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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61화 (561/609)

00561  보스가 되다  =========================================================================

“그런 조직이 있었나?”

어느 날 저녁, 모처럼 가진 가족 모임에서 Table A 이야기를 들은 백철중은 크게 호기심을 보였다.

“네, 2차 대전 때 설립돼서 지금의 미국을 만든 기관이죠. 미국 대통령 중에는 재임 기간 동안 Table A가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대단해.”

백철중은 껄껄 웃으며 놀라워했고, 송지현은 신기하다는 듯이 손뼉을 가볍게 쳤다.

“한 박사 말을 듣다 보면 참 신기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

“한 박사가 역사 그 자체지, 암.”

백철중은 술을 한 잔 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힘들지 않을까? 그런 큰 조직이라면 아무래도 관리하는데 심력이 많이 딸릴 텐데.”

“어차피 제가 하는 연구와 상당수 겹쳐서 지금까지 해온 일과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그 외 조직 관리는 니트론 교수님에게 맡기기로 했고요.”

“니트론 교수? 스탠포드 출신 그 분 말하는 건가?”

스탠포드 종신 교수 자치를 박차고 나와 한서진에게 투신한 유명 과학자. 당연히 백철중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네, 원래 니트론 교수님이 Table A의 최고 보스였습니다.”

“허, 그런 비화가 있었다니.”

“Table A의 최고 위원 중에는 카를린 로스차일드라고, 로스차일드 가문 출신 나사 연구원도 있습니다.”

위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듣고 난 백철중은 혀를 내둘렀다. 한 명 한 명이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세계적인 유명 기업이나 조직의 중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그런 것까지 우리에게 말해줘도 되나?”

“아, 상관없습니다. 더 이상 미국의 특별기관이 아니니까요. 그냥 일반 연구조직과 똑같이 취급할 생각입니다.”

한서진이 Table A를 인수한 것은 그 조직력이 사장되는 것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수십 년 간 비밀연구기관으로서 존속해온 그 생명력, Table A를 하나의 기업이나 연구소로 본다면 전혀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나저나 국내 기업 지분 확보는 얼마나 했나?”

“100대 기업 기준으로 40%를 넘겼어요. 그 밖의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사들이고 있지는 않아요. 재계 영향력이 미미한 기업들이니까요.”

송하나가 대신 대답하자 백철중은 천천히 끄덕였다.

“돈이 많이 들었겠구나.”

“오빠한테 돈은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지. 그나저나 100대 기업 지분의 40%라…… 말 한 마디로 국내 기업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어.”

“안 그래도 이미 10대 기업은 진성 빼고 경영진 전부 교체했어요.”

H컨설턴트는 최근 진성을 제외한 10대 대기업의 경영진을 전부 오너 일가와 상관없는 전문가들로 교체했다. 덕분에 ‘재벌’이란 단어 자체가 가진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다.

기업과 경제를 쥐고 있어야 재벌인데,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0대 기업 오너 일가들은 지분의 일부를 쥐고 있는 자산가로 전락해버렸다.

지금 한국에서는 백철중과 한서진, 이 둘만이 재벌이라 불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인건비 지출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래서는 기업이 못 버틸 텐데.”

“수익 창출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 증대가 우선 목적이니까요. 돈은 에스코너가 벌어오잖아요.”

“아기는 좀 어때?”

송지현이 끼어 들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주 건강해.”

“입덧은 심하지 않고?”

“그런 거 모르겠던데. 엄마, 나 가졌을 때 진짜 입덧 심했던 거 맞아?”

“이상하네. 날 닮았으면 입덧이 엄청 심해야 하는데……. 난 그때 물만 먹어도 토할 것 같았어.”

“난 전혀 모르겠던데.”

“아, 맞다. 아들이냐, 딸이냐?”

“딸이에요.”

“하나 널 닮아야 할 텐데.”

“그런 말씀하시면 오빠 상처받아요. 오빠도 얼마나 잘생겼는데.”

“아, 그야 한 박사도 잘생기긴 했지만…….”

“하나하곤 비교가 안 되죠. 딸은 당연히 하나를 닮아야 합니다.”

한서진도 주저없이 긍정하고 나섰다. 백철중의 말이 서운하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딸이 엄마를 닮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우리 하나도 지 엄마 닮았으니까 그 딸도 똑같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나저나 하나 닮은 자네 딸이면…… 이거 시집이나 제대로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송하나를 닮은 한서진의 딸.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존재할 수 없는 상상 속의 여성 아닌가. 지구상의 누구를 데려와도 신랑감으로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뭐, 어딘가에 자기 짝이 있겠죠. 벌써부터 그런 걱정은 안 하렵니다.”

“생각해둔 이름은 있나? 없으면 내가…….”

“우리가 알아서 지을 거예요. 우리 딸이니까 우리가 지어주고 싶어요.”

송하나가 얼른 나서자 백철중은 조금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들 딸이니까 너희들이 이름 짓는 게 맞겠지. 예쁜 이름으로 지어주거라.”

가족 모임을 마치고, 한서진과 송하나는 리무진에 올라서 집으로 향했다. 손을 잡은 채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송하나가 문득 물었다.

“효진 씨는 잘 지낸대요?”

“응?”

한서진은 조금 당황했다가, 이내 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너한테 연락 안 왔어?”

“전 안 왔는데. 오빠한테는 안 왔어요?”

“나도 연락을 못 받았어. 지금 시드니에 있는 것 같던데.”

“별장 투어 중인가 보네요. 효진 씨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시선이 마주치자 송하나는 배시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얀 피부에 흑발,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 덕분에 그녀는 인상이 다소 차가워 보인다. 게다가 사람들 앞에서 표정이 풍부하지도 않아, 웬만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범접하지도 못한다.

오죽하면 저 얼굴과 몸매를 가지고도, 학창 시절에 제대로 된 대시 한 번 못 받아봤을까.

하지만 그런 도도한 모습은 남들이 아는 그녀의 모습일 뿐이다. 자신 앞에서는 애교도 많고 활발하며, 가끔은 아이같은 천진함도 보여준다.

다른 남자는 알지 못하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혼자만이 안다는 것,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을 준다.

“오빠, 효진 씨가 오빠 좋아했던 거 알지요?”

“쿨럭! 쿨럭!”

“왜 놀라요? 설마 제가 모르는 줄 알았어요?”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당한 한서진은 폐가 오그라드는 기분을 맛봤다. 아니, 모처럼 기분 좋게 얼굴 감상하고 있는데 이렇게 찔러오다니.

“효진 씨한테 얼마 줬어요?”

“…….”

“괜찮아요. 사실대로 말해줘요. 거짓말하지 말고.”

“그게…….”

“괜찮다니까요.”

한참을 망설이던 한서진은 그녀의 눈빛에 담긴 재촉을 결국 이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100억 AU.”

“그럼 한국돈으로 10조 원 정도?”

“……그 정도 될 거야.”

한서진에게는 별 거 아닌 돈이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입이 떡 벌어지는 거액이다. 그 돈이면 한국 땅에서는 한 손에 꼽히는 최상류층 자산가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와이프라면 누구나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남편이 외간여자에게 엄청난 거액을 안겨준 것이니. 둘 사이가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러나 송하나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꽤 주셨네요. 그 정도면 효진 씨 앞으로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겠어요.”

“…….”

“오빠도 효진 씨한테 정이 많이 있었나 봐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자신과 신효진의 인연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 생에서 떳떳하지 않은 일을 저지른 적은 없건만,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가여워서. 뭔가 효진 씨를 보면 지혜 생각도 나고.”

“여동생 같아요?”

“뭐, 조금.”

“오빠는 만약 나보다 효진 씨를 먼저 만났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

“그래도 저랑 만났을까요?”

한서진은 말문이 막혔다. 순간 그녀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예전에도 여러 번 하던 상상이었다. 만약 자신이 신효진을 먼저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신효진 역시 송하나 못지않은 미모를 지녔고, 전생에서는 부부이기도 했다. 그리고 둘 다 그걸 알고 있지 않은가.

말문이 막힌 것은 잠시, 그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당연히 너랑 만났을 거야.”

“그 말 정말이죠?”

“그럼. 사실 나 처음 장인어른이랑 소주 마셨던 날 널 봤을 때 한눈에 반했었다고. 나중에 고등학생이란 거 알고 얼마나 좌절했는지 알아?”

“죄송해요. 전 솔직히 그때 오빠한테 반하진 않았는데.”

“아, 그건 상처네. 이럴 땐 빈말이라도 처음부터 나 좋아했었다고 말해줘야지.”

한서진은 일부러 가슴 아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서 네가 먼저 나 찾아왔을 때 참 놀랐어.”

“저도 기억나요.”

“와인색 스키니진에 검은 오프숄더 입었잖아. 그때 어깨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거든.”

“아, 그거 일부러 그런 건데.”

“……일부러?”

“네, 오빠 눈이 어디로 향하나 한 번 보려고 일부러 그렇게 입은 거예요.”

한서진은 갑자기 머리 위로 돌이 내려앉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는지 송하나는 실실 웃었다.

“눈 돌리는 모습이 귀여웠어요.”

“나름 합격이었나?”

“그런데 눈 돌리면서 볼 건 다 보셨네요.”

“……그날 우리가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어떻게 안 볼 수가 있나.”

“오빠가 그날 제가 입었던 옷까지 다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전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 얼마나 예뻤는데. 그날 나 네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만약 타임머신 타고 그때로 가면 어떡하실 거예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한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글쎄, 어떡할까? 그냥 확 고백해버려?”

“에이, 그래도 고등학생인데. 미성년자인데.”

“어차피 너 졸업하기 전부터 사귀었잖아.”

“그럼 이왕 고백하는 거 우리 처음 만났을 때로 해요. 그럼 되게 재밌겠다.”

“그랬다가는 장인어른이 소주병으로 머리를 깨버리셨을 수도 있어.”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덧 차는 세연동 저택에 도착했다.

“먼저 올라가 있을래? 나 잠깐 지혜한테 전화 좀 하고.”

“네, 알겠어요.”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말고 송하나는 잠시 멈춰서 돌아섰다.

“오빠.”

“응?”

막 스마트폰을 꺼내던 한서진은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등을 돌렸다.

“효진 씨한테 잘해주는 거 가지고 저한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

“사실 저도 효진 씨 좋아해요. 그래서 잘해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오빠가 그런 걸로 저한테 미안한 마음 안 품어도 돼요.”

“하나야.”

“전 오빠 믿거든요. 앞으로도 효진 씨한테 잘해주세요.”

사람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는 말에, 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큰돈 아니라서 그냥 주신 거잖아요.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지혜 언니랑 전화 짧게 하고 올라오세요.”

“알았어, 금방 갈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한서진은 괜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마누라는 진짜 잘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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