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0 미싱 링크 =========================================================================
―테러범이 핵배낭을 짊어지고 웜홀을 통과해서 미국 본토에 밀항했다.
―출입국사무소의 감시? 사람이 하는 일은 결국 사람이 뚫을 수 있다. 세상에 0%라는 것은 없다.
―웜홀 밖에서 생화학 무기를 터트리면 그것이 웜홀을 타고 들어와서 미국 전역에 퍼질 수도 있지 않나?
―비단 테러가 아니라 전염병도 마찬가지다. 웜홀은 비행기나 선박과 달리 즉각적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웜홀에 대한 우려를 담은 칼럼이 주요 신문사의 논조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석유업계와 유통업계가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처음 칼을 빼든 것은 석유업계였다. 유통, 운송업계는 첫 발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웜홀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마자 재빨리 손을 거들고 나섰다. 그들은 눈치가 빨랐고, 이런 시국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웜홀은 영웅인 한서진이 미국과 전 세계, 그리고 인류에 선물한 위대한 업적이다. 그들은 감히 그 성배를 부술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그저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약간의 시간벌이, 딱 그 정도였다.
“애처롭기까지 하네요.”
한서진은 크리스를 불러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다.
크리스는 그다지 유쾌해 보이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크게 분노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문물은 기존의 경제질서를 변화시킵니다. 자동차의 보급은 마차 산업을 붕괴시켰고, 석탄업자들은 석유에 밀려 도산했지요. 웜홀망으로 인해 석유업체와 유통, 운송업계가 타격을 입는 변화 역시 어쩔 수 없는 흐름입니다.”
“그들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물론 그렇다고 정보 조작을 한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역정보 조작에 직접 가담한 자들만큼은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겠지요.”
크리스의 단호한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한서진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크리스도 알다시피, 방사능이나 바이러스, 세균 등의 위험 물질은 웜홀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체내에 잠복한 세균과 바이러스는 어쩌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그건 맞아요. 사람의 체내까지 관여할 수는 없어서 필터링 시스템에서 그건 뺐습니다.”
“필터링은 웜홀의 자체적인 성질이 아니라 박사님께서 따로 부여하신 기능이겠지요?”
“맞습니다. 하늘의 눈동자를 응용한 겁니다.”
“과연…… 하늘의 눈동자는 대체 한 번에 몇 가지 일을 하는 걸까요. 대단합니다.”
크리스는 감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늘의 눈동자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핵물질의 급격한 분열 반응을 막고, 웜홀을 통과하는 바이러스나 세균, 위험 물질을 차단한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는 사멸하고 우라늄은 납이 되어버린다.
여기에 살인 등의 강력범죄를 시도하는 자들을 제압하여 범죄가 일어나는 것을 차단한다.
얼마나 방대하고 정교한 감시의 그물을 펼쳐야 이런 일이 가능할지, 크리스는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눈앞의 청년은 가히 신이라고 추앙해도 될 만한 일을 해냈다.
“아무래도 필터링 기능에 관해서 발표하는 게 낫겠습니다. 미스터 크리스가 그 발표를 맡아주세요.”
“제가 합니까? 박사님이 직접 하시는 게 더 파급 효과가 클 텐데요.”
“미스터 크리스는 SJ게이트의 회장이자 전직 미 대통령입니다. 충분히 무게감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듣기 좋은 말에 크리스는 살짝 웃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악역을 맡지요.”
“악역이라니, 그런…….”
“적어도 웜홀로 당장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악당이 되는 거 아닙니까.”
SJ게이트는 기자회견을 가지기 전, 먼저 언론을 통해 적당한 정보를 퍼트렸다. 사전 분위기를 다지는 작업이었다.
―테러범의 핵 반입은 오보, 웜홀을 저지하고자 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최후의 발악.
―미국이 그 정도의 대비도 하지 않은 채 웜홀망 구축을 시도했을까?
―웜홀로 손해 보는 일부, 이득 보는 다수. 과연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일부의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미래로 이르는 위대한 길을 포기해야 하나?
웜홀을 이용한 테러 가능성에 많은 시민들이 불안에 떨었지만, SJ게이트는 언론 보도를 통해 누군가의 음모가 개입됐을 가능성을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크리스는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열었다.
“웜홀은 세상에 공개할 수 없는 많은 비밀이 집약되어 있는 과학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근래 웜홀을 이용한 핵, 생화학 테러 가능성에 관해서 많은 우려가 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공개하려고 합니다.”
넓은 홀에 조금도 빈틈이 없이 들어찬 기자들이 숨을 죽여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수백 대가 넘는 카메라는 지금 이 순간을 생생하게 전 세계에 내보내고 있을 것이다.
미합중국 대통령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을 넘어서는 주목을 지금 한 몸에 받고 있다.
크리스는 이런 중요한 순간에서 부담은커녕, 오히려 자신이 살아있다는 짜릿함을 느끼는 남자였다.
“웜홀은 그런 테러를 막기 위한 몇 가지 방어 조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필터링 기능이라 부르며, 쉽게 말하자면 핵물질과 위험한 세균,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은 웜홀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통과하는 과정에서 사멸하거나 위험하지 않은 물질로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 초에도 플래시가 수십 번을 넘게 터졌다.
“물론 사람의 체내에 있는 세균과 바이러스까지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지구 반대편에서 웜홀을 이용한 핵과 생화학 테러가 벌어질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간단히 발표를 마치고, 크리스는 당당하게 단상을 내려왔다.
그 뒤로 올라온 그룹 대변인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을 대신 받았다.
매스컴은 하루 종일 웜홀의 안정함에 대해 떠들어댔고, 테러의 위협을 느꼈던 시민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근데 석유업계는 어떻게 손을 대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쨌거나 박사님께 괘씸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굶어죽기 두려운 자들이 발악을 한 건데, 너무 강하게 나가는 것도 좋지 않아요. 그냥 제가 값을 잘 쳐서 매입을 하려고 합니다. 한 번 견적을 내보고 협상을 해주세요.”
“매입을 하신다면, 어느 회사를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일단 미국 석유기업은 전부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진행해 주세요.”
김범석은 에스코너와 SJ인더스트리, 그리고 SJ엔터테인먼트가 보유 중인 현금이 얼마나 되는지 순간 고민에 잠겼다.
초룡 타르온은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송하나와 놀랍도록 똑같았다. 심지어는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분위기마저 같았다.
스칼린은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응했다.
처음에 그녀는 여자로서 두려운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다. 송하나는 한서진의 반려였고, 타르온이 리온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불안한 기분이 솟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타르온은 달랐다.
“이 모습은 인간의 거주지에서 편히 지내기 위해 임시로 취한 모습일 뿐이다. 본체의 모습으로 침대에서 잠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왜 항상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거냐고 슬쩍 물었을 때, 타르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이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타르온, 그렇지만 그렇게 아름다운데…….”
“유리한 선택을 했을 뿐, 나는 이 상태가 좋지 않다. 본체의 모습으로 둥지에 편히 웅크려 있는 게 좋다. 날개를 자유롭게 펴고 비행하는 게 좋다.”
다행스럽게도 타르온은 ‘여성’으로서의 성적 정체성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리온을 이성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리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르온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자주 칭찬하곤 했지만, 그것은 잘 만들어진 예술품을 대하는 듯한 감상이었다.
그에게 타르온은 초룡이자 전우일 뿐이었다. 둘의 마음을 확인하자 스칼린은 안심할 수 있었다.
셋이 함께 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타르온은 초룡의 모습으로 둘을 태우고 전설의 마수를 사냥하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뜨거운 용암 숨결로 거대한 마수를 단숨에 녹이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멋지단 칭찬을 들으면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으쓱거렸다.
타르온과의 추억, 그것은 스칼린이 전에 꾸었던 꿈에는 없던 내용이었다.
그리고 전의 꿈과는 다른 변화가 생겼다.
“…….”
잠에서 깬 신효진은 멍한 눈으로 깜박거렸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왜냐면 4개월이나 되는 시간 동안 레노지안에 머물러 있다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아, 현실이구나. 이번엔 4개월 만이네.”
전에 꾸던 꿈에서는 스칼린이 잠이 들면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간혹 좀 더 오래 머무르기도 했지만, 그게 하루가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즉 그녀가 체감하기로 하루의 절반은 스칼린, 나머지 절반은 신효진으로 지냈었다. 그래서 신효진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스칼린으로 보내는 시간은 그저 신기하고 재밌는 꿈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달랐다.
다시 꾸기 시작한 꿈은 어느 순간부터 꿈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현실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틀, 사흘, 나흘, 닷새. 그러다가 일주일을 넘어가고, 다시 한 달이 넘었다.
신효진으로 보내는 시간, 하루.
스칼린으로 보내는 시간, 한 달.
그것이 쳇바퀴처럼 반복될 때마다, 스칼린은 점점 신효진의 삶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한 달 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한 달 전의 기억을 다시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게 얼마나 큰 혼란을 주겠는가?
시간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고 있었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다시 세 달이 되었다가, 이번에는 무려 네 달 만에 신효진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신효진이 스칼린의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스칼린이 몇 달에 한 번씩 잠깐 신효진이 되는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내가 4개월 전에…… 아니, 어제 뭐 했더라? 그리고 오늘은 뭘 하려고 했었지?”
신효진은 스마트폰을 꺼내 일기를 확인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매일 일기를 쓴다. 신효진의 삶을 하루하루 기록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효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제대로 이을 수 없었으니까.
“아, 쇼핑하기로 했구나.”
그녀는 4개월 전 잠들기 전에 기록한 ‘내일 계획’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일지에는 죄다 쇼핑뿐이다.
그래야 기억이 헷갈리지 않고 편했으니까 그랬던 것 같다.
신효진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블라인드를 어떻게 올리는지 기억이 안 나서 잠시 헤맸다가, 침대 옆에 있는 터치패드를 작용시켜 오픈 버튼을 눌렀다.
전자식 블라인드가 위로 올라가며, 눈부신 햇살이 침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신효진은 마치 지금 잠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