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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58화 (558/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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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버 구축 작업은 꼬박 하룻밤이 걸렸다.

저녁부터 시작한 작업은 거의 다음날 오후가 돼서야 끝이 났다. 그동안 한서진은 단 한숨도 자지 않고, 휴식도 거의 취하지 않은 채 작업에 몰두했다.

보조하던 현장 엔지니어들은 한서진의 꼼꼼함, 그리고 강철 같은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괜히 세계 최고 과학자가 된 게 아니었어.’

‘다른 연구 때문에 평소에도 엄청 바쁘셨을 텐데, 저런 집중력을 보여주실 줄이야…….’

‘그러고 보니 기술자 출신이라고 하셨지?’

한서진은 다른 과학자들하고 달랐다. 보통 성질 더러운 노회한 과학자들은 공학자들을 머슴 취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존대말을 썼다.

설치 작업이 간혹 지연돼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차분하게 지휘를 해나갔다.

연구소에만 틀어박혀 있어 현장일은 서툴 거라 생각했지만 그와는 전혀 반대였다. 그는 현장의 구석구석을 꿰뚫어 보았으며, 적재적소에 알맞은 지시를 내렸다.

덕분에 며칠은 꼬박 걸릴 줄 알았던 초기 설치 작업이 만 하루 조금 못 돼서 끝날 수 있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참, 박 소장님.”

“예, 박사님.”

오십이 다 되어가는 박찬우 연구소장은 한서진이 부르자 마치 이등병처럼 뻣뻣하게 군기가 든 모습을 보였다.

“T2.1을 어떻게 설치하는지는 잘 보셨죠?”

“물론입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눈에 새겨두었습니다.”

박찬우 소장은 물론이고, 참관을 동행한 수석 연구원들도 같은 대답을 했다. 그들은 향후 한서진을 대신해서 서버 증설 지휘 책임을 맡게 될 터였다.

“앞으로는 제가 직접 방문하긴 힘들고, 컴퓨터만 보내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설치에 필요한 모든 사항은 매뉴얼에 있으니 읽어보시고, 혹 궁금한 게 있으면 메일로 문의해주세요. 전화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제 회사인 걸요.”

36구역 건물은 항공모함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드넓었지만, 서버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아직 터무니없이 적었다. 덕분에 조금 훵해 보이기도 했다.

“자, 그럼 시범 가동을 해봅시다.”

한서진은 그들을 이끌로 통제실로 이동해 설치가 완료 된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잠시 후 모든 서버에 불이 들어오며 일제히 보이지 않는 구동음을 토해냈다.

하나하나가 T1을 능가하는 수퍼컴퓨터, 그것들이 무려 수십 기가 합쳐져 구축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향후 얼마든지 무한대로 추가 확장이 가능하다.

“오오!”

연구소장 및 수석연구원들은 모니터에 나타난 가동 수치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가동 수치는 T1의 적어도 백 배 이상의 예상 성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몇 시간에 걸친 세밀한 성능 테스트를 마치고, 한서진은 연구원들을 돌아보며 설명했다.

“앞으로 월드투어VR 서비스 기능은 T2.1로 가져오고, T1은 순수한 컨텐츠 연구개발 용도로만 활용하는 게 효율적일 겁니다. 서비스 제공 과정에 막대한 시스템 자원이 필요한 것이지, 개발 단계에서는 거의 필요가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당분간 증설은 필요 없겠지만, 증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문의만 하세요. 생산하는데는 막상 그렇게 시간이 오래 안 걸립니다.”

“알겠습니다. 경영진이 올해 안에 BII지점을 열 배 이상으로 늘릴 계획을 품고 있던데, 이 정도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습니다.”

한서진은 몇 가지 추가 설명을 마치고 연구소를 나섰다.

방탄리무진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SJ엔터테인먼트 본사와 연구소는 현재 평성 연구단지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초반에는 경기도에서 출범했지만, 평성 종합과학연구단지가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점차적으로 이전을 시작하여 완전히 마친 것이다.

원활한 출퇴근을 위해 간이 웜홀을 설치해놓은 터라 연구원들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차후 종합과학도시가 완성되면 그들도 가족들을 데리고 완전히 이주할 것이다.

“피곤하시겠어요.”

비서 자격으로 따라온 신효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서진은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그녀를 주시했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요.”

“네…….”

“그보다 효진 씨, 요즘은 좀 어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많이 어두웠었는데.”

“제가 그랬어요?”

“그럼요. 그래서 와이프한테 효진 씨 구박하는 거 아니냐고 한소리 듣기도 했어요.”

신효진은 하얗게 웃었다.

전생에 반려였던 남자, 그런 사람에게 맘 편히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신효진이 잠시 후 고개를 들고 당찬 표정으로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한서진은 신효진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다. 자신이 알지 못한 레노지안의 고위 마법 지식을 얻었고, 또 전생과 지구의 탄생에 관한 여러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와 함께 지구 중심에 존재하는 레노지안 땅까지 다녀오지 않았던가.

“일 그만두고 싶어요.”

“…….”

“박사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전혀 뜻밖의 부탁이었기에 한서진은 잠시 멍해졌다.

물론 비서로서 그녀가 받는 월급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초고가 아파트, 비싼 차량 등 월급 외적인 면에서 그녀는 많은 지원을 받았다. 심지어 생활비도 전부 회사에서 부담한다.

그런데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싶다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왜 일을 그만두고 싶으신 건지…….”

“저 사실, 평생 고생만 하면서 살았잖아요.”

“……그랬죠.”

“그래서 이제부터는 좀 놀면서 편히 지내고 싶어서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능력이 없잖아요. 그래서 박사님 도움을 받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의외라서 조금 놀랐습니다.”

한서진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한편으로는 그녀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비단 고달픈 과거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녀와 자신은 까마득한 오래 전 떼어놓을 수 없는 반려였고, 서로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편히 쉬고 싶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지 않을까. 지금 그녀에게는 자신을 마주하는 게 힘들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게 있나요?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더 좋습니다.”

“어떤 식으로요?”

“예를 들어 한 달에 한 번은 해외 여행을 가고 싶다, 전용기를 갖고 싶다, 에르메스 VVIP 패션쇼에 초대받는 삶을 누리고 싶다, 뭐 그런 식으로요. 구체적이면 좋아요.”

“방금 말씀하신 거 다 들어주세요. 들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효진 씨가 지금까지 제게 해준 게 얼마인데, 그 정도도 못 해드리겠습니까.”

빈말이 아니라 한서진은 그녀를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전용기를 타고 명품 브랜드 VVIP 패션쇼에 참가하는 삶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경호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지구상에서 효진 씨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맞아요. 박사님을 빼면 아무도 없죠.”

“하하, 제가 왜 효진 씨에게 위해를 가합니까. 그럴 일은 죽어도 없을 겁니다.”

신효진은 묘한 미소를 짓고, 한동안 그를 주시했다. 그 시선이 주는 야릇함에 한서진은 왠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눈빛을 슬그머니 돌렸다.

이윽고 그녀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 역시 그래요.”

“…….”

“이번 생은 비록 어긋났지만, 진심으로 박사님의 행복을 빌어요. 그래서 떠나려는 거예요.”

“…….”

행복을 빈다, 그래서 떠난다.

그 말이 전해주는 아련함에 한서진은 왠지 목이 메여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신효진이 표정을 바꿔 활기차게 말했다.

“하지만 평생 안 보고 살자는 건 아니니까 염려 마세요. 레노지안이나 다른 문제로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저도 나중에 도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박사님께 부탁할게요. 그래도 되죠?”

“당연하죠.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그냥 편안하게 안부 연락 전해도 되죠? 물론 하나 씨하고도 계속 연락은 할 거예요.”

“얼마든지요.”

“고마워요, ……박사님.”

마지막에 말끝을 흐린 것은, 아마 다른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신효진은 정식으로 퇴사했다.

퇴사하기 전 한서진은 그녀를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원하는 라이프 청사진을 좀 더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듣기 위해서였다.

두어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눈 후, 한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어디에 가든 잘 지내요.”

“네.”

“참, 소개해줄 분이 있어요.”

그가 인터폰을 향해 뭐라고 말하자,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웬 여성이 입장했다. 40대 중반이지만 늘씬하고 이지적인 느낌이 가득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백인이었다.

“인사해요. 미쉘 부인입니다. 미쉘 부인, 이쪽은 저와 제 아내의 절친한 친구인 신효진 씨예요.”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미스 신. 미쉘이라고 편히 불러주세요.”

“신효진입니다만…… 박사님, 이 분은 누구죠?”

신효진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내자 한서진은 차분히 설명했다.

“영국 귀족 사회에서 유명하신 분이에요. 효진 씨를 위해서 제가 어렵게 모셨고요. 앞으로 효진 씨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도와줄 겁니다.”

“아, 그래요?”

“최수한 총집사님 같은 분이라 생각하시면 돼요.”

“아아, 고마워요.”

신효진은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눈웃음을 건넸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미쉘 부인.”

미쉘은 한 번 더 정중히 인사를 마치고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미쉘 부인은 상류층 삶에 대해서 지식이 풍부하고 경험 역시 해박해요. 효진 씨가 원하는 멋진 라이프 청사진을 그리는데 꼭 필요할 겁니다.”

“에르메스 VVIP 패션쇼 참석은 농담이었는데…… 그래도 고맙습니다, 박사님.”

“SJ트러스트라고, 투자관리 회사 하나를 만들었어요. 그 회사에 효진 씨 명의로 투자금을 조금 위탁했습니다. 이미 제 손을 떠난 돈이니 법적으로 효진 씨 소유예요.”

“어머, 정말요?”

“원금을 쓰실 필요는 없고, SJ트러스트가 원금을 운용해서 내는 수익을 평생 생활비로 쓰시면 돼요. 주로 SJ그룹에 얽힌 관련사업에 투자할 거니까 매년 20% 이상의 수익은 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생활비가 모자라 원금에 손을 댈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상상도 못했는데…….”

신효진은 손뼉을 치며 기뻐하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물었다.

“그런데 원금이 어느 정도나 되나요? 아, 이런 질문은 너무 속물적일까요…….”

“100억 AU예요.”

“100억 AU이요? 세상에, 잠시만요. 그럼…….”

“우리나라 돈으로 10조 원 정도 될 것 같네요. AU채권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 가치가 훼손될 일은 전혀 없을 겁니다. 100억 톤의 금 소행성으로 가치를 보장하는 가장 강력한 화폐니까요.”

“10조 원…… 그럼 일 년 생활비가 2조 원…….”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신효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뚫고 겨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생활비 치고는 너무 많은데요?”

============================ 작품 후기 ============================

생활고에 시달리지 말라는 전 남친의 갸륵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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