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2 새 터전 =========================================================================
미 의회에서 총기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정부의 감시 권한을 보장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작은 반대의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총기범죄로 인한 피해의 막중함을 공감하는 여론 덕분에 법안은 어렵지 않게 통과되었다. 여기에 미국총기협회의 지원이 가세하면서,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쾌속질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총기협회로서는 총기 그 자체에 대한 증오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터라, 협회 차원에서 온힘을 다해 법안 통과를 도왔다. 협회가 이번 로비를 위해 쓴 자금만 1억 달러가 넘었다.
제도적 정비가 완료된 이후, 케인 대통령은 자신만만하게 한서진에게 연락을 취했다.
「저희는 준비가 다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곧 넘어가지요.”
「앗, 직접 오실 계획이신가요?」
“그래도 각료분들과 어느 정도 협의는 맞춰야지요.”
「그렇다면 저희가 넘어가겠습니다. 박사님께서 번거롭게 행차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볼 일도 있고 해서요.”
「그러시다면야…….」
결국 한서진은 두 시간 뒤 워싱턴을 방문하기로 협의를 했고, 백악관은 발칵 뒤집어져서 긴급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두 시간뿐이다!”
“대통령은 왜 이렇게 일정을 촉박하게 짠 겁니까?”
“알 게 뭔가. 한 박사님이 두 시간 뒤라고 했으면 무조건 두 시간 뒤인 거다.”
온갖 난리법석을 피운 끝에 백악관은 가까스로 귀빈을 맞이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나마도 궁색만 겨우 갖췄다.
그동안 웜홀을 넘어온 한서진의 방탄리무진은 경호 차량들을 거느리고 백악관을 향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워싱턴 시민들은 누군지 몰라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차량이 지나간 뒤에야 뒤늦게 한서진이라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행렬은 백악관으로 들어선 뒤였다.
회의실에 들어선 한서진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뻣뻣하게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각료들을 볼 수 있었다. 국무부 장관, 국토부 장관, CIA 국장, FBI 국장 등 미국의 주요행정기관을 담당하는 기관장들이 병아리떼처럼 모여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케인 대통령이 먼저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한서진은 그를 시작으로 다른 각료들과 차례차례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하늘의 눈동자 같은 위대한 시스템을 만든 것에 찬사를 보냅니다. 박사님 같은 위인이 아니고는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업적일 겁니다.”
대통령의 신앙심과 존경 가득한 서두를 시작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런 식으로 범죄를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앞으로 적용 영역이 총기범죄 외에도 확대된다면, 더 이상 교도소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총기범죄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모두 박사님을 칭송할 겁니다.”
하늘의 눈동자는 민간에 공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대외비로 유지된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서진을 칭송해야 할 일은 생길 수 없다.
하지만 총기범죄 억제 정책에 한서진의 영향력이 깊이 닿아있다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다.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가 미국의 총기범죄 축출에 기여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서진이 입을 열었다.
“하늘의 눈동자는 언제든지 미국 전역에 개시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명령어 하나만 입력하면 즉시 발동합니다. 다만 민간에는 어떤 식으로 발표하실지 궁금하군요. 하늘의 눈동자 시스템 자체는 숨겨야 하는데, 어떻게 시민들을 납득시킬 건가요?”
“1,000만 개가 넘는 초소형 드론으로 미국 전체를 상시 관찰하는 시스템을 적용한다고 발표할 겁니다.”
“아, 그런 명분으로 가는 건가요?”
사실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지만, 한서진은 굳이 미국의 내부 사정을 들춰보지 않았다.
“박사님과 우리 미국의 합작 프로젝트로, 한국은 그 성능을 시범 테스트하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공표되는 게 아니라, 루머로만 사람들 사이에 떠돌게 될 겁니다.”
직접 발표하면 정부가 그 신뢰성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루머로 슬쩍 흘리면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책임은 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이번에도 책임은 미국이 지는군요. 저야 편하지만, 정치적인 부담이 크지 않을까요?”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부담은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케인을 비롯한 각료들은 자부심이 가득한 미소를 보였고, 한서진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하늘의 눈동자를 적용할 영역을 설정하는 작업만 남았군요.”
최종적으로 하늘의 눈동자는 미국 본토와 영해, 그리고 미국령에 적용되기로 결론이 났다. 영역 설정을 마친 뒤 한서진은 각료들을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질문하실 건 없습니까?”
“만약 경찰이나 수사요원이 총기를 소지했지만 사격 준비가 안 된 범인을 사살할 목적으로 발포를 시도하면 시스템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경찰 내부의 체포지침에 따라 해결해야 할 행정 문제죠. 시스템이 관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총기를 사용해서 타인에게 불법적인 피해를 입히려는 경우일 뿐입니다.”
“…….”
“물론 경찰이라 해도 정당한 체포 활동이 아닌, 사사로이 총기를 범죄에 쓰려 한다면 시스템이 개입합니다. 좋은 대답이 됐으면 좋겠군요.”
“만약 총기범죄가 아닌, 사고일 경우에도 시스템이 개입합니까?”
“누군가가 사격 준비를 취할 경우 시스템은 1차적으로 감시합니다. 그리고 탄도 궤적에 사격자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거나, 혹은 사격자가 장전된 총을 빈총인 줄 알고 타인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할 경우, 시스템이 즉시 개입합니다. 이 경우는 기절보다는 적절한 충격을 주어 사격을 하지 못하게, 혹은 사격하더라도 빗나가게 만들 겁니다.”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심층 질의를 통해 각료들은 하늘의 시스템이 얼마나 정교하게, 그리고 융통성 있게 판단을 내리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을 설계한 한서진의 능력에 더욱 놀라운 경외감을 품었다.
이건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닌, 마치 살아 있는 인격체 같지 않은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대통령 이하 각료들은 기대와 긴장에 찬 눈빛으로 한서진을 응시했다.
이제 곧 하늘의 눈동자가 미국 전역에 펼쳐진다.
그리고 더 이상 총기범죄나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의 과잉 진압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그것은 행정 제도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경찰들 또한 범죄자들이 자신에게 총을 쓸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인식한다면, 과잉 진압을 해야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된다.
“끝났습니다.”
“…….”
“……?”
한서진이 그렇게 말하자 회의실에 당혹한 기색이 흘렀다. 그가 무언가를 조작한 것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 제가 지금 BII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어서요. 그래서 가상현실 접속으로 시스템을 활성화시켰습니다.”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지……?”
“예, 이렇게 처리하는 게 편해서요.”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과학을 지닌 이는 신과 구분할 수 없다.
각료들은 뼈저리게 그것을 느꼈다.
한서진은 새벽까지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대통령은 국정을 이끌어감에 있어 한서진의 취향이나 의견을 자세히 청취하고 싶어 했다. 마치 미국 전체를 그가 원하는 나라로 탈바꿈하고 싶은 의욕이 넘치는 듯했다.
“저는 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도 족합니다.”
“하계의 번잡함에 크게 마음을 두고 싶지 않으시다는 거군요. 잘 알겠습니다.”
“…….”
대화만 하면 결론이 이런 식으로 난다.
케인 대통령이 자신을 반신 정도로 여긴다더니, 직접 만나 보니 절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니, 반신이 아니라 그냥 신 자체로 여기는 것 같다.
새벽까지 대통령과 면담을 가진 한서진은 통이 트자마자 백악관을 나섰다.
정문까지 따라나오려던 대통령은 체신을 생각하는 간곡한 만류에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한서진을 떠나보냈다.
“언제든지 시키실 일이 있으면 불러만 주십시오.”
쓴웃음을 안고 백악관을 떠난 한서진은 SJ게이트 미국 본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크리스 대통령.”
“하하, 이제는 전 대통령이라 불러야지요.”
재임은커녕, 말기암 때문에 도중에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대통령. 그리고 사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 직후 암 치료제가 발명돼버리는 바람에, 세간의 측은한 눈길을 한 몸에 받은 인물.
사임 이후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없는 듯이 묻혀 지내던 그가 바로 SJ게이트 본사에 와 있었다.
“케인 대통령을 만나고 오시는 길인가요?”
“네, 새벽까지 독대를 했었는데 여러 가지로 난처했었습니다. 저를 무슨 신계에서 인간계로 잠시 나들이 나온 주신처럼 여기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그 친구가 독실한 신앙가이기는 하지요. 그래도 그 친구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박사님이 운신하기에는 한결 편하실 겁니다.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거라면 두 발 벗고 나서서 밀어붙일 테니까요.”
“그 분을 보니까 수퍼맨이나 다른 히어로들이 쓸데없는 고생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미국 대통령을 신도로 휘어잡으면 그런 고생을 안 해도 될 텐데요.”
“그럼 이야기가 안 되고, 시리즈가 팔리지를 않잖습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그 둘은 가벼운 농담을 곁들인 인사로 말문을 열었다.
한서진이 짓궂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제 다시 기업가로 복귀할 준비는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간 푹 쉬셨나요?”
“너무 쉬다 못해 온몸이 근질거릴 지경입니다. 어서 빨리 뭐라도 일을 벌리고 싶습니다.”
크리스는 대통령을 하기 전에도 자기 소유의 거대한 금융 회사를 운영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그에게, 이제 그 금융 회사는 별 볼일 없는 시시한 구멍가게에 불과했다.
“대통령님, 아니 미스터 크리스에게 현재 공석인 SJ게이트 회장 자리를 맡기고 싶습니다.”
“……SJ게이트라고요? 하지만 그건 로건 정 회장이 경영하고 있는 기업 아닙니까?”
“임시로 권한 대행을 맡고 있을 뿐, 그분도 언제까지 SJ게이트를 운영할 예정은 없었습니다. 현재 SJ게이트 회장 자리는 공석입니다.”
“…….”
“미국 대통령으로서 세계 정치 무대까지 겪어보신 몸이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웜홀 구축망 사업을 전개하고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데는 누구보다 탁월하실 거라 믿습니다. 미스터 크리스 외에는 적임자가 없습니다.”
원래 한서진은 SJ게이트를 크리스에게 맡기려 했었다. 다만 사임 직후 바로 그가 SJ게이트 회장을 맡은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시간을 끌었을 뿐이다.
전 지구적 웜홀망 사업, 그 총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미국 대통령 이상 가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다.
크리스의 눈이 뜨겁게 빛났다.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
“크리스 형, 저는 형의 영원한 부통령…… 아니, 부회장이고 싶습니다.”
“널 위해 내 오른쪽 자리를 비워둘게. 그때까지 미국을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