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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77화 (577/609)

00577  뒤집히다  =========================================================================

자신을 바라보는 스칼린 왕비의 눈빛은 냉엄했다.

“왕의 책무를 잊지 말아요, 폐하.”

왕의 책무.

그 짧은 단어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 몰랐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천금의 무게에 어깨를 강요당하는 것만 같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아버지와 저, 그리고 당신의 긍지와 사명을 모아 만든.”

그녀는 신효진이 아니었다. 또한 신효진이 꿈꾸던 스칼린 왕비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 백성, 그리고 나라가 소멸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했던, 망국의 왕비.

“폐하. 레노지안의 군주로서, 우리들의 낙원을 다시 세워주세요.”

한서진은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낙원?”

“그래요, 우리들의 낙원. 그 아름다운 레노지안 왕국을 이 땅에 다시 세워주세요. 오로지 폐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에요. 폐하가 해주셔야 하는 일이에요.”

나른함에 잠긴 듯한 목소리는 귓가에 달콤하기 그지없는 애원을 밀어 넣는다.

“기억하시나요, 그 낙원의 땅에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

“우리를 가둔 신의 정체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우리는 이제 과오를 바로잡을 힘이 있어요. 세상을 차지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요. 그저 폐하가 나서서 이끌어주시기만 하면 모두가 따를 거예요. 저 역시 군주의 아내이자 기사로서, 언제나 그 옆에서 보필할 거예요.”

강한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 그러나 이상하다. 아까처럼 마냥 듣기에 무겁지만은 않다.

그런 자신에게 괴리감을 느낀 한서진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스칼린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똑바로 눈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왕좌를 외면하지 마세요.”

송하나는 연구소 별실에서 태블릿PC로 신문 기사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빠, 효진 씨는 좀 어때요?”

“아직 상태가 괜찮지 않은 거 같아. 일단 더 쉬라고 했어.”

“너무 이것저것 물어본 건 아니죠? 그래도 환자인데.”

“에테르 스톰이 어땠는지 알고 싶었는데 물어볼 컨디션이 아니었어. 다음에 물어보지, 뭐.”

한서진은 힘없이 웃으며 송하나의 옆에 앉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어깨를 감싼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복잡하다는 쉬운 표현으로는 지금의 중압감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직시하던 스칼린 왕비의 강인한 눈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신효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을 딛고 온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까요.’

한서진이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스칼린 왕비는 오히려 그것을 저지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그가 거절할 것을 예상한 것처럼, 그래서 그의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봉쇄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도 있는 것일까.

대륙을 다스리던 왕의 반려, 그 세월이 지닌 존재감은 반발조차 들지 않게 만든다. 웬만한 이들은 그녀의 앞에서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쁘게 충성을 맹세할지도 모른다.

‘제압할 수 있을까?’

한서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스칼린 왕비의 힘을 일부 쓸 수 있게 된 신효진조차 현대 군사 시스템으로는 제압이 불가능하다. 핵 아니면 생화학 병기 정도 되어야 그나마 기대할 수 있을 텐데, 그리 되면 천문학적인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다.

하물며 온전한 스칼린 왕비의 힘은 어떨까.

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관측했고, 또 신효진에게 무수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한서진은 그녀의 힘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한서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녀보다 더 빠르게 한순간에 세상을 파괴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해도 괜찮아요?”

“어? 으, 응. 그래. 그렇게 해.”

꿈결에서 들리는 듯한 음성에 그는 겨우 현실로 정신이 돌아오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송하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빠, 제 말 안 듣고 있었죠?”

“아냐, 듣고 있…….”

한서진은 부정하려다가 그녀의 눈빛을 보고 체념했다.

“미안, 사실 잠깐 다른 생각하고 있었어.”

“혹시 에테르 스톰 때문에 그러세요?”

“그래. 요즘 들어서 이상하게 에테르 스톰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어서,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음, 그런 거라면 이해해야죠.”

“고마워. 근데 방금 무슨 이야기했었니?”

“저 용돈 좀 올려주시면 안 되냐고요. 그거였어요.”

이건 다른 의미에서의 뒤통수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한서진은 잠시 기분이 얼얼했다. 순간적이나마 스칼린에 대한 고민도 잊어버릴 만큼.

“용돈?”

“네, 용돈이요.”

한서진은 잠시 동안 생각했다. 내가 언제 용돈을 준 적이 있었나? 아니, 와이프가 언제 용돈을 타서 쓴 적이 있었나?

송하나는 본인 명의로 가진 재산도 상당했고, 또 H컨설턴트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H컨설턴트에서 운영되는 자금만 해도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따로 용돈을 주고 말고 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용돈을 올려달라니. 뭔가 생뚱맞은 듯하면서도 상황이 귀엽다.

“난 H컨설턴트 운영 자금이 너한테 주는 용돈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게 부족해?”

“네, 부족해요.”

송하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한서진은 순간 H컨설턴트의 연간 운영 자금이 얼마인지 떠올렸다.

‘10조 원은 훨씬 넘을 텐데. 아니, 100조 원은 넘지 않으려나? 운영하는 사업 규모가 있으니…….’

“얼마나 올려줄까?”

한서진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물어보았다. 어디에 쓸 건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돈이 없어서 못 쓰지, 있는데 못 쓰나요.”

“음…… 그러면 반도체 특허료로 들어오는 돈은 앞으로 그냥 네가 알아서 써.”

특허 로열티 명목으로 그의 개인 통장에 꽂히는 돈은 한 달에 약 3,541억 달러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지만 그는 동전 지갑을 건네듯 아무렇지 않게 승낙했다.

“정말요? 그거 다 써도 돼요?”

“어차피 나도 쓸 데 없어서 매달 쌓이기만 하는데. 근데 어디에 쓰려고?”

그제야 한서진은 용돈이 필요한 이유를 확인했다. 캐묻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였다.

“음, 한 번 실험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수중에 돈이 모자라서요.”

“실험? 어떤 건데?”

“가난은 정말 나라도 구제할 수 없나, 하는 거요.”

“에이, 당연히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하지. 스스로 일어설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뭘 해줘도 안 돼.”

“근데 유럽에서는 이것저것 실험을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궁금해져서, 한 번 확인해보려고요.”

“그래, 실험 끝나면 나도 알려 줘. 갑자기 궁금해졌다.”

“네, 그럴게요.”

송하나는 방긋 웃으며, 가볍게 키스를 건네고 일어섰다.

“효진 씨는 다음에 봐야겠어요. 몸도 안 좋다니까.”

“그렇게 해. 내가 나중에 말 전해줄게.”

“병원에 입원 안 해도 괜찮은 거죠?”

“여기가 병원보다 더 시설 좋은데 뭐 하러. 의료진도 있고.”

송하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연구소에 부속된 의료시설이 웬만한 대학병원보다 훨씬 좋은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가고 한서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하나 양은 돌아갔나요, 폐하?”

한서진은 경계하듯 옆을 돌아봤다. 언제 들어왔는지, 스칼린이 팔짱을 낀 채 지그시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는 건드리지 마요.”

“제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세요?”

“…….”

“그건 폐하의 미움을 사는 일인데.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말 서운해요.”

스칼린은 가라앉은 얼굴로 가만히 주시했다.

“물론 질투는 조금 나네요.”

“…….”

“하지만 이해할게요. 군주가 후궁을 여럿 거느리는 것은 아무런 흠도 아니니까. 예전의 당신이 오히려 군주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던 거죠.”

후궁을 거느리는 게 흠은 아니다. 마치 자신이 정실인 것처럼 말하는 어투에는 한서진도 말문이 막혔다.

그는 그녀를 살짝 노려보듯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죠?”

“폐하야말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정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건 아니죠?”

“난 아서가 아닙니다. 아서의 환생일 뿐이에요.”

“하지만 폐하의 혼은 리온이에요. 레노지안의 백성 모두를 품어줘야 할 사명을 지녔죠.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군주의 책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이 단단한 표정이다. 어딜 봐도 신효진의 자취를 찾길 어렵다.

눈빛과 표정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가 있구나, 싶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서진이 덤덤히 물었다.

“효진 씨는 어떻게 됐죠?”

“스스로 꿈에 머무르기를 선택했어요. 저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거죠.”

“당신은 효진 씨와 별개의 존재다?”

그 말에 스칼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진은 다시 물었다.

“저는 아서 왕의 환생이니까 아서 왕이라고 하면서, 당신은 그렇지 않다는 건 모순 아닌가요?”

“저는 스칼린, 그리고 신효진은 스칼린의 환생. 하지만 신효진은 저와 하나가 되는 걸 거부했어요. 폐하와는 다르죠.”

“…….”

“신효진은 현실 대신 꿈을 선택했어요. 도망친 거예요. 하지만 저는 도망치지 않아요. 세상의 마지막이 올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울 거예요.”

“내가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면…….”

“뜻을 꺾으실 때까지 간청드리겠습니다, 폐하.”

스칼린은 반려가 아닌 신하의 표정으로 머리를 살짝 숙이며 예를 취했다.

“결국에는 책무를, 군주의 운명을 받아들이시게 될 거예요.”

그녀의 장담에 한서진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뭔가 믿는 바가 있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당장 어떤 위협을 끼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녀는 긍지가 넘쳤고, 정의를 중요시 여기는 기사였다.

한서진이 무력에서 밀린다 해서 자신의 힘으로 의지를 관철시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간청, 그 말에서 그녀가 품은 각오가 어떤지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절대로 자신의 뜻을 꺾지 않을 테니까.

「적합.」

「반려.」

바로 통찰안이 보여주는 그녀의 진실.

그리고…….

「왕의 검.」

그녀는 단지 왕의 처이자 왕자의 어머니이며, 백성들의 국모가 아니었다. 한 명의 강인한 여기사로서 왕의 뜻과 힘을 대변하는 한 자루 검이기도 했다.

한서진은 그녀가 자신과 충돌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에 일단은 만족해야 했다.

‘힘으로 부딪치면 절대 못 이겨. 승산이 없다.’

그녀가 책임을 소중히 여기는 기사라는 사실에, 그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느꼈다.

눈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웃었다.

“전 앞으로 어디서 지낼까요, 폐하?”

============================ 작품 후기 ============================

이럴 때를 위해서 집을 한 채 더 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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