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2 미싱 링크 =========================================================================
틀림없다.
저 먼 곳에서 두 개의 에테르 스톰 반응이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느꼈던 반응과 완벽하게 같다.
‘원래 에테르 스톰이 이렇게 자주 생겨?’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것들을 가만히 놔두면 이 주변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터진다.
왕비 ‘스칼린’으로서 죄 없는 백성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서둘러 제일 가까운 에테르 스톰을 향해 다시 한 번 질주했다.
그녀는 물 위를 가볍게 밟듯이 차면서 빠르게 뛰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전투기가 수면 위를 스치듯이 비행하는 것처럼 빨랐고, 폭력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시속 수백km가 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수면 위를 질주한 그녀는 바다 한가운데 생성 중인 에테르 스톰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방향을 바꿔, 다른 에테르 스톰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달리는 내내 그녀는 손에 쥔 에테르 스톰의 씨앗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퍼석!
쏟아지는 마력을 견디지 못한 씨앗이 으깨지며 소멸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안에 남은 허전한 감촉을 털어버리려는 순간, 또다시 기괴한 환청이 그녀의 청각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뭘 잘못했지? 우리의 왕이 뭘 잘못했지?
―살려줘요! 내 몸이 불타고 있어!
―신이여, 죽어서도 영원히 당신을 저주할 것이다!
흐느낌, 고통, 공포, 증오, 간절함, 좌절,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어두운 감정들이 한데 섞인 환청이 그녀의 신경을 무차별로 범람했다.
“허억, 허억, 헉…….”
그녀는 언젠가부터 숨이 가빠졌다. 이상했다. 겨우 이 정도 달리고, 이 정도 힘을 썼다고 지칠 리가 없는데.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니, 그녀는 결국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두 발목이 바닥에 고정된 것처럼 무겁다. 끈적끈적하고 불결한 느낌이 발목을 감싼다.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해수면 위로 뻗은 여러 개의 손, 썩은 살점이 듬성듬성 붙어 있는 손뼈들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괴한 장면에 그녀는 얼어붙어 버렸다.
착각일까?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한 그녀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는 마이애미의 풍경과 자신이 밟고 있던 해수면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무수히 많은 뼈로 이뤄진 무덤을 밟고 있었다.
사람의 뼈를 쌓아 만들어진 뼈의 산, 그 봉분을 구성한 뼈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들을 밟고 있는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 산을 걸었다. 온 사방에는 뼈로 만들어진 산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발목을 붙잡은 뼈의 손들을 강제로 뿌리치고 걸었지만, 그때마다 새로 밟은 뼈의 손이 다시 뻗어 올라 발목을 다시 붙잡았다.
호흡이 경직될 만큼 무서운 풍경이지만, 기이하게도 공포심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끝없이 펼쳐진 뼈의 풍경을 밟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애처로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참고 있지만,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 풍경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들이 어떤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지 알고 있으니까.
―왕비시여…… 저희를 구원해주소서…….
―부디 이 가여운 백성들을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버리지 마소서…….
걸을 때마다 뼈의 손길이 끊임없이 떨어져 나가고, 다시 붙잡고 매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 무수한 미련을 외면했다. 정면을 향해 꼿꼿이 걸었다.
저 먼 곳에 싹을 틔우는 거대한 힘의 흐름이 보인다. 시간을 너무 지체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속도를 내려고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뼈의 손들을 뿌리치고 걷는 것조차 버거웠다.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왕비로서, 죽음의 길에 접어든 백성들의 원혼을 외면한다는 것. 그것은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한 괴로움을 주었다.
마침내 그녀는 힘의 근원, 에테르 스톰에 도달했다.
이미 씨앗이 만개한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할 힘을 축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응집된 힘이 한없이 작아보였다.
그녀는 손을 앞으로 뻗어, 막 만개를 마치고 뻗어나가려는 에테르 스톰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 순간, 주변의 풍경이 한 번 더 변했다.
대륙이 불타고, 모든 생명이 사그라지고 있다. 바로 최후의 성전이 끝난 날이었다.
중상을 입은 왕이 누군가를 끌어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간 그녀는, 왕이 끌어안은 여자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 스칼린 왕비였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왕비가 억지로 미소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생명이 꺼져가는 손길로 간신히 왕의 뺨을 감싼다.
“울지 말아요. 이것이 끝이 아니니까.”
“스칼린! 죽지 마시오! 제발! 제발!”
“우리를 가둔 하늘 감옥…… 그 너머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입가에는 오히려 희미한 웃음마저 깃들었다.
“당신의 안에 저의 영혼은 담길 수 없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스스로의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쳐, 그녀는 최후의 축복을 준비했다.
“당신과 백성. 그들의 혼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다시 한 번 레노지안을 재건할 수 있을 거예요. 그 희망에 저의 남은 모든 것을 걸어요.”
한계를 넘어서까지 과잉된 에테르 스톰이 대륙의 모든 것을 살라먹는다. 왕조차 그 거대한 힘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파괴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과 동시에, 왕비의 영혼에서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와 맞부딪쳤다.
서로 다른 빛이 부딪치고 남은 것은 새하얀 암흑.
그 사각이 걷히고 난 후, 모든 살점은 재로 변해 있었다. 새하얀 백골만이 온 세상에 가득했다.
왕은 뼈의 왕좌에 앉은 채, 고독한 꿈을 시작했다.
모든 백성들의 혼을 모아 담고, 그들이 미처 누리지 못한 아름다운 시간을 선사했다.
그 환상의 공간에 왕비는 없었다. 그 축복은 그녀가 자기 자신을 바쳐서 빚어낸 것이었으니.
스칼린, 신효진, 아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여자의 뺨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미트리스 드림, 그 무한한 환상에서 오로지 하나의 영혼만이 허락받지 못하고 윤회의 굴레로 들어갔다.
뼈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린다.
스칼린은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낡고 헤진 로브를 뒤집어쓴 백골이 눈앞에 서 있었다. 백골의 눈높이는 그녀보다 아주 조금 높았다.
―바로 그 축복을 빚어낸 너의 영혼만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었지.
스칼린의 뺨을 타고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비록 혼조차 백골이 되어버린 아버지지만, 그가 품은 오랜 아픔이 고스란히 밀려들어왔다.
대마도사의 백골은 아련한 눈으로 뼈의 왕좌에 앉은 왕을 주시했다.
―그러나 억겁의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나니, 시간이 흐를수록 폐하의 꿈은 약해지고 있다.
그녀가 말을 받았다.
‘리온이 자기가 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다시 백골이 말을 받았다.
―꿈의 힘은 점점 약해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레노지안의 영혼들이 유실된다.
리미트리스 드림은 아서의 영혼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아서가 그 곳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꿈은 약화되고 백성들의 영혼을 잃고 만다.
―알고 있느냐? 유실된 영혼은 윤회의 굴레에 들어가, 지상에서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
아버지이자 대마도사이자 충신이며, 이제는 축복의 수호자인 백골. 그의 기억과 마음이 전이됨에 따라, 스칼린은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언젠가 레노지안의 모두는 구원받겠군요.’
유실된 영혼은 지상으로 올라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 생명의 순환계로 다시 한 번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리미트리스 드림의 축복 속에 머무르는 것은 그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 오로지 한 명만을 제외하고.
‘그러나 리온만큼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겠지요.’
―폐하가 품은 모든 영혼이 순환의 기회를 얻으면, 폐하께서도 진정한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그건 영원한 죽음이나 다름없잖아요!’
―그것이 폐하가 군주로서 짊어져야 할 최후의 사명이다.
타르온도, 근위단장도, 아서를 흠모하던 여백작도, 왕족의 옷을 짓던 시녀들도, 곡식을 길러 바치던 농부도, 소와 양을 길러 고기를 팔던 목동도, 모두 차례차례 윤회의 순번을 받는다.
하지만 아서는 그 흐름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다.
모든 것이 끝나도, 그는 리미트리스 드림에 홀로 갇혀 있을 것이다.
이 우주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창세를 맞이하기 전까지 영원히 그렇게.
눈물을 쏟으며, 그녀는 까마득한 오래 전 자신이 품은 마지막 희망을 토해냈다.
‘내가, 내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리온이 언젠가 다시 한 번 레노지안을 재건해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길 바랄 뿐이었는데……!’
―영광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모든 것은 끝났다.
백골은 지팡이를 바닥에 강하게 내리치며, 엄숙히 말했다.
―돌아가서 너의 삶을 누리거라. 그곳에 모든 것이 있지 않느냐. 너의 오랜 반려마저도…….
빛이 사그라지며, 모든 풍경이 변했다.
신효진은 자신이 해변에 무릎을 꿇고 있음을 깨달았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외딴 백사장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참을 수 없는 오열이 목청을 비집고 나오려 한다. 틀어막으면 틀어막을수록 더욱 몸부림치며 내보내달라고 절규한다.
입을 막은 채, 그녀는 눈물을 쏟았다.
알고 있다. 아서의 영혼 또한 오래 전에 윤회의 굴레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러나 한서진은 아서의 환생일 뿐, 아서가 아니다.
레노지안의 모든 존재가 사랑한 군주 아서, 그 진정한 정체성은 뼈의 무덤에서 꿈을 유지하고 있는 사념이지 않은가.
스스로를 아서라 믿으며 그 정체성을 품고 있는 사념만이 오롯이 아서인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어느 존재도 군주 아서가 될 수는 없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진정한 아서’는 그 고독에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꿈속에서 백성들의 혼을 품고 있다가, 마지막에는 그 안에 홀로 남아 우주의 최후까지 고독 위에 서 있을 것이다.
그 예정된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졸려…….”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중얼거려 보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힘들었다.
그녀는 힘들게 주머니를 뒤졌다. 스마트폰이 잡힌다. 완벽한 방수 기능을 자랑하는 녀석은, 에테르 스톰의 지척까지 진입했음에도 무사했다.
“와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
통화 너머 상대방에게 겨우 그 말을 전한 뒤,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