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56 진입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한서진은 꿈에서 깨어났다.
“허억, 헉…….”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움켜쥐다가,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하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침실 풍경이 눈에 들어오며,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옆에서 슬립 차림으로 곤히 잠든 송하나를 바라보며, 안도감을 내려놓았다.
‘꿈이었구나.’
오랜만에 레노지안의 꿈을 꾸었다. 그것도 썩 좋지 않은.
꿈에서 그는 하늘이 붕괴하는 것을 보았다. 붕괴 된 틈새로 무차별로 쏟아지는 에테르 에너지가 대륙의 모든 생명을 태우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일찍이 아주 오래 전 제독이 설치한, 태양의 뜨거움으로부터 레노지안을 보호하기 위한 인공 하늘.
인간의 지성은 그것을 뚫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비극적 종말의 시작이었다.
폭주한 태양에서 쏟아지는 에테르 에너지는 무자비했으며, 폭력적으로 모든 것을 파괴했다.
아서는 필사적으로 마력을 동원해 에테르를 방어했지만, 결국 그마저도 가슴이 뚫리고 말았다.
무차별로 쏟아지는 빛의 화살이 가슴을 뚫을 때의 그 선명한 통각은, 마치 현실인 것처럼 지금도 기억에 생생했다.
‘전생 최후의 기억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씁쓸한 웃음이 머금어진다.
까마득한 오래 전, 먼 우주에서 온 제독은 아무것도 없는 우주 공간에 에테르 에너지원, 태양을 창조했다.
그리고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 레노지안을 창조했으며, 레노지안을 태양과 외우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인공 천체도 거듭 창조했다.
지성을 쌓은 인간이 태양을 잘못 건드려 폭주를 일으켰을 때에는, 자신이 타고 온 우주선을 변형시켜 레노지안을 보호할 하늘의 격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세월이 흘러, 아서 왕의 대에 이르러 인간은 그 하늘의 격벽마저 뚫고 말았다.
제독이 만든 인공 하늘을 뚫은 대가는 컸다. 여과 없이 쏟아지는 에테르 에너지는 가공할 출력으로 레노지안의 모든 생명을 파괴했다.
그후 태양은 진정되었고, 십 수억 년 동안 인공 하늘의 위로 두터운 대지가 쌓이며 지금의 지구의 모습을 갖췄다.
그리고 레노지안 백성들의 혼은 아서 왕의 꾸는 꿈에서 최후의 안락을 누리고 있다.
신효진과 자신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극을 상기하며,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차피 과거에 모두 끝난 일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죽은 아서 왕, 그리고 레노지안 백성들의 혼백을 돕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갈망을 억지로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비극은 아직 끝난 게 아닌, 현재진행형이기에.
그리고 자신은 전생에 그들이 믿고 따르던 왕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능에 가까웠던 아서 왕조차도 피하지 못한 비극, 그런데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도울 수나 있을까. 아니, 돕는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레노지안은 이미 그들의 무덤이나 마찬가지, 망자나 다름없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뿐.
꿈속에서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는 것에, 괜한 동정심과 책임감을 품었을 뿐이다. 한서진은 그렇게 자신을 자꾸만 달랬다.
그럼에도 어두운 지하에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하는 백골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오빠. 일어났어요?”
어느새 눈을 뜬 송하나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막 잠이 깨서 부스스한 눈이지만, 그 모습마저도 심장이 쿵쾅거릴 만큼 예쁘다.
이런 근사한 미인이 자신의 반려라는 사실에, 우습게도 한서진은 세계에서 자신이 가진 위치를 자각하곤 했다.
“잠깐 이상한 꿈을 꿔서 깼어. 나 때문에 깼어?”
“그건 아니고 느낌이 이상해서……. 저도 사실은 꿈을 꿨거든요.”
“무슨 꿈? 안 좋은 꿈인가 보네?”
“아뇨, 아주 좋은 꿈이었어요.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운…….”
송하나는 조금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오히려 꿈이 끊기면 기분이 가라앉아요.”
“그 정도야?”
얼마나 달콤한 꿈이기에, 꿈에서 깬다는 것만으로 악몽을 꾼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는 걸까. 한서진은 조금 궁금했다.
“무슨 내용인데?”
“꿈에 오빠가 나왔어요.”
“내가?”
“네, 그리고 저와 같이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어요.”
“그게 다야?”
“네.”
송하나가 배시시 웃으며 끄덕이자 한서진은 왠지 허탈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깨는 게 언짢을 정도로 달콤한 꿈이었다니.
“전용기 타고 세계 유람이라도 했나 보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오빠가 얼마나 근사하게 나왔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 걸요.”
“어떤데?”
“비밀이에요. 저만 간직할 거예요.”
“에이, 듣고 싶은데. 조금만 말해주면 안 돼?”
“그냥 엄청 멋있게 나왔고, 또 엄청 오래 나왔어요.”
“엄청 오래?”
“그럼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꿨는 걸요.”
“설마 매일 꾼 건 아니지?”
“에이, 설마요. 그냥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근데 꿈이 참 강렬했어요.”
송하나는 수줍은 듯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그때 알았어요. 제가 오빠 좋아한다는 걸. 아빠하고 편하게 술 먹는 남자도 처음이었고요…….”
촉촉한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남자한테 그런 감정 느낀 건 처음이었어요.”
“아쉽네. 조금만 더 일찍 말해줬으면 나도 더 빨리 용기를 냈을 텐데.”
“저도 여잔데 어떻게 먼저 말해요. 오빠가 먼저 다가와주길 계속 기다렸죠.”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수능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저 이제 안정기 접어들었는데.”
그 무엇보다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이다. 한서진은 손을 뻗어 조명 스위치를 눌렀다. 은은한 조명광이 어두웠던 침실을 분위기 좋게 비췄다.
―끼에에엑! 끼에엑!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포효가 수백 번 중첩되며 삼림을 뒤흔들었다. 퍼드득거리는 가죽 날갯짓 소리가 겹겹이 쌓이며, 무수한 괴조의 그림자가 하늘을 가려버렸다.
“하앗!”
외마디 기합과 함께 대검이 크게 휘둘러졌다.
가죽 갑옷을 입은 늘씬하고 키 큰 미녀를 향해 달려들던 세 마리의 괴조, 마수 클로비가 동시에 절단되어 후두둑 떨어졌다.
스칼린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사실은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지만 지친 연기를 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기척을 널리 퍼트려 보지만, 아직도 리온의 기운이 잡히지 않는다.
‘아, 혹시 기척을 지우고 다니는 거야? 그러면 곤란한데.’
벌써 두 시간째다. 언제까지 이렇게 괴수 클로비와 싸우고 있어야 하는 건지.
힘에 부치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시간만 끌다 보니 지루함이 쌓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제압할 수 있건만, 미끼에 낚이기를 기다리다 보니 힘겹게 막아내는 척 해야 했다.
“엇! 저길 봐!”
“여자가 혼자 클로비 떼와 싸우고 있어! 게다가 미녀야!”
“도와주자!”
그때 멀리서 나타난 모험가 일행이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그리고는 각자 무기를 뽑아들고 곧장 뛰어왔다.
스칼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냥 지나가길 바랬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아까 먼발치에서 마주쳤던 옛 동료들이었다. 다시 그들을 마주하게 된 것은 반갑지만, 지금은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물러 가세요! 저 혼자 싸울 수 있어요!”
“우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정도 마수들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습니다!”
“이래봬도 나름대로 유명한 모험가 일행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름다우신 분!”
그들은 각자 스칼린을 보호하듯이 에워싸며 진형을 잡았다. 스칼린은 속으로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지.
‘나타나라는 리온은 안 나타나고.’
이 남자, 대체 어디서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그런 자그마한 분노를 담은 칼을 휘둘러, 그녀는 옛 동료들을 향해 달려드는 세 마리의 마수 클로비를 동시에 베어냈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에 그들은 저도 모르게 굳어지며 눈만 깜빡거렸다. 스칼린이 이 정도 실력자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 대단해!”
“엄청나시군요! 미모뿐만 아니라 검술 솜씨도!”
리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빛이 반짝반짝하는 게, 아무래도 단숨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모양이다.
‘하긴, 넌 전에도 날 좋아했지?’
리더는 스칼린을 좋아했다. 다른 이들도 은근히 스칼린을 좋아했지만, 리더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당시 스칼린은 그의 마음을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리온이 일행에 합류하면서 그는 아예 마음을 접어버렸다. 리온과 자신은 누가 봐도 상대가 되지 않는 격차가 있었으니까.
그 후에 스칼린은 리온과 둘이서 일행을 벗어나 초룡을 찾는 여정에 올랐고.
“위험해요!”
그때 리더가 번개처럼 나서며 칼을 휘둘렀다. 스칼린을 향해 멀찍이서 달려드는 클로비를 베어낸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리더는 씨익 웃었다. 마치 자신을 칭찬하고 멋지게 봐달라는 듯이.
스칼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귀찮은 마음에 좀 더 가까이 오면 처리하려고 놔둔 건데, 저렇게 호들갑을 떨면서까지 처치할 필요는 없었다.
“아, 고마워요.”
“별 말씀을.”
그의 웃음에 은근한 자부심이 어린다. 그래도 남자는 남자라는 건가.
그때, 뒤쪽에서 엄청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스칼린의 눈동자도 번쩍 빛났다.
‘드디어!’
뒤쪽에서 느껴진 마력의 흐름이 발사되기 직전, 스칼린은 한 발 더 빠르게 나섰다. 즉시 검에 기운을 불어놓고, 클로비 떼를 향해 뻗으며 방출했다.
거대한 화염이 클로비 떼를 덮쳤고, 하늘을 태워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불길이 클로비 떼를 사정없이 헤집었다.
클로비 떼는 고통스러운 단말마를 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불길은 녀석들의 도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후둑. 후두둑. 후두두둑.
사방에서 불에 탄 클로비들의 시체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리온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마력이 빠른 속도로 수그러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클로비 떼를 처리해버린 그녀의 무위에 놀란 옛 동료들은 입을 반쯤 벌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잿빛 망토로 온몸을 감싼, 벌겋게 달아오른 검을 쥔 남자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 마력검 수준이 어떤가요? 쓸 만한가요?”
“……이런 위력은 들어보지도 못했소. 그대는 대체 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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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뛰는 중인 당신 마누라, 유부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