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5 뒤집히다 =========================================================================
신효진은 고해성사를 하듯, 덤덤하게 모든 것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죄책감, 안타까움, 자책감, 그러면서도 놓지 못하는 미련과 욕심이 한데 섞여 있었다.
다 듣고 난 뒤 한서진은 조용히 말했다.
“이해합니다, 효진 씨.”
“……정말요?”
“효진 씨에게는 그곳이 이상향이잖아요. 저라도 그쪽에 더 애착이 갔을 겁니다.”
너무 쉽게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서진은 얼른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상……. 흔들리지 않을 수 없잖아요.”
“하지만 이미 끝난 허상이죠.”
“허상이기 때문에 더 빠져드는 겁니다. 내가 꿈을 꾼다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효진 씨도 짐작하시겠지만…….”
“알아요.”
신효진은 씁쓸히 웃었다.
“리미트리스 드림이 제게 옮겨온 것 같아요. 리온…… 아니, 아서 왕이 보였던 증세와 똑같죠.”
아서 왕은 한서진으로 지내는 동안 자신이 아서 왕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한서진으로 보내는 시간들을 그저 꿈이라고만 인식했다.
신효진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진짜 현실의 자신이 누군지 꿈속에서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대로 꿈에 먹히는 것은 아니겠지?’
한서진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내뱉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조사를 해봅시다.”
한서진은 곧바로 정밀 스캔 작업에 들어갔다. 타르타로스 3의 가용한 시스템 자원을 모두 동원하여, 신효진의 내부에 자리한 에테르 흐름을 샅샅이 뒤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상부 맨틀 아래에 있는 레노지안 대륙도 조사했다.
그러나 특별한 수확은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신효진도, 레노지안도, 별달리 특별한 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결과는 깨끗했다.
수치만 놓고 보자면 신효진이 혼자 긴 악몽을 꾸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리미트리스 드림……. 이렇게 대단한 축복이었나.’
한서진은 작게 신음했다.
과연 스칼린 왕비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서 구현한 축복의 주문다웠다. 그 한계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한서진과 타르타로스 3의 힘으로는 미약한 단서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하나 씨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요?”
문득 신효진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흰 옷을 입고 온몸에 센서를 부착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 씨는 절 평범한 여자로 알고 있잖아요. 사실 박사님과 제가 이렇게 연구실에서 뭔가를 할 사이는 아니죠. 하나 씨도 여자인데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하나는 저를 믿고 있어요.”
“박사님은 왜 하나 씨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나요?”
무엇을 묻는 건지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서진은 그녀의 눈빛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나가 레노지안이나 태양의 비밀, 그런 복잡한 문제에 휘말리는 게 싫거든요.”
“…….”
“우리 하나는 그냥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맘 편한 세상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신효진은 씁쓸히 웃었다.
둘만의 비밀, 그 사실에서 자신은 아직도 설렘을 느낀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두근거림이 없다는 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나 씨가 부러워요. 박사님처럼 아껴주는 가족이 있잖아요.”
“효진 씨도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런 가족들이 있어요. 꿈속이지만.”
“…….”
“이상하죠? 꿈에서 저 자신을 잊는 게 무서우면서도, 그래도 꿈속의 제 가족들이 보고 싶어요.”
그녀의 뇌파가 변하기 시작했다. 수면을 준비하고 있는 파동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서진은 즉시 각성제를 투여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수면을 방해하는 모든 종류의 약물에 거부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다.
“……졸려요.”
“효진 씨, 참으세요.”
“지금 잠이 들면…… 몇 개월 뒤에나 다시 박사님을 볼 수 있겠네요.”
그녀의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진다. 주변을 감싼 풍경 위로 서서히 암막이 내려앉는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스칼린 왕비는 왕궁 중앙 정원에 난 가로수길을 걷고 있었다. 꽃향기를 머금은 산들바람이 날아와 기분 좋게 몸을 쓰다듬는다.
잠시 멈춰 선 그녀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사들을 태운 다섯 마리의 용들이 질서정연하게 편대를 이루어 비행을 하고 있었다. 아마 훈련 중인가 보다.
저쪽에서부터 시녀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왕비 전하, 왕자님께서 왕비 전하를 애타게 찾으시옵니다.”
“우리 왕자가? 알겠다. 어서 가자.”
스칼린은 산책을 멈추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이제 조금씩 걷기 시작한 어린 왕자는 그녀를 발견하자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아장아장 다가왔다. 그러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지만, 울지 않고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선다.
그 기특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스칼린은 무릎을 숙여 왕자를 품에 안아들었다.
“엄마, 엄마.”
“어마마마라고 하셔야 합니다, 왕자 전하.”
옆에서 시녀장이 나지막하게 말했지만, 왕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스칼린 역시 웃음으로 넘어갔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 그렇게 격식에 구애받을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하오나 왕실의 법도란 근엄한 것입니다, 왕비 전하.”
“조금 더 나이가 찰 때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렇지, 아들?”
“엄마. 심심해. 놀아 줘.”
시녀들 사이에서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오지만, 왕비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더는 제지할 수가 없었다.
스칼린은 어린 왕자를 품에 안은 채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체온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모든 게 행복하다.
정원의 중심에 있는 커다란 분수대 앞에 그녀는 잠시 멈췄다. 대리석에 앉아 왕자를 품에 안은 채 시원하게 솟구치는 물줄기를 구경했다.
문득 그녀는 바닥에 고인 물을 내려다봤다.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투명한 수면 위로 왕자를 안은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스칼린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기이하게도 그 모습이 자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물에 비치던 자신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가 당황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본 순간, 사라졌던 자신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전까지 비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부서진 갑주를 입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여자. 거대한 대검을 손에 쥐고 있는 여기사.
그건 자신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수면에서 시선을 뗐다. 급히 자신의 모습을 살폈지만, 변한 것 없이 그대로다. 화려한 왕비의 드레스를 입고 품에는 어린 왕자가 손가락을 물며 잠들어 있다.
부서진 갑주와 온몸에 묻은 피, 대검을 쥔 채 지쳐 보이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야?’
그녀는 다시 조심스레 수면을 살폈다. 그리고 흡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 전 보았던 피투성이가 된 자신이 이쪽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수면이라는 장벽을 세워둔 채, 반대쪽 차원에서 또 다른 자신이 이쪽을 주시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녀는 홀린 듯이, 수면 아래 가라앉은 또 다른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또 다른 자신도 그에 응하듯이 손을 내민다.
그녀의 손이 수면 아래로 침윤했지만,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물속에 잠긴 그녀의 손 위로 또 다른 자신이 손을 얹으며, 차가운 느낌이 포개진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 또 다른 자신이 힘없이 미소 짓는다.
그것은 사악함이나 불결함과는 거리가 먼, 무거운 사명을 진 사람만이 질 수 있는 고결한 웃음이었다.
신효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
그녀는 멍하니 어둠 속을 주시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다.
1년? 그 정도쯤은 된 것 같다.
잠시 후 한서진이 급히 달려왔다.
“효진 씨, 일어났어요?”
“…….”
신효진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를 중심으로 이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선명한 진짜인데, 마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몽환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효진 씨?”
그가 다시 조심스럽게 부른다.
신효진은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온이 왜 저런 옷을 입고 있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가, 그녀는 비로소 기억해냈다.
아, 나 지금은 신효진이지. 스칼린이 아니지.
그럼 우리 사랑스러운 왕자는? 이곳에는 없는 거야?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왈칵 눈물이 솟을 뻔했다. 그녀는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그건 다 꿈일 뿐이야. 지금이 현실이고, 진짜야.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필사적으로 다독거렸다.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한서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는 얼마 만인가요?”
“……1년. 아니, 모르겠어요. 그보다 조금 더 됐나…….”
자그마치 1년이다.
몇 개월에 하루씩 경험하던 현실을 이제는 무려 1년 만에 맞이했다. 현실의 기억, 정체성이 흐릿할 수밖에 없다.
한서진은 옅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잠깐만 쉬고 있어요.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는 안 될 것 같네요.”
“……네.”
신효진은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스칼린으로 살았다. 자신이 누군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지금 일어났다.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한서진이 자리를 비켜주고 신효진은 혼자 남았다.
조금 전 그가 켜준 LED등이 어둠을 몰아내주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직 암흑이 걷히지 않았다.
“…….”
그녀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품을 내려다보았다. 두 팔을 들어 무언가를 안아 올리는 시늉을 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사랑스러운 어린 왕자.
아, 나 지금 신효진이지. 참나, 왜 이러지, 나?
의식은 또렷하지만, 머릿속이 혼탁하다. 모순인 건 알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스칼린인가, 신효진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레노지안인가, 지구인가?
나는 누구이고 싶은가. 그리고 어디에 있고 싶은가.
마음속을 끝없이 반복하는 질문, 그 혼란 속에서 신효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침대 위를 내려왔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문득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커다란 창문을 보았다. 투명한 창 너머의 어둠 위로 아침 태양이 찬란히 솟구치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을 남겨두고 서서,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주시했다.
유리에 비친 자신이 태양을 등에 진 채 이쪽을 쳐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아냐. 저건…….”
그녀는 비틀거리며 신음했다. 어느새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뒤바뀌어 있었다.
피투성이 부서진 갑주를 입고, 대검을 바닥에 늘어뜨리듯이 간신히 쥐고 있는 여기사.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운명에 부딪쳐 부서진 여자, 그녀가 이쪽을 향해 똑바로 손을 내밀었다.
신효진은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창 너머로 그녀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두 여자가 손을 맞잡는 순간, 눈부신 광채가 방안을 휩쓸었다.
‘신효진’은 우두커니 선 채, 자신의 두 손과 몸을 살피듯이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한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효진 씨? 몸은 괜찮…….”
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 그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