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8 뒤집히다 =========================================================================
송하나는 간편한 운동복을 입고 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형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세심히 관찰하면서, 여러 가지 고난이도의 자세를 취한다. 사람의 몸으로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놀라운 자세를 이리저리 유지하면서도, 이마에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한창 요가에 집중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인은 신효진이었다.
몸을 뒤로 동그랗게 말아서 두 발을 어깨에 올린 자세 그대로, 그녀는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네, 효진 씨.”
「하나 씨, 저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저 하나 씨 집 손님방에서 잠깐만 지내도 될까요?」
“네?”
송하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신효진은 그런 부탁을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친구잖아요? 하나 씨와 잠깐만이라도 같이 지내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안 될까요?」
“네, 그럼 그렇게 해요. 어차피 방은 남아도는 걸요, 뭐.”
「고마워요.」
귀가한 한서진은 1층 응접실에서 우뚝 멈췄다.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하나야. 박사님 왔다.”
“오빠, 왔어요?”
“박사님, 안녕?”
두 여자가 까르르 웃으며 자신을 맞이했다. 둘 다 팔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편안한 차림을 한 채 잔을 들고 있었다. 스칼린은 위스키잔, 임신 중인 송하나는 음료수잔.
송하나는 볼에 홍조가 올라 있는 모습이, 술을 먹은 것처럼 살짝 흥분한 듯이 보였다.
잠깐, 그보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둘이 말 놨어?”
“진작 이랬어야 했죠. 안 그래, 송하나?”
“맞아, 맞아.”
“서로 존대하는 친구 사이가 어딨어. 그것도 동갑인데.”
두 여자는 또 까르르 웃으며 건배를 하듯이 음료수 잔을 부딪쳤다. 한서진은 대체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 포인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왜 이 시간에 스칼린이 여기 있지?
“박사님, 하나가 저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된대요. 괜찮죠?”
“네? 뭐라고요?”
한서진은 놀란 눈으로 송하나를 바라봤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방도 많은데 어때요. 오빠 불편하게 안 한대요.”
“아닌데? 불편하게 할 건데?”
“너, 친구 남편한테 그러면 못 써.”
“하나뿐인 친구한테 너무 그러지 마. 너 나 말고 친구도 없잖아.”
“아니거든? 친구 많거든?”
“아이고, 네가? 퍽이나 많겠다.”
대체 한나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한서진은 그저 혼란스러웠다. 혹시 내가 지금 다른 시공으로 휘말린 건가?
“박사님도 와서 한 잔? 술 못 하는 와이프 대신 위스키 어때요?”
신효진, 아니 스칼린이 잔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홍조가 살짝 올라 있지만, 조금도 취한 눈빛이 아니다.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서진은 끄응 하고 신음하다가 두 여자의 홈 파티에 참가했다.
“자, 와이프 친구가 따라주는 술 한 잔 드셔보세요.”
스칼린은 과장되게 공손한 몸짓으로 술을 따라 주었다. 한서진은 얼떨떨해하며 잔을 받았고, 송하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옆에서 히죽거리며 웃었다.
술자리는 꽤나 길어졌다. 최수한이 중간에 새 요리를 여러 번 가져왔다.
송하나는 몹시 기분 좋아 보였다. 그녀의 이런 구김 없는 모습은 한서진도 처음 봤다.
‘그러고 보니 하나가 친구가 없구나.’
송하나는 친구가 없다. 고교 시절 친구들은 대등한 친구라기보다는 그녀를 숭배하고 따르는 무리였다. 재벌 딸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도 그랬었는데,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효진이 네가 먼저 말 놓자고 해서 나 깜짝 놀랐어. 평생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거든.”
“그럼 네가 먼저 말 놓자고 하면 되지, 왜 넌 가만히 기다린 거야?”
“에이, 누가 먼저 꺼냈느냐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한 건 아니지. 자, 마셔.”
그리고 또 짠.
“그래도 내가 너 가진 돈에 기 안 죽고 눈치 안 보고 편하게 대해주니까 좋지?”
“그 말을 굳이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아.”
“친구니까 그런 말도 ‘굳이’ 하는 거야.”
또 한 번 짠.
“박사님이 잘해줘?”
“엄청 잘해줘. 너도 꼭 우리 오빠 같은 남자 만나.”
“나도 옛날에 한 번 만나봤어.”
“정말? 너 모쏠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 얼굴에 이 몸매에, 모쏠이라는 게 가당키나 하니? 그거 진짜로 믿었던 거야?”
“세상에, 왜 나한텐 한 번도 이야기 안 했어? 기집애, 순진한 척은 혼자 다 했구나.”
송하나는 손뼉까지 치며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한서진은 두 여자의 수다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만약 여기에 한지혜까지 낀다면 의식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근데 왜 헤어졌어? 꽉 잡았어야지.”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은 거라 어쩔 수 없었어. 하늘의 지엄한 뜻을 어떻게 거역하니.”
“세상에…….”
정말 믿는 건지 아니면 감정이 북받친 건지 송하나는 눈물까지 살짝 글썽거렸다.
밤늦게까지 수다를 떠느라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마침내 송하나가 옆으로 쓰러졌다.
“폐하, 우리 하나 쓰러졌어요. 얼른 데려다 눕혀야죠.”
“……왜 이러는 겁니까?”
그제야 한서진은 딱딱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송하나가 함께 하는 자리라서 내내 얼마나 불편했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왜긴요, 추억 쌓으려고 그러죠.”
“추억, 이요?”
완전히 엇나간 대답에 한서진은 맥이 빠졌다.
“예전에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했거든요. 서로 으르렁거리며 많이도 싸웠죠. 물론 그만큼 미운 정도 많이 들었지만.”
“……?”
“아, 폐하는 아직 모르시지, 참.”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건 즐거운 비밀로 남겨둘게요.”
스칼린은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잠든 송하나와 한서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레노지안의 군주로서 어떻게 하실지 결심은 하셨나요, 폐하?”
“전 아서가 아니라 한서진입니다.”
스칼린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한서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참 예쁜 표정이지만 알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시선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녀에게 큰 죄를 지은 듯한 부채감이 엄습해왔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그 동안만이라도 한서진으로 대해줄게요.”
스칼린은 정말 손님방에서 지냈다. 그것도 무려 두 달이 넘도록.
그 시간 동안 스칼린은 송하나와 꼭 붙어 지냈다. 둘이 함께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다.
태교를 받는데 함께 따라가기도 하고, 아이에게 입힐 옷을 같이 고르기도 했으며, 태교 일지를 봐주기도 했다. 임신부가 받는 운동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근데 임신 중에 요가 해도 돼?”
“상관없어. 난 몸이 튼튼하거든.”
“박사님이 뭐 좋은 거 만들어주셨구나?”
“박사님이 뭐야, 서진 씨라고 해. 그냥.”
서로 꼭 붙어 다니며 둘은 참 많이 친해졌다. 한서진은 덕분에 송하나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차갑고 도도한 미녀인 줄만 알았는데, 소녀처럼 천진한 모습도 있다는 건 스칼린 덕분에 처음 알았다.
‘신효진’은 송하나의 친구였지만, 냉정히 말해서 명목상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 ‘스칼린’은 어렸을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낸 진짜 친구 같았다.
오죽하면 백철중과 송지현 부부도 스칼린을 불러다가 넷이 함께 놀려고 들었다.
“내가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면 우리 효진이를 며느리로 삼는 건데!”
백철중이 그런 주책까지 부릴 정도로, 스칼린은 송하나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두 여자가 꼭 붙어 다니다 보니 한서진도 자연스럽게 스칼린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와 단둘이 보냈을 시간을 셋이서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너 왜 자꾸 날 신혼 생활에 끼어드는 눈치 없는 친구로 만들어? 서진 씨가 너 없을 때 나한테 얼마나 눈치 주는지 아니?”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근데 오빠, 정말 그랬어요?”
“……내가 언제.”
“이거 누구 말을 믿으면 돼?”
“친구 말을 믿어야지 누구 말을 믿으려고? 나 서운해.”
정말 그 고고한 스칼린 왕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녀는 소탈하게 행동했다.
지난 두 달간, 그녀는 왕의 책무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날도 새벽까지 술과 음료수로 파티를 하고, 송하나가 가장 먼저 잠이 들었다.
“우리끼리 한 잔 더 할까요, 폐하?”
스칼린이 잔을 흔들어 보였다. 한서진은 아무 말 없이 위스키 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그녀가 웃으면서 건배를 청했다.
그녀가 다시 자신을 폐하라고 부른다. 한서진은 그 사실에서 괜히 착잡해졌다.
“앞으로 어떡하실 생각인가요?”
“바뀐 건 없어요. 왜요, 제가 마음이 변하기라도 기대하셨나요, 폐하?”
“전 레노지안을 재건할 힘이 없습니다. 혼으로 머물러 있는 백성들에게 육신을 줄 수 없어요. 그런 방법도 모릅니다.”
한서진은 단숨에 잔을 비워버린 후, 스칼린을 노려보듯이 똑바로 주시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스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조용한 시선에서 한서진은 묘한 야릇함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과거의 인연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녀에게 여자를 느끼는 자신을 깨닫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윽고 그녀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이 불편하신가요, 폐하?”
“…….”
“저는 좋기만 한데. 예전에 못 다한 행복을 다시 느껴본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요.”
눈을 마주치며 그녀가 웃었다. 한 올의 구김도 없이 밝은 미소였다.
“지금은 잠시 너그럽게 저에게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되나요? 전 참 오랜만에 폐하를 만나서 즐거운 건데, 조금만 저에게 맞춰 주세요.”
그녀는 잠시라고 했다. 한서진은 그 짧은 단어에서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느꼈다.
결국 그녀와 자신은 언젠가 부딪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레노지안의 부활을 원하고, 자신에게 왕의 소명을 관철시키려 한다. 하지만 자신은 군주 아서가 아닌 박사 한서진의 삶을 원한다.
“서로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좋은 시간을 만들자는 뜻입니까?”
“대립이라…… 그래요, 그렇다고 해두죠.”
“…….”
“폐하와 송하나, 제 소중한 두 사람과 예전처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소중한 두 사람?”
“아직도 모르시는 건 아니죠? 하나는 전생에…….”
“됐습니다.”
한서진은 단호하게 스칼린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하나가 전생에 나와 어떤 인연이었는지, 나는 아무 관심 없습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요.”
“……폐하.”
“지금 하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자이자 아내입니다. 난 그걸로 됐어요. 충분해요.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에 어땠는지 따위는 알 바 아닙니다. 알 필요도 없어요.”
단호한 음성에 스칼린의 눈동자가 조금 가늘어졌다가 이내 서글픈 웃음을 머금었다.
“폐하는 지금의 삶에 지나치게 만족하고 계시군요.”
그래서 우리를 잊었다.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그녀의 서글픈 눈빛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두 개의 빈 잔을 채운 뒤, 자신의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서진은 그녀를 관찰하듯이 살피며, 천천히 잔을 부딪쳤다.
“하나를 바라보는 폐하의 눈빛…… 참 그리웠어요.”
“…….”
“이젠 제 것이 아니지만, 그 눈빛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