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1 새 터전 =========================================================================
의사는 H-5를 5회나 투여했음에도 치질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걸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잊고 있던 어떤 내용이 퍼뜩 떠올라서 급히 매뉴얼을 찾았다.
바로 H-5가 신체를 치료할 때 우선적으로 작용하는 조건 내용이었다.
―H-5는 대부분의 병변을 치유하기 위해 작용하지만, 특히 신체에 치명적인 병변부터 우선적으로 작용한다.
―투여 부위와 가장 가까운 병변부터 우선적으로 작용한다. 가능한 병변에 직접 주사하는 게 좋다.
‘설마?’
매뉴얼을 자세히 훑어본 뒤 의사는 다시 환자를 찾았다.
“환자분, 혹시 다른 지병을 앓고 있는 게 있나요? 접수하실 때 말씀 안 하신 건 없습니까?”
“네? 딱히 그런 건 없는데요.”
“과거에 병을 앓은 이력은요?”
“작년에 독감 한 번 앓긴 했었는데…… 그런 것까지도 다 말해야 하는 건가요?”
H-5를 5회나 투여했다면 분명 차도가 눈에 띄게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설마 치질은 치료하지 않는 건가?’
매뉴얼에 예시된 500가지 질환 중에 치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그룹은 분명히 못을 박았다. 500가지 질환은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 H-5의 효능이 발휘되는 데는 제한이 없다고.
실제로 H-5는 선천성 유전적 질환, 후천적 장애, 세균 및 바이러스성 질병 등 모든 병환에 작용했다. HIV 감염인 중에서는 H-5를 꾸준히 투여 받고 바이러스가 체내에서 완전 소멸한 이들도 나오고 있었다.
그런 완벽한 약이 고작 치질만 치료하지 않는다?
이거야말로 말도 안 된다.
“환자분, 아무래도 정밀검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환자분도 자각하지 못하는 다른 병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니 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환자는 처음에는 얼떨떨해했지만 결국 검사를 하겠다는 것에 동의했다. 먼저 혈액을 채취해서 검사를 했다.
피를 뽑으면서 환자는 불안해했다.
“저 혹시 다른 큰 병이 있는 건 아니겠죠?”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하는 겁니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세요.”
검사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의 마음도 불안해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 후, 그녀는 의사로부터 최종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뇌종양입니다.”
“네? 뭐라고요?”
내가 암이라니! 환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치 드라마속 비극의 여주인공이 된 듯한 좌절감에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의사는 냉정하게 분위기를 깼다.
“아, 걱정 마세요. 완치될 수 있습니다.”
“예?”
“초기이고 H-5를 지속적으로 투여하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치료 기간 중에도 얼마든지 일상생활 영위할 수 있고요. 그렇게 큰 병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저…… 그럼 생존율은 어느 정도나 될까요?”
“이 정도 병에 생존율을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
“젊고 건강한 사람이 몸살 좀 앓았다고 생존율을 따지지는 않잖습니까?”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줄 알고 실의에 빠질 뻔했던 환자는 의사의 냉정한 팩트 폭행을 받고, 현실로 끄집어 올려졌다.
“아, 그리고 보험 처리 될 겁니다. 지금까지 250만원 내셨죠? 그것도 환불받을 수 있어요.”
“네? 정말요?”
“뇌종양이니까 H-5를 투여해도 보조비 지원이 나옵니다. 본인 부담금은 얼마 안 되니까 안심하세요.”
환자는 침묵했다. 뇌종양이라는 말에 이제 죽는구나 하고 사색이 되었던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윽고 환자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그럼 치질은요?”
“……수술하시겠어요? 아니면 H-5 투여를 다시…….”
“투여할래요! 저 환불 안 받아도 되니까 암 다 나으면 다시 투여해주세요!”
“뇌종양을 치료하면서 치질 치료 병행도 시도 자체는 가능할 겁니다. 해볼까요?”
“네!”
병행 치료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알았다면, 환자는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저, 정말로 직접 주사하나요?”
“네, 그렇습니다.”
“제발요! 하다못해 엉덩이에 하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병변에 직접 주사하는 게 가장 큰 기대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뇌종양을 치료하는데 먼저 소모될 겁니다.”
그리고 매뉴얼은 틀리지 않았다.
두뇌 부근에 투여한 H-5 성분은 뇌종양 치료를 우선했지만, 항문에 주사한 H-5는 치질 치료를 우선한 것이다.
만약 뇌종양이 심각한 상태였다면 항문에 주사한 H-5도 뇌종양 치료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H-5 입장에서는 뇌종양이나 치질이나 거기서 거기인 병이었다.
―투여 부위와 가장 가까운 병변부터 우선적으로 작용한다. 가능한 병변에 직접 주사하는 게 좋다.
매뉴얼은 옳았다.
한서진은 한창 건설 중인 평성 일대를 방문했다.
새 저택인 H팰리스는 거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기본 골격은 완성되었고, 내부 인테리어와 정원 조성 마지막 작업만 끝내면 된다고 했다.
한서진은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둘러보았다.
원래는 에테르 스톰으로 모든 게 날아가서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이지만, 지금은 경기도를 능가하는 대규모 도시가 차근차근 그 밑그림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복합 과학 도시가 등장하는 게 정말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박사님.”
도시 건설 총책임을 맡고 있는 H건설 사장, 장두영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도시 이름은 정하셨는지요?”
“생각 중입니다.”
현재 평성 일대에 지어지는 초대형 과학도시는 가칭 H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서울을 능가하는 초대형 대도시로 거듭날 예정인지라, 벌써부터 세계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어느 성급한 경제학자는 런던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될 것이라며, 벌써부터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한서진이 거주한다는 것만으로 신도시는 가장 부유한 도시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
“신 과학도시는 여러 모로 세계에 이름을 남길 겁니다. 여러 모로 특별한 점들 투성이니까요. 기네스북 심사위원들은 벌써부터 신 과학도시의 특징을 정리 중이라고 합니다.”
“특징이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요?”
“넘쳐나지요. 이 정도 규모의 대도시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건설이 되었다는 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 점, 독재 정권이 자연재해로 쓸려나가고 그 땅 위에 새로 지어진 점…… 무엇보다 이런 초대형 도시가 단 한 명의 소유라는 점이 가장 특이합니다.”
장두영은 자신 있게 덧붙였다.
“아마 인류 역사상 다시는 이런 도시가 생겨나지 않을 겁니다.”
그 말대로, H타운은 경기도에 버금가는 면적을 하나로 묶은 거대한 단일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가 한서진의 소유라는 점이 제일 특별했다.
도시 전체가 사유지이기 때문에, 한서진이 마음먹은 대로 그 내부를 꾸밀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박사님, 그 생각은 정말 변함이 없으신 건가요? 도시 내에서 교통편 제공과 식수, 가스, 전기 공급을 완전 무료화하겠다는…….”
“변함없습니다.”
“3천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대도시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무료로 그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박사님이라 해도 손해가 아닐지…….”
“어차피 요금 자체를 대신 내주는 것도 아니니 재정적으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상하수도, 발전소 운영비 같은 것만 제가 부담하면 되니까요.”
도시는 별도의 독립된 공급시설을 갖추고 식수와 전기 등의 공공서비스를 공급한다. 한서진은 그 공급시설을 운영하는 비용만 부담하면 될 뿐이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전기나 식수 같은 것쯤이야 당연히 무료로 제공해야지요.”
“전기야 넘쳐나니 상관없습니다만, 식수는 조금 걸립니다. 비용뿐만 아니라 환경오염하고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고요.”
“바닷물을 정화해서 공급할 테니까 물 부족을 겪을 일은 없습니다. 폐수 역시 완벽하게 정화해서 바다로 다시 돌려보내면 되고요. 환경오염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에테르학은 과연 무엇이든 가능하구나. 장두영은 속으로 탄성을 내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신도시는 과학과 지식을 지배하는 최고의 터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두뇌들이 영원히 살고 싶은 그런 곳이 되어야 해요. 도시 전체를 하나의 대학이자, 연구소나 다름없는 곳으로 꾸며 주세요.”
“노력하겠습니다.”
장두영은 굳은 얼굴로 각오를 내비쳤다.
“뛰어난 학자들이 도시 밖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도록 모든 것을 갖추겠습니다. 테마 파크, 자연 절경을 갖춘 관광지, 유흥, 리조트, 스포츠…… 없는 게 없는 도시로 만들겠습니다.”
“그래요. 한 번 발을 들인 사람들이 다시는 도시를 벗어나고 싶지 않도록 만들어주세요.”
작은 레노지안.
한서진은 H타운은 그런 모습을 갖추기를 꿈꾸었다. 비록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멸망을 맞이하긴 했지만, 번성하던 시절의 레노지안은 그 어떤 사회보다 완벽했으니까.
현명한 군주 아래 만백성이 평등하고 행복한,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는 세상.
그는 H타운이 그런 부분을 조금이라도 닮기를 원했다.
‘돈이 많다는 건 참 이럴 때 좋네.’
한서진은 도시 전체를 거미줄처럼 뒤덮고 있는 도로망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시 규모에 비해 대로는 별로 안 보이는군요?”
“사실 12, 14차선 같은 큰 도로는 H타운에 별로 필요가 없어서요. 도시 어디든 웜홀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향후 구축될 웜홀망을 고려해서 도시 전체 모습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차량은 짐을 운송하는 수단 정도로 쓰이게 될 겁니다.”
“뭐, 집 앞 마트를 가는데 자동차를 쓰는 사람은 별로 없죠. 짐이 많다면 모를까.”
“H타운에서는 그 어떤 지역이든 자기 집 앞 마트나 다를 바 없어지게 될 겁니다.”
도시 내 이동수단으로 웜홀을 도입하려는 다른 대형 도시들은 현재 골치를 싸매고 있는 중이었다.
유동 인구 규모에 맞게 웜홀을 곳곳에 그물망처럼 설치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웜홀 설치 장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목 좋은 장소’를 이미 차지하고 있는 권리자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고.
그렇다고 한순간에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 도로 등을 폐기하고 그 자리에 일제히 웜홀을 설치할 수도 없었다. 단계별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동안 끊긴 교통망 때문에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도시 간 웜홀에 비해서 도시 내 웜홀은 진통을 겪는 중이었다.
하지만 H타운에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백지에서부터 모든 걸 쌓아올리고 있기에, 기초부터 깔끔하게 채워나갈 수 있으니까.
“장담하건데 H타운은 자동차가 전혀 필요 없는 초대형 대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겁니다.”
“자동차 산업도 사양길로 접어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서진은 문득 세연동 지하 주차장에서 잠들고 있는 수많은 수퍼카들을 떠올렸다.
앞으로 타고 다닐 일이 없어질 것 같은데,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드라이브를 즐겨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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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X 망하는 소리 들린다......
ps : 제가 한 번 풍성한 머릿결을 직접 인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의 풍성함을 불신하는 이단자들이 있군요. 그분들은 불신을 버리지 않는 한 탈모빔을 맞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