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54 T1입니다 =========================================================================
―요금 더 올려도 괜찮으니까 실제 관계가 가능하게 만들어달라.
월드투어VR 이용자, 특히 남성 이용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고 있었다.
촉감까지 완벽하게 다듬고, 실제 성 관계가 가능한 서비스를 구현해달라는 요구였다. 카지노 컨텐츠에서 시각적인 향락의 끝을 즐길 수 있지만, 그랬기에 더욱 이용자들의 갈망은 깊어져만 갔다.
―볼 수만 있다는 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상 현실 구현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상을 원한다.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해야 진짜 VR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SJ엔터테인먼트는 뭐가 무서워서 기능을 막아놓은 거지?
―듣자하니 매달 수억 원씩 이용료를 지불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성 관계를 비롯한 모든 컨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특별회원제도를 운영 중이라던데?
―역시, 돈 없으면 닥치고 보기만 해라 이거구나. 우리 같은 노예들이 미모의 카지노 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허용치 않겠다 이거지…….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갈증은 엉뚱한 오해와 루머까지 생산했다. 성 관계 기능은 이미 구현되었으며, 특별 요금을 지불하는 VVIP들은 이미 앞서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겠지만, 월드투어VR에 흠뻑 취한 이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고 있었다.
SJ엔터테인먼트 개발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세상의 주목과 인기를 끌 것은 당연하지만, 가상현실 여행이라는 컨셉이 아니라 카지노걸 컨텐츠로 이렇게 뜨거운 폭풍이 닥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월드투어VR이 카지노 때문에 오히려 뜨거운데요. 연구원 하나가 심심해서 집어넣은 그 작은 컨텐츠가 이렇게 폭풍 같은 반응을 몰고 올 줄이야…….”
“그런데 성 관계 기능을 우리가 임의로 막아놓고 있다는 오해는 너무 억울한데요. 아직 구현 자체가 불가능한데…….”
개발부는 성 관계 구현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촉감 재현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플라스틱과 가죽 소파의 촉감 구별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고 있으니 억울할 수밖에.
“혹 성관계 기능이 완성돼도 문제예요. T1으로는 절대로 구동 못해요. 지금도 시스템 최고 점유율이 하루에도 한 번 이상은 10%를 찍고 있는데요.”
타르타로스 1은 전 세계에서 300만 개의 캡슐을 동시에 관리하고 있었다.
가상현실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시스템 렉이나 접속 지연 같은 현상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개발부는 시스템의 최고 점유율의 한계를 50%로 잡고 있었다.
SJ엔터테인먼트는 BII센터를 앞으로 10배 이상 늘릴 계획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최고 점유율을 고려하면 10배는커녕 5배 이하에서 확장 계획을 멈춰야 할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인 기능은 무슨 얼어죽을.”
“서버 확장해야 합니다. T시리즈 차세대 모델 제조는 아직 소식이 없는 건가요?”
“T1으로는 부족한 거군요.”
“많이 부족해. 이제 겨우 서비스 하나를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버벅거리고 있어. BII센터를 열 배 이상으로 확장해야 하는데 시스템 한계 때문에 지금 주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지원은 브리핑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적어도 올해 안에 세 개 이상의 컨텐츠를 더 내놓을 생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T1과 동일한 성능의 수퍼컴퓨터가 20개는 더 필요해.”
말을 하다 말고 정지원은 한숨을 쉬었다.
“신경망 재현이 이렇게까지 시스템 사용량이 높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용자의 뇌가 가상현실을 진짜처럼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는 방대한 계산이 필요하니까요.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서버 확장은? 해줄 거지?”
“타르타로스 1을 20개 더 만들어주는 건 별로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만…… 생각해보니 임시방편일 것 같은데요. 컨텐츠가 쏟아질수록 앞으로 시스템 확장이 더 필요해질 것 아닙니까?”
“그렇지.”
정지원은 속이 후련하다는 기대감을 품고 한서진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타르타로스 1을 추가로 만드는 것보다는 확장이 용이한 대량 서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낫겠습니다. 100억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해도 무리없이 운용 가능한 수준을 목표로 삼죠.”
“100억 명?”
정지원은 조금 놀라서 반문했다.
지금 전 세계 인구가 80억 명 정도고, 그 중에서 SJ엔터테인먼트의 서비스를 상시적으로 이용할 만한 구매층은 10억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100억 명이라니?
“인구가 증가할 수도 있고, 언젠가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가상현실을 늘 이용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때를 염두에 두고 확장성을 설계해야지, 나중에 가서 또 시스템 용량 모자란다고 기판을 늘려나갈 순 없잖아요.”
“음, 어차피 확장성을 염두에 둘 뿐이니까 당장 100억 명을 커버할 만큼 만들 필요는 없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정지원은 고개를 끄덕인 뒤, 목소리를 은근히 낮춰 물었다.
“그런데 성 관계 기능 말이다.”
“…….”
“정말로 아직 구현이 불가능한 거냐? 너라면 만들 수 있지 않아?”
신효진은 근래 실의에 빠져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피폐해져만 갔다.
송하나와 행복한 한서진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게 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리움이 아직 시들지 않을 것을 깨닫곤 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져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 신효진. 결혼식 때 리온한테 분명히 작별 인사를 했는데…….’
전생의 인연일 뿐이다. 그것도 까마득한 오래 전, 생물이 생겨나기도 전에 연결되었던.
그녀는 몇 번이나 마음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전생은 과거로만 남겨두고, 현생에 충실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임신하셨다고요?”
“네, 올 연말에 태어날 거예요.”
환하게 웃으며 임신 사실을 자랑하듯 알리는 송하나 앞에서, 신효진은 무너질 뻔한 자신을 겨우 추슬러야 했다.
“축하해요, 정말 잘 됐네요.”
“고마워요.”
“두 분의 아이이니 아마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울 거예요. 저도 벌써부터 기다려지네요…….”
“효진 씨도 어서 좋은 사람 만나야지요. 제가 다리라도 좀 놔드릴까요?”
“……전 괜찮아요. 연애에는 아직 흥미가 없어서요.”
“마음 내키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진짜 좋은 분들로만 골라서 소개시켜 줄게요.”
“고마워요.”
그녀가 건네는 호의에 오히려 마음이 쓰린다.
혹시 그녀도 알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함이 이따금씩 가슴을 스친다.
‘박사님이 설마 말씀하시진 않았겠지?’
전생의 인연.
비록 그녀가 현생의 반려라고 하지만, 그 소중한 과거만큼은 둘의 비밀로 남겨줬으면 했다.
“아, 효진 씨. 우리 지금 같이 시드니나 갈까요?”
“지금? 시드니요?”
신효진은 조금 당황해서 다시 물었다.
“시드니에도 웜홀이 설치됐었나요?”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쪽으로 와요.”
송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신효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어느 커다란 방으로 안내했고, 방 안에 있는 구조물들을 본 신효진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BII 아닌가요? 그, 월드투어VR인가 뭔가 하는…….”
“효진 씨도 이용해보셨죠? 어땠어요?”
“전 아직 안 해봤어요.”
“어머, 월드투어VR가 요즘 얼마나 인기 많은데 아직도 안 들어가보신 거예요? 한 번 해봐요. 진짜 현실 같은 느낌에 깜짝 놀랄 거예요.”
신효진은 송하나에게 보이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같은 현실, 자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겪지 않았던가. 바로 광활하고 아름다운 레노지안의 스칼린 왕비로서 살았던 꿈.
그 꿈속에서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가장 강한 군주와 서로 사랑했으며, 수많은 백성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낭만이 있고, 세월이 있으며, 아픔과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게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였다.
그 꿈에 비하면 월드투어VR 따위는 조잡한 가공에 불과하다.
“자, 이제 이 버튼을 누르면 작동해요. 그럼 조금 있다가 안에서 봐요.”
어느덧 신효진은 송하나의 리드에 따라 BII장치에 앉아, 월드투어VR 세상으로 접속했다.
순간적으로 모든 게 캄캄해졌다가 모든 풍경이 뒤바뀌었다. 그녀는 시드니의 어느 특급호텔 스위트룸에 와 있었다.
잠시 후 동기화가 이뤄지며 송하나가 다른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신효진의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어서 나가요.”
조금 정신없이 이끌리며, 신효진은 그녀를 따라 나섰다.
보이는 모든 것은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연동 저택 1층 응접실이었는데, 전혀 새로운 외국의 거리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어때요, 멋지지 않아요?”
“……멋지네요.”
신효진은 억지로 끄덕였다.
사실 신선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레노지안의 꿈보다 못했다.
머리를 스치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고, 자신을 잡아 끌고 있는 송하나의 손도 느낌이 낯설었다. 사람의 손이 아니라 마치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것만 같은 위화감이 든다.
현실 이상으로 생생했던 경험, 레노지안의 추억을 갖고 있는 그녀로서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레노지안이 훨씬 더…….’
문득 옛날, 리온을 처음 만나던 순간이 떠올랐다.
검 한 자루를 들고 방랑하는 멋진 마검사, 그의 처음을 떠올리자 가슴이 막연해진다.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면…….’
아련한 그리움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이미 끝난 전생의 연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없다. 현재 어긋난 한서진과 자신의 인연을 비틀어볼 생각도 아니다.
그저 과거를 추억할 앨범이 필요했을 뿐이다.
자신의 기억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했던 그때를 추억하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운명은 자신에게 더 이상 추억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허상이라도 좋으니, 그저 꿈만 꿀 수 있다면……!’
그녀가 원한 것은 현실의 변화가 아닌, 꿈의 향취에 다시금 잠기는 것. 고달픈 시절, 매일 밤 아름다운 꿈을 통해 내일을 버틸 힘을 얻었듯이, 또 한 번 그 시간에 발을 들여놓는 것.
“어?”
그 순간 신효진은 멈칫했다.
자신을 이끌던 송하나의 손이 지워지고 있었다. 마치 물감이 벗겨지듯 손끝에서부터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아니, 지워지는 것은 송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감싼 모든 것, 0과 1로 가공된 세상 모든 것이 벗겨져 내리고 있었다. 무수한 파편이 잘게 흩어지며 세상을 수놓는 그 모습은,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아…….”
신효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파편이 부서져 내린 그 뒤로, 꿈에서도 잊지 못한 익숙한 풍경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팀장님, 시스템 점유율이 99%까지 올랐습니다!”
“오류 아냐? 당장 확인해!”
그날, SJ엔터테인먼트 개발운영부서에 비상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