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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44화 (544/609)

00544  새 터전  =========================================================================

BII에 접속한 한서진은 의식 상태로 가상현실에 존재한 채, 지구 모형을 관조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직경 수 미터 정도 되는 지구의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떠 있었다. 현실이라면 이 정도 배율로는 지구의 디테일한 부분을 관측할 수 없다.

하지만 가상현실에 접속한 의식 상태라면 원하는 부분을 언제 어느 때든 손쉽게 인식할 수 있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탄생, 성장, 갈등, 그리고 죽음…….

인간끼리의 전쟁이 사실상 멈췄음에도 여전히 불행에 신음하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그런 인간 사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사람의 심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나는 신이 아니다.’

한서진은 주먹을 쥔 채, 지상에서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상부 맨틀 아래의 세상, 바로 진짜 지구였던 공간이었다.

‘레노지안…….’

이제는 오래 된 죽음의 향기만이 존재하는 곳.

한때 영원한 번창이 뿌리내린 곳이었으나, 더 이상 생명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암흑의 공간.

대륙 전체에 널려 있는 죽음의 증거, 세월에 삭은 사람과 동물들의 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무겁게 저려 온다.

‘그저 더 나은 세상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을 뿐인데…….’

왕가가 꿈꾼 것은 더욱 강대하고 안락한 세상의 미래.

백성들 역시 간절히 그것을 꿈꾸었기에 왕가는 오랜 세월에 걸쳐 노력해왔고, 열지 말아야 할 금단의 문을 열어버렸다.

그러나 레노지안은 멸망했으되 멸망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혼은 아서 왕이 최후의 힘을 끌어내 만든 꿈의 세상, 리미트리스 드림에 모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

비록 그것이 만들어진 꿈일지언정, 그들은 소멸하지 않고 계속하여 그들의 번창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백골이 꾸는 꿈, 리미트리스 드림.

그것이 끝나지 않는 한, 레노지안은 멸망한 게 아니다.

‘제독…… 그는 어떻게 됐을까?’

먼 우주에서 홀연히 이곳에 나타나 태양계를 만들고, 생명의 터전을 일군 인물.

그의 흔적은 레노지안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언제부터 레노지안에서 종적을 감췄는지도 묘연하다.

레노지안 왕가를 세운 시조인 것은 틀림없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존재는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어리석지 않은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삭제했음에도, 인간은 다시 과거를 반복하고 있다.

생물이 기억하지 못하는 까마득한 오래 전의 시간 속에서, 그는 미래의 자신을 위해 그런 대화를 남겼다. 그가 태어난 문명은 시공의 흐름마저 자유자재로 지배하는, 신계에 버금가는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삶과 죽음마저도 자유자재로 조율할 수 있었을 터인데, 생명의 타이머가 다했다고 정말 그가 죽었을까?

‘죽지 않았다면 어디에 있는 거지? 왜 레노지안의 멸망을 굳이 막지 않았지?’

―이와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겠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전언이 귓가에 가만히 내려앉는다.

우주선을 변형시켜 한 차례 태양의 폭주를 막아내며, 제독은 언젠가 레노지안이 멸망할 거라고 예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태양의 폭주를 제어하는 것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레노지안의 문명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과거를 잊어버린 레노지안은 태양의 힘을 탐하다가 결국 진짜로 멸망하게 되었다.

제독은 왜 그것을 예견했으면서도 내버려두었을까?

‘지식과 힘을 탐하는 인간의 본능을 억지로 누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행동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져야 한다고 생각한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그의 냉정함에 오싹한 한기가 돋는다.

한서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어느 한 곳을 찾아 더듬어 나갔다.

바로 아서 왕과 왕비의 백골이 잠들어 있는 곳. 무수한 인간들의 뼈가 만든 탑의 끝이었다.

‘아서…….’

그의 뼈에 남은 혼은 리미트리스 드림이라는 거대한 꿈의 공간에서 수백 억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포용하고 있다.

―아서 왕이 꾸는 꿈이 끝나선 안 돼요! 만약 그가 꿈에서 깨어나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나버리고 말아요!

신효진의 다급한 외침은 지금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혀 있었다.

코르비우스, 아서 왕의 스승이자 충신이며, 스칼린의 아버지였던 위대한 대마도사.

그는 리미트리스 드림의 공간에서 꿈의 비밀과 진실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아서 왕의 꿈에 머무르면서도, 그 꿈의 흐름에 인격이 휘둘리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서 왕의 꿈이 끝나지 않는 것, 그리하여 멸망한 레노지안이 허구의 공간에서나마 유지되도록 지키는 것.

‘지금 유지된 이 균형을…… 절대로 깨뜨려선 안 돼.’

한서진은 고개를 들어 태양을 주시했다.

거대한 힘을 끊임없이 뿜어내는 에테르의 근원. 만약 저것을 잘못 건드려 또다시 흑점 대폭발 같은 사태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지상과 지하의 모든 것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인간은 결국 언젠가 에테르의 실체를 알게 된다.’

자신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닿았을 길이다.

왜냐하면 니트론 교수를 시작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제5의 힘이라는 주제 하에 탐구되고 있었으니까.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 오랫동안 과학기술과 지식이 축적되면 인간은 에테르와 태양의 비밀을 알아내었을 것이다.

‘지식을 향한 인간의 탐구욕은 어차피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욕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 그것이 바로 태양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

한서진은 다시 한 번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굳혔다.

그때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잠깐?’

아서 왕의 모습이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달랐다. 패전한 장수처럼 피로한 듯이 앉아 있던 모습이 아니라, 자세가 무너진 채 옆으로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혹시 움직였던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아서 왕을 넘어뜨린 것일까?

한서진은 자세한 흔적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도 찾아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무난한 결론을 내렸다.

‘뼈가 너무 삭아서 자세가 무너졌나 보네.’

십 수억 년은 족히 세월이 지났으니, 아무리 아서 왕의 백골이라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한서진은 더 자세히 살피지 않고, 접속을 종료했다.

땅에 널브러진 아서 왕의 손끝이 하늘을 향하듯이 부르르 떨린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크리스가 영국, 러시아에 차례차례 성공적인 웜홀 협상을 이끌어냄에 따라, 그의 미국 내 위상은 극도로 올라갈 수 있었다. 펍 등에서 크리스의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그가 다시 대선에 나와도 폭풍 같은 인기 속에서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출마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

웜홀 협상을 마치고, SJ게이트는 즉시 뉴욕―런던, 캘리포니아―블라디보스톡 웜홀 설치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웜홀 설치가 끝난 설치 장비 두 대를 즉시 해당 지역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웜홀 설치 장비는 각각 한 쌍으로 한 세트가 구성되어, 양쪽 방향에서 에너지를 조사하여 웜홀을 개방한다.

즉 뉴욕―런던 웜홀을 설치하려면 두 도시에 한 세트의 설치 장비를 각각 배치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쪽 세트를 해당 장소로 운반해야 하는데, 이때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다.

초기에는 화물기를 이용하려 했으나 아찔한 사고가 날 뻔한 이후로는, 운반에 항공편을 이용하지 않는 방침으로 바뀌었다.

차량 등 다른 운반편은 사고가 나더라도 설치 장비를 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항공사고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개당 생산원가만 20조 원이나 하는 귀하디귀한 장비를 사고 같은 어이없는 이유로 날려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때문에 런던,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설치 장비의 한쪽을 각각 운반할 때, 미국은 항공모함 편대를 동원했다.

웜홀 설치 장비는 이동과 세팅, 그리고 에너지 충전에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다. 그 중에서도 이동과 세팅에 걸리는 시간이 가장 크다.

그리고 뉴욕―런던, 캘리포니아―블라디보스톡 웜홀이 드디어 순차적으로 설치되었다.

설치를 마치고 웜홀 최초 오픈 행사를 여는 자리에는 한서진도 기꺼이 참석했다. 물론 그는 런던이나 블라디보스톡에 가지 않고 미국 쪽에서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에서 미국을 오가는 것은 웜홀을 이용하면 금방이었으니까.

“한국과 미국 사이에 뚫린 최초의 국제 웜홀이 인간의 위대한 발전을 널리 알리는 시발점이었다면, 런던―뉴욕 웜홀은 그 도전을 일상으로 만들어주는 쐐기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크리스 전 미국 대통령이 축사를 마치고, 우렁찬 박수갈채가 영국과 미국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한국―미국 웜홀이 웜홀의 실현화를 알리는 포성이었다면, 영국과 러시아 웜홀은 웜홀의 세계화를 상징하는 발걸음이었다.

오픈 행사를 대강 마치고, 한서진은 축하해주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크리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며 조금씩 물러나서 비켜 주었다.

“박사님.”

“연설 잘 봤습니다. 그 실력은 어디 안 가시던데요. 당장 대선에 다시 나오셔도 어렵지 않게 당선되시겠습니다.”

“하하, 지지율만큼은 현직 대통령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직은 업무와 책임만 막중하고 막상 좋을 것은 별로 없는 자리입니다. 지금이 훨씬 낫군요.”

“대통령께 SJ게이트 경영을 맡긴 것은 참 잘한 결정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뿌듯하군요.”

“감사합니다.”

기자들은 두 사람이 서로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덕담을 나누는 모습을 정신없이 찍었다.

이 보기 좋은 그림이 기사로 보도되면 크리스의 인기는 한층 더 껑충 뛰어오를 것이다.

기자들은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생각했다.

‘크리스는 영웅과 교류하는 평범한 인간 이웃의 상징.’

예를 들자면, 지구를 구하러 우주에서 온 로봇과 친구가 된 미스터 샘 같은 존재?

평범한 인간 이웃이라기에는,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스펙이 조금 사기스럽기는 하지만…….

‘그 정도 스펙은 되어야 영웅과 친구인 평범한 인간 이웃이 될 수 있지.’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은 웜홀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제 그 세 나라는 서로 육지가 이어진 것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 나라 간에 화물선박 운송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SJ게이트는 웜홀을 이용함에 무지막지한 요금을 부과했고, 그것은 분명한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폐다발을 땅바닥에 내던져서라도 시간을 절약하고 싶은 사람들만 웜홀을 이용해라!’

아직 세상은 웜홀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웜홀 시범 설치가 성공했을 때에도 운송업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다.

하물며 웜홀을 아무 대책 없이 곧바로 세상에 풀어놓는다면?

세계 운송업은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고 침체될 것이고, 그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대공황을 불러온다.

============================ 작품 후기 ============================

요즘은 영웅의 평범한 인간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이 정도 스펙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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