을 아득히 초월했다. 약물이나 병기, 총탄 등이 일체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핵폭발도 직접 맞지 않는 이상 버텨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녀를 제압하자고 핵을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마법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레노지안의 힘을 활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레노지안에서도 대륙 최강의 기사로 꼽히던 인물, 아서 왕조차 기사로서는 그녀가 자신보다 강함을 인정했었다.
그런 기사를 제압하려면 웬만한 고위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러나 그는 레노지안의 고위 마법에 관해서는 아직 모든 게 서툴렀고, 지식도 얕았다.
가끔 송하나와 즐겁게 지내는 그녀를 보면서, 혹시 마음을 바꾼 것은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가 들 때도 있었다.
“신살검이군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별안간 뒤에서 스칼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서진은 놀란 표정을 감추고 뒤를 돌아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죠?”
스칼린은 대답 대신 신살검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한서진은 손바닥 안에 축축하게 땀이 고이는 걸 느꼈다.
“신을 죽이는 힘을 가진 검이죠. 레노지안 왕가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해진.”
“…….”
“저의 전우이기도 했고요. 신살검에 제가 더 잘 어울릴 거리며 폐하가 주셨지요.”
그윽한 눈빛은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저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에 슬픈 기운이 차오른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기원은 아무도 알지 못해요.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제독이라는 사람이 남긴 물건은 아닐까 하는.”
“…….”
“폐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겠죠. 지금 폐하가 누리는 삶에 푹 빠지셨으니까.”
스칼린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시선은 줄곧 신살검에 꽂혀 있었다.
“대량의 미스릴로 주문의 서를 만들어 신살검의 힘을 끌어낸다…… 훌륭한 발상이지만, 주문의 서를 덕지덕지 붙이는 건 신살검의 힘을 1%도 끌어내지 못해요. 무거운 족쇄를 들고 휘두르는 거나 다름없죠.”
“스칼린, 멈춰요.”
“신살검의 진정한 힘은 다른 어떤 부속물 없이, 그 자체에서 뿜어낼 때 가장 강력한 빛을 발하죠.”
그녀의 몸이 스르르 떠올랐다. 허공을 미끄러지듯이, 신살검을 향해 다가간다.
한서진은 재빨리 타르타로스 3에 명령어를 입력했다. 주변의 에테르 파동이 휘몰아치며, 황금 원반을 중심으로 강력한 결계가 형성되었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거친 스파크를 뿜어내는 에테르 결계, 스칼린은 그 앞에 잠시 멈춰 선 채 한서진을 돌아보며 웃었다.
“대륙 최강의 대마도사인 아버지의 마법도 제가 임하는 육탄전은 막아내지 못했어요. 레노지안의 힘을 온전히 다루지 못하는 폐하는 과연 어떨까요?”
“스칼린!”
대답 대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결계를 향해 오른팔을 내밀었다. 손끝과 결계가 부딪치며 엄청난 스파크가 튀었다.
불꽃은 그녀의 팔을 집어삼킬 듯이 덮쳤지만, 그녀는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결계를 뚫고 안으로 진입했다. 작열하는 과부하가 작열하며 불꽃, 그것은 마치 결계가 그녀의 침입에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끝을 중심으로 붉은 섬광이 폭발하며 뻗어나갔다. 거짓말처럼 타르타로스 3를 보호하던 에테르 결계가 사그라졌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그녀의 몸이 신살검을 향해 거침없이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한서진은 급히 권총을 꺼내 그녀를 겨누었다. 실탄 대신 미스릴이 내장된 에테르 충격파 사출기였다. 만약의 상황을 위해 만들어둔, 대 스칼린 전용 무기였다.
“멈춰요! 손대지 마!”
신살검 바로 앞에 선 스칼린은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권총의 정체를 알아보자 희미한 조소가 입술에 걸렸다.
“그 정도로 저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나요, 폐하?”
한서진은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파르스름한 에테르 충격파가 그녀를 덮쳤다.
푸른 스파크가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표정 하나 깨지지 않았다.
“하늘 감옥에 균열까지 뚫었던, 대륙 최강의 기사가 바로 저랍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신살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빛의 폭풍이 뻗어 나오며, 한서진의 온몸을 뒤덮었다. 모든 감각이 지워지며 끝없는 추락 속으로 의식이 빨려 들어간다.
한서진은 언제까지나 추락하고, 추락했으며, 또 추락했다.
그 무한의 낙하 속에서, 그는 문득 보았다.
―당신이 만든 꿈속에, 아마 저는 존재하지 못하겠지요…….
슬픔에 젖은 스칼린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희미한 절규가 그녀의 음색 뒤로 배경처럼 내려앉는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윤회의 굴레에서, 영원히 기다릴게요. 당신이 언젠가 나를 찾아주기를, 다시 레노지안의 번영을 빛내주기를…….
추락은 끝없이 반복된다.
오랜 세월에 지친 노신하의 탄식이 이어진다.
―지상은 이미 또 다른 생명들로 번영을 이루었다. 우리 레노지안이 그것을 찬탈하는 것 또한 운명의 섭리를 거스르는 잔혹한 행위 아닌가? 폐하의 꿈속에서나마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신의 자비일진데, 레노지안의 부활까지 꿈꾸는 것은 신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아닌가?
처음 노신하는 왕과 왕비, 그들과 뜻을 같이 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왕의 꿈을 지키는 수호자 노릇을 하면서, 그의 괴로움과 번뇌는 깊어져만 갔다.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런 영원한 멸망보다는, 차라리 지금 이대로 존재하는 것도…….
쉬지 않고 이어지던 추락은 마침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의 모습이 보인다. 익숙한 지형이 나타나며 점점 가까워진다. 마침내 그의 시각은 어느 실내까지 도달했다. 조금 전까지 그가 머무르고 있던 연구실이다.
저만치 아래에 타르타로스 3 위에 떠 있는 스칼린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그녀의 머리 위를 향해 끝없이 추락하며, 그녀의 모든 동작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검을 향해 손을 뻗어, 움켜쥔다.
그 순간 새하얀 빛의 폭풍이 추락하는 그의 시야를 덮쳤다. 그녀가 보는 풍경, 그리고 그녀가 품은 감정이 모든 저항을 무너뜨리고 밀려들어온다.
그것은 아련한 슬픔이자, 최후의 미련이었으며, 숭고한 책임이었다.
―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이 불편하신가요?
―예전에 못 다한 행복을 다시 느껴본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요.
―지금은 잠시 너그럽게 저에게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되나요?
―전 참 오랜만에 폐하를 만나서 즐거운 건데.
―하나를 바라보는 폐하의 눈빛……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그녀의 모든 감정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그의 가슴을 온통 헤집어놓으며 자신의 흔적을 심는다.
‘저는 그저 망념이에요. 망령조차 되지 못한, 잊혀진 의식의 잔재…….’
지금 신효진을 움직이는 스칼린은, 오래 전 스칼린 왕비가 죽으면서 남긴 잔존 사념. 아서 왕의 백골에 남아 리미트리스 드림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것.
‘혼이 윤회에 굴레에 들어가고, 육신이 소멸하면서 진작 소멸해야 했을, 스칼린의 인생을 비추는 주마등같은 것…….’
혼이 떠난 뒤, 죽은 몸에 남아 소멸해야 했을 의식의 사념.
잊혀져야 할 미련이 혼의 발목을 붙잡고 윤회의 굴레에 따라 들어간 것이다. 왕비로서의 무거운 사명감이 그 말도 안 되는 역천을 가능케 했다.
‘저는 세상에 나온 그 순간부터 소멸하고 있었어요…….’
신효진을 대신하여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망념은 빠른 속도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지도 못한다. 원래라면 오래 전에 소멸했어야 할 왕비의 잔재물이었기에.
비로소 한서진은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이유에서 지난 몇 달 동안 평범한 사람처럼 지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영원한 소멸을 맞이하기 전, 최후의 추억을 쌓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리온, 그리고 타르온과 함께…….’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소중한 두 인연.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새기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절대적인 소각. 그것은 그녀가 망령조차 되지 못한, 망념이기 때문이었다.
신살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스칼린의 망념이 마지막으로 쥐어짜내어 태운 빛이 검으로 흘러들어간다. 검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봉인이 깨져나간다. 검이 가두고 있는 힘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끝이 없을 듯했던 추락이 마침내 멎었다.
한서진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확인하다가, 얼른 스칼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검을 쥔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착각일까? 그녀의 몸이 희미해지는 것만 같다.
“안녕, 리온.”
‘안녕, 타르온.’
“잠시나마 행복했어요.”
‘리온을 잘 부탁해.’
성전이 열렸다.
왕은 군세를 이끌고, 최후의 성전에 대비했다. 하늘에 뚫린 균열을 노려보며,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힘의 파동에 집중했다.
초룡을 탄 채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정신을 집중하며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백색의 광채가 쏟아져 내려왔다. 그것은 누구도 해하지 않고, 부드럽게 모든 이를 감쌌다.
포근한 기운 속에서 왕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리온……. 영원히 사랑해요.’
왕은 멈칫했다.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이상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음색인데, 귀에 익숙하게 느껴지다니.
볼이 뜨거워진다. 손을 대보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왕은 당황해서 멈칫했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것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있다. 용의 군단, 마법사, 기사, 응원하는 백성, 그리고 평화로운 수도와 대륙의 풍경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해가는 것을, 왕은 덤덤히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있었다.
끼긱. 끼기긱. 끼기기긱.
팔을 움직이려 하니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린다. 왕은 힘들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두 팔을 내려다봤다.
살점이 썩어 사라지고 뼈만 남은 두 팔이 보인다.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반려가 뼈만 남은 채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온 사방에 무수히 널린 뼈, 그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왕좌에 그는 앉아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기억났다.
오랜 세월의 잔재가 해일처럼 의식으로 밀고 들어왔다.
백골은 고개를 들어 저 높은 곳을 바라봤다.
암흑 너머에서 거대한 힘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 힘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손짓하고 있었다.
그는 힘이 있는 방향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 순간 고체가 내는 마찰음 같은 음성이 그를 불렀다.
―기어이 가시렵니까, 폐하?
백골은 천천히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낡고 헤진 로브를 뒤집어쓴, 한때 둘도 없는 충신이 서 있었다.
―지상은 우리가 아닌 다른 생명에게 허락된 터전입니다. 그곳을 범하는 것은 또다시 신의 노여움을 살 수 있습니다, 폐하.
백골은 천천히 웃었다.
―그래도 갈 수밖에 없다는 걸, 경도 이미 알고 있잖소.
흰 뼈의 손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