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6 뒤집히다 =========================================================================
‘신효진’이 와락 달려들며 안긴다. 한서진은 꼼짝도 못하고 그녀의 포옹을 받아야 했다. 가녀린 몸과 달리 그녀의 힘은 인간을 아득히 초월했다. 평범한 인간인 그가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리온…… 보고 싶었어요.”
흐느낌이 아닌, 감격에 젖은 목소리에 한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먹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효진 씨…….’
지금 분명 리온이라고 자신을 불렀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가 설마 완전히 꿈에 먹혀버린 것인가?
“효진 씨, 정신 차려요. 여기는 레노지안이 아니라 지구입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뭐라고요?”
순간 한서진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몸을 에워쌌다.
‘신효진’이 그제야 그를 놓아주며 뒤로 반 발자국 물러났다. 한서진은 비로소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반가운 듯이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 하지만 그 눈빛에는 깊은 연민이 배어 있었다. 자신이 알던 신효진과는 표정이 다르다.
그 순간 눈동자가 타오를 듯이 뜨거워졌다. 통찰안이 그의 의지를 벗어나 제멋대로 발동했다.
열기가 머리를 뒤덮으며, 시야가 일그러진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주위의 모든 풍경이 갖고 있는 진실이 제한 없는 정보로 변해 그의 각막을 폭격했다. 신경을 강제로 비틀며 뇌를 침투했다.
타인에 의해 강제로 눈이 뜨인 듯한 기분이다. 그 고통 속에서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적합.」
신효진, 그녀의 진실 위로 덧칠되는 또 하나의 진실이.
「반려.」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스위치가 꺼지듯, 눈을 침윤했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일그러진 시야도 정상으로 복귀하며,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반려…….’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한서진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녀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는 덤덤히 가라앉은, 단단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것은 전투와 명예, 그리고 긍지를 아는 여기사의 것이었다. 자신이 알던 신효진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스칼린?”
그는 아니길 기도했다. 그녀가 부정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강한 눈빛으로 직시하며, 느리지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한서진은 몇 걸음 더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신효진, 아니 조금 전까지 신효진이었던 그녀는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배려해서일까.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상상을 아득히 벗어난 현실에 머릿속이 그저 새하얗게 변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많이 놀랐죠. 이해해요.”
스칼린은 다 안다는 듯이 처연히 웃어 보였다. 짧은 한 마디, 그리고 수척한 표정. 한서진은 그녀의 존재감이 신효진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확실하다.
눈앞의 여자는 신효진이 아닌, 스칼린 왕비다.
“리미트리스 드림을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저는 오랫동안 ‘갇혀’ 있었어요. 잠들어 있었죠.”
“…….”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어요. 세상이 어떻게 변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죠. 아나요? 그저 당신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고,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제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지 않는 괴로움을?”
어두운 예감이 쉬지 않고 밀려들어온다.
그녀는 자신이 봤던 스칼린 왕비가 아니었다. 그리고 신효진이 겪었던 스칼린 왕비도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자신도, 신효진도 알지 못하는…….
“수백, 아니 수천 번 넘게 외쳤어요. 나를 꺼내달라고, 당신에게 내 목소리가 닿게 해달라고.”
스칼린 왕비의 얼굴이 조금씩 격정으로 물들어갔다.
“그런데 환생한 저는 바보같이 그저 옛 꿈의 기억에 취해 안락하기만 했어요. 행복에 안주했죠. 결국 언젠가는 끝나버릴 추억일 뿐인데.”
“…….”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그녀가 허리를 펴고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은 싱그러울 만큼 예뻤으며, 또한 강인했다.
“나약한 저의 환생은 자기가 원하는 꿈의 세계로 스스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이제 제가 나왔죠. 리온, 우리 ‘모두는’ 이제 다시 행복해질 수 있어요.”
“우리…… 모두?”
“그래요, 우리 모두.”
그녀는 다시금 다가왔다. 느릿한 접근, 하지만 한서진은 꼼짝할 생각도 못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조용히 그를 감싸 안았다. 포근한 체온이 전해진다.
“이제 레노지안은 다시 부활할 수 있어요.”
한바탕 큰 폭풍이 머리와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파괴력이 남긴 폐허에 한서진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충격이 걷히고 혼란이 가라앉자 비로소 그는 냉정하게 생각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신은 레노지안의 멸망을 겪은 스칼린 왕비로군요.”
“맞아요. 그런데 말을 편히 해주면 좋겠어요. 남을 대하는 듯한 그런 표정도 하지 말아줘요.”
“…….”
“리온, 당신도 전부 알고 있잖아요? 당신의 전생에서 저와 부부였다는 것을.”
그녀는 ‘당신의 전생’이라고 했다. ‘우리의 전생’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가 환생이 아닌, 현생의 스칼린 왕비라는 뜻일까?
“저는 레노지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혼인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최후의 성전에서 끝까지 싸웠던 모든 순간을 기억해요. 그것들은 저의 전생이 아니라 현생에 일어났던 일, 그저 과거일 뿐이죠.”
“…….”
“지금 여기에 있는 저는, 레노지안 최후의 성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왕비 스칼린이에요.”
그녀는 스스로를 생존자라 밝힘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웠다.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칼린, 당신은 신효진 씨의 안에서 계속 바깥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봤다고 했죠?”
“네, 그랬어요.”
“그럼 레노지안…… 아니, 태양계 탄생의 진실도 알고 있겠네요?”
스칼린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거칠게 악무는 모습을 보니, 그 오래된 진실이 준 충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우리를 지상으로 추방시킨 신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고…… 모든 것은 태양의 힘을 탐냈다가 멸망할 뻔한 조상들이 경각심을 가지게끔 만들어낸 전설과 와전……. 충격이었죠.”
“…….”
“무엇보다 레노지안, 아니 이 세상이 한 남자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제가 환생체의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들은 게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는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린 채 주먹을 굳세게 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흰 주먹이 바르르 떨리며, 주변에 파동의 흐름이 번져 나간다.
하지만 스칼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미소 지었다.
“이제는 상관없어요.”
“……상관이 없다?”
“그 제독이라는 남자는 우리가 어찌 되든 제재할 마음은 없어 보여요. 그랬다면 오래 전에 이미 우리를 멸망시키거나 제약을 걸었겠죠.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잖아요?”
“…….”
“리온, 그건 우리가 무얼 하든 그 제독이란 남자는 상관치 않겠다는 것 아닐까요?”
무얼 하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레노지안의 부활?”
“맞아요.”
그녀는 기쁘다는 듯이 끄덕이며,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납득하지 못한 표정으로 반발했다.
“레노지안은 오래 전에 이미 멸망했어요. 그런데 무슨 수로 부활시킨단 말입니까? 설마 엘릭서로 그들을 다시 살려내기라도 하자는 건가요?”
“아무리 엘릭서가 지고한 영약이라 해도 뼈가 된 시신을 살려내지는 못해요. 당신도 알잖아요?”
“그럼?”
레노지안의 부활, 한서진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공감하기 어려웠다.
오래 전 레노지안은 멸망했고, 이미 끝났는데. 그 세상은 무덤이 돼버렸는데.
“당신이 남긴 혼의 잔재가 있잖아요?”
“……!”
“그 안에 레노지안의 모든 것이 있잖아요?”
가슴에 차가운 기운이 고인다. 금방이라도 호흡이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직감적으로 이해해버렸기 때문이다.
“설마…….”
“혼만 온전하다면 육신이야 얼마든지 새로이 줄 수 있죠. 당신의 마법이라면 가능하잖아요.”
육신을 새로 준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레노지안의 백성들은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영원한 잠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이제는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죠.”
레노지안의 부활, 그것이 어떤 형태를 뜻하는지 한서진은 깨달았다.
아서의 꿈에 머물러 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몸을 주어 부활시키자는 것이다.
손을 잡은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웠다. 고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왕의 책무를 이행해줘요, 리온.”
“…….”
우두커니 굳어 있던 한서진은 이를 악물고 겨우 입을 열었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그저 백성들의 혼을 가엾이 여겨, 못 다한 행복을 주기 위한 아서의 희생이 아니었나요?”
“리온. 아니, 폐하.”
그녀의 음성이 다소 강경하게 변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건 이해해요. 폐하는 윤회의 굴레를 넘어서 지금의 모습으로 환생했으니까. 하지만 폐하의 혼에 얽힌 고결한 책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폐하는 레노지안의 군주입니다.”
“…….”
“멸망하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 못 다한 행복을 누리게 해주기 위해서라고요? 리미트리스 드림을 시전한 이유가 고작 그게 전부라 생각하세요? 폐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거짓 행복을 주기 위한?”
스칼린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지금 그녀는 전생에 자신의 반려였던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니었다. 왕을 대리하여 대륙을 통치할 자격을 갖춘, 유일한 군주의 그림자. 때론 왕의 실책을 꾸짖고 비난할 수 있는 동반자.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신하였다. 군주의 허물을 냉정하게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춘.
그녀가 처연히 웃었다.
“정말 다 잊어버렸군요. 그렇게 나랑 약속했으면서, 몇 번의 환생을 거치며 모두 내려놓은 건가요? 윤회에 들어간 당신에게는 그렇게 무거운 짐이었나요?”
아련한 슬픔이 그녀의 눈빛에 묻어난다.
지금 그녀는 그의 얼굴을 통해, 오래 전 사랑했던 반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제가 희생하고, 폐하가 받아들인 리미트리스 드림……. 그것의 진정한 목적은 도피가 아니에요. 모든 것을 동결하고 묶어두는 데 있지 않았어요.”
“…….”
“단지 현재의 시간을 묶어두는 게 아니라, 후대에 미래를 전하는 것. 다시 한 번 레노지안의 번영을 씨 뿌리기 위한 오랜 인내…… 그것이 우리가 희생했던 이유예요.”
부활의 그날을 위해 백성들의 혼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한 성소, 그것이 바로 리미트리스 드림이 만든 아름다운 세상.
“절망의 끝에서 그저 버티려 한 게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싹틔우기 위한 희망입니다, 폐하.”
============================ 작품 후기 ============================
조강지처가 최강의 빌런이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