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7 눈을 더 크게 =========================================================================
그의 미국 본명은 워렌 카린스.
CIA 필드 요원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은밀하며, 베일에 싸여 있는 존재다.
언어와 스포츠, 학문, 사교, 심지어 요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능통한 그는 CIA 역사상 다시없을 가장 완벽한 요원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무정했다.
수십 년이 넘게 필드 현장에서 뛰었지만, 나이 탓에 이제는 슬슬 기력이 저하되고 있었다. 그쯤에서 워렌 카린스는 은퇴 혹은 본부 사무직으로 옮길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집사요?”
“그래, 벅스 해서웨이의 크렘 회장이 대저택을 관리해줄 집사를 찾고 있네. 자네라면 크렘 회장과도 면식이 있으니 잠입하기에 적당하지 않은가.”
“크렘 회장을 감시하란 말입니까?”
워렌 카린스는 크렘 회장과 오랜 인연이 있다. 물론 크렘 회장은 그가 CIA의 최고 현장 요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어디까지나 영국 귀족 사교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집사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크렘 회장한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워렌 카린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사를 주시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미국에 필요한 중요 인사지. 그에게는 하등의 문제도 없네.”
“그럼?”
“그가 어떤 청년에게 대저택 한 채를 선물하려 하는데, 그 대저택에 상주하며 모든 관리를 맡아줄 총지배인 겸 집사를 구하고 있어. 자네가 그 역할을 해주면 좋겠군.”
워렌 카린스는 대번에 상부가 노리는 표적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 청년이 감시 대상이군요.”
“감시 겸 보호지. 아니, 정확히는 보호 겸 감시라고 해야 옳겠군. 자세한 건 이걸 읽어보게.”
상사는 간단하게 정리된 요약본을 내밀었다. 요약본의 첫 표지에는 크고 붉은 글씨로 ‘Top secret’이라고 적혀 있었다.
워렌 카린스는 선뜻 펴보지 않았다. 안의 내용을 본다는 건 임무에 묶이게 된다는 의미였으니까.
“부국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제 필드에서 은퇴할 생각입니다. 더 이상 현장 요원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젊은 요원들 발목만 잡을 겁니다.”
“필드에서 뛰는 일이지만, 자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자네는 그저 집사로서 목표물의 생활을 안락하게 해주기만 하면 되네.”
“그런 일이라면 진짜 집사를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리조차 아무나 쓸 수 없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고만 알아두게.”
“어느 정도나 중요한 인물입니까?”
“아직 정확한 판단을 내리진 못했지만, 그가 지닌 천재성과 잠재력은 매우 놀라운 수준이야. 향후 미국을 위해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고 예상하네. 그 날이 왔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철저하게 움직여야지.”
워렌 카린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등장했단 말인가? CIA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나설 정도로?
“자네에게 그다지 어려운 임무는 아니야. 중요 인물이니만큼 총집사 같은 목표물과 인접한 지위에 아무나 밀어 넣을 수 없어서 자네를 배정하려는 걸세.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은퇴 전 최후의 휴가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으면 더 좋고. 어려운 일은 없을 거라 보장하지.”
그렇게 워렌 카린스는 최수한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임무에 나섰다.
일종의 보호 관찰 임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목표물을 지켜보며, 그의 편의를 최대한 돕는다. 최후에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직접 나설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총 한 자루 없는 자신까지 나서야 할 상황이라면, 그만큼 CIA가 대책 없이 뚫렸다는 의미일 테니까.
“최수한? 그건 자네 모국 실명이지 않나? 왜 하필 그 이름으로…….”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자네의 각오는 알겠네.”
크렘 회장은 자신의 오랜 친우 ‘크리스 프릿(크렘은 최수한의 이름을 그렇게 알고 있다)’의 본명이 따로 있다는 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했으니 한국식 본명 역시 있을 것 아닌가.
그렇게 최수한은 집사의 자격으로 세연동 대저택에 입성했다.
처음 한서진을 만났을 때의 기분을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사진보다 훨씬 젊군.’
보고서에 나온 한서진의 스펙은 간결했지만, 그 내용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맥플의 차세대 AP를 단독으로 설계했다라…….’
그 설계 능력만으로도 미국이 반드시 영입해야 할 국가적 인재인 셈이다.
AP 반도체 슈나우저의 성능 및 판매량을 확인한 최수한은 미국이 그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다이렉트로 접근하는 게 아닌, 이런 식으로 길게 돌아간다는 것은…….’
미국이 그를 영입함에 있어 절대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진심을 다한다는 뜻이다.
―우리 미국은 이때부터 그림자처럼 당신을 보호하며, 보이지 않는 적들이 당신을 위협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노력을 해왔습니다. 이제껏 우리의 관심을 알리지 않은 것은 당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간절하게 당신의 진심을 얻고자 합니다. 당신이 설령 미국으로 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최수한은 언젠가 자신이 읊게 될지도 모를 그 말을 항상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다.
“슈나우저? 코카 스패니얼? 그걸로도 모자라 비글까지?”
“메인프레임 Z 시리즈는 대체 어떻게 돼먹은 수퍼컴이지?”
“제5의 힘이라고?”
천재적인 설계 능력을 지닌 진짜 반도체 천재인 줄만 알았는데, 스케일이 멈추지 않고 자꾸만 커지기 시작했다.
“재해 예측 모듈? 대체 어떤 원리로 천재지변을 예측한다는 거지? 이해가 안 돼.”
“제5의 힘은 대체 뭐야?”
“에테르 스톰…… 꺼지지 않는 산불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서 경이는 기적으로 진화하고 말았다.
“틀림없어. 한서진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막기 위해 뭔가를 했다.”
“정지원 사장이 그의 지령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뭔가를 투척한 정황이 있어. 그게 샌프란시스코의 지진 에너지를 아무 피해 없이 우주로 흘려보냈다.”
간 재생 치료제, 인공 희토류 운석, 그리고 금 소행성 100억 톤에 이르기까지.
최수한은 이쯤 돼서, 아니 사실 전부터 한서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맞는 건가?’
신이 잠시 인간의 탈을 쓰고 지상에 내려온 게 아닌가? 그는 인류에게 위대한 우주의 지식을 전해주기 위해 내려온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미 오래 전부터 CIA와 연락은 끊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서진이 Z7을 개발한 순간부터 CIA는 정보 관리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Z7을 능가하는 수퍼컴퓨터를 단독으로 개발해서 보유하고 있었다. 정황상 확실했다.
CIA 서버가 해킹당할 우려는 언제든지 존재했고, 한서진의 최측근에 침투해 있는 최수한의 존재는 반드시 감춰야만 했다.
그를 속이거나 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한 최후의 카드를 남겨두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CIA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최수한은 CIA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CIA가 보유한 그에 관한 모든 정보는 철저히 파기되었고, 연락망도 끊어졌다.
오직 소수의 관계자들만이 그를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CIA와 모든 것이 끊어진 채, 최수한은 오랫동안 고립된 채로 한서진을 보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상사가 내렸던 말을 기억했다.
‘자네가 그에게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가 왔다고 스스로 판단이 되거든 다시 돌아오게. 그때 화려한 은퇴식을 치러주겠네.’
그는 혼자이되 세연동 지부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연락이 끊어지고 나서도 몇 년 동안 세연동 총집사로서 그는 안락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 편히 필드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한서진은 점점 성장했고, 어느덧 미국 대통령의 영향력이나 위세마저도 넘어섰다.
그리고 그가 화폐 자본가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연방은행을 무력화시켰을 때, 최수한은 마침내 깨달았다.
‘떠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한서진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위협이 생긴다면, 그것은 자신 따위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대한 재난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자신이 총집사로 위장해서 그의 곁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임무를 끝낼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서진에게 정중히 말을 고했다.
“제가 건강이 안 좋은 관계로 그만 은퇴하고 편히 요양하며 지내고 싶습니다.”
아마 선뜻 받아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서진 역시 자신을 집사로서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많이 아쉬워하면서 어떻게든 말리고자 하겠지.
그래도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최수한은 떠날 생각이었다.
상사가 말한 대로, 지금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기에 떠나기 좋은 시기’였으니까.
그런데 한서진은 뜻밖의 말을 했다.
“음…… 그러고 보니 최 집사님 연봉이 얼마였던가요? 제가 잘 몰라서.”
“2억 5천만 원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입이 벌어질 거금, 그러나 영국 귀족 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집사의 몸값으로는 전혀 과한 액수가 아니었다.
“500억 원으로 올려드리죠. 아, 소득세도 대신 내드리겠습니다.”
“……예?”
“이 저택은 아직 최 집사님을 필요로 합니다. 저 곧 결혼도 해야 하고 나중에는 아이도 태어날 텐데 그때 최 집사님이 없으면 어떡합니까.”
실수령액이 약 1억 7천이니, 거의 300배 가까이 연봉을 인상해주겠다는 소리였다.
천문학적인 액수에 최수한은 혼란에 빠졌다.
한해 실수령액이 500억 원이라니, 일 년만 일하면 자신이 CIA에서 평생 근무하며 모은 돈의 50배가 된다.
“저한테 500억 원은 큰돈이 아니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좀 더 저를 위해 일해주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성의를 바쳐 모시겠습니다.”
어차피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는 퇴물 요원일 뿐이다.
몇 년 바짝 일해서 큰돈 모아서 미국으로 돌아가면, 남은 인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으리라.
이미 그는 늙고 기력이 떨어졌다. 어차피 더 이상 처절한 각오나 사명감으로 임무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면죄부마저 있지 않은가.
―자네가 스스로 판단해서 적기라고 생각될 때 임무를 종료하고 돌아오게. 화려한 은퇴식을 치러주겠네.
‘아직 은퇴할 때가 아니다.’
한서진은 약속을 지켰다.
그의 연봉은 실수령액으로 500억 원이 되었다. 일개 집사의 연봉으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지만, 세연동 대저택을 관리하는 총집사 아닌가. 사람들은 그 연봉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를 부러워할 뿐.
늘어가는 통장 잔고에 행복했지만, 때때로 최수한은 ‘이러다가 언제 은퇴하지?’라는 고민에 빠질 때가 있었다.
‘조금만 더 늙으면 그때 은퇴하자. 아예 거동도 못할 때까지 일하면 돈을 써보지도 못할 테니까.’
앞으로 한 5년 정도 후?
내심 그렇게 잠정적으로 은퇴시기를 잡고 있었다.
그랬는데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목도해버렸다. 바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약이었다.
아이의 시신이 실린 이동 침대를 이끌어달라고 부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설마설마 했을 뿐, 상상도 못했는데.
“왜…… 저에게 이런 걸 보여주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본부에 연락 안 한지 꽤 됐죠? 이제부터는 그냥 마음 놓고 통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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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실탄 월드에서 집사 역할 인물이 은퇴를 한 적은 없었다. 다 실패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