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531화 (531/609)

00531  하늘의 눈동자  =========================================================================

“이제 좀 조용해지겠어.”

H-5를 세상에 내놓은 한서진은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초저농도로 희석한 엘릭서인 H-5는 오리지널만큼 강력한 치유 효과는 없다. 잘려나간 신체 부위를 돋아나게 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대신 모든 병에 골고루 작용한다는 이점이 있다. 장기간 꾸준히 복용하면 어지간한 병은 완치가 된다. 또 모든 병의 진행 속도를 멈출 수 있다.

특정 질환 치유에 특화된 다른 H시리즈에 비하면 단일 효능은 덜하지만, 광범위한 질환에 쓸 수 있는 것이다.

“의약 쪽은 이제 신경을 꺼도 되겠지.”

중증 난치성 질환의 경우 완치까지 최대 1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엘릭서의 농도를 워낙 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질환에 차별 없이 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정도 핸디캡은 지워놔야 세상이 받아들일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시기만 하면 그 며칠 안으로 모든 병을 털고 일어난다고 상상해보라. 그 혼란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H-5의 반응이 아주 뜨겁습니다. FDA에서 이번 달 안으로 시판 승인을 내줄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임상 시험 시작한지 아직 두 달도 안 되지 않았습니까?”

보통 신약이 개발되고 정식 시판까지 10년은 너끈히 잡아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H시리즈의 승인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H-5의 시판 승인 속도는 H시리즈 중에서도 전설로 칭해도 무방할 정도로 최단기간 안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의회에서 예전에 H시리즈를 위해 제정한 ‘한서진 FDA법’ 덕분이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방대한 임상시험 결과를 취득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상이 한 목소리로 H-5를 원하고 있으니까요. 탈모 치료제인 H-2의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주문 예약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공장으로 생산 일정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무리입니다.”

“…….”

박현준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단언했고,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한서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캘리포니아 생산거점이 매우 큰 규모이기는 하나, H-5는 유례가 없는 놀라운 신약입니다. 전 세계에서 모든 환자들이 원하고 있는 약입니다. 심지어 대체품도 없고요. 머지않아 지구상의 모든 병원들은 H-5만 쓰게 될 겁니다. 정말 간단한 증상일 경우를 제외하면요.”

“…….”

“그런 수요를 감당하려면 지금 생산 규모로는 터무니없이 모자랍니다. 기획부에서 생산 추이를 예측했는데, 지금 우리 생산 속도로는 밤낮으로 공장을 풀가동해도 주문양의 5%도 채 맞추지 못합니다.”

영원그룹이 얼마 전 캘리포니아에 새로 설립한 제2공장은 매우 큰 규모와 시설을 자랑했지만, 그것은 H-5의 개발을 가정하지 않았을 때 지어진 공장이었다.

모든 환자, 그리고 모든 질환에 효과를 발휘하는 만병통치약이 만들어질 줄 그때 누가 알았겠는가.

“그럼 공장을 추가로 확장해야겠군요.”

“적어도 지금보다 30배 이상은 확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확장 공사가 완공될 때까지 당장 가동할 수 있는 공장을 인수해야 합니다.”

“지금 영원그룹에 유동 현금이 얼마나 있습니까?”

“300억 불 조금 안 되게 있을 겁니다.”

“……300억 불이라고요?”

한서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영원그룹이 설립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만한 돈을 모았단 말인가?

“H-2가 아주 불티나게 팔리고 있어서요. 전 세계 탈모인들의 희망입니다.”

“발모제 장사가 그렇게 잘 될 줄은 몰랐네요. H-2 시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300억 불이라나…….”

원화로는 30조 원.

게다가 매출이 아니고 모든 경비와 세금까지 다 내고 남은 순수익 아닌가.

“그 돈은 굳이 영원그룹 밖으로 뺄 필요가 없겠군요. 회사를 운영하는데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영원그룹은 지주회사인 에스코너가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고, 에스코너는 100% 한서진 소유다. 영원그룹이 알뜰히 발모제 팔아서 번 돈을 굳이 외부로 뺄 필요는 없었다. 어디에 있든 어차피 한서진 돈이니까.

“그 돈이면 따로 추가 자금 수혈 없이 공장 확장을 시도할 수 있겠군요.”

“그럼 허락하시는 것으로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세요.”

한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바를 덧붙였다.

“회장님은 제가 왜 H-5를 시판하기로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제약 쪽은 더 이상 깊이 신경 쓰고 싶지 않으셔서 그런 것 아닌가요?”

“이해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제가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요. 당분간은 제약이나 의학 쪽은 깊이 마음을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약업에 몸을 담은 입장에서 아쉬운 결정입니다만, 워낙 박사님을 찾으시는 곳이 많으니 어쩔 수 없지요. 모두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입만 벌리고 박사님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과장된 표현에 한서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지금 과학계는 영역을 가리지 않고 에테르학 열풍이 불고 있었으며, 모두가 한서진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자신들의 영역에 짠 하고 나타나서 계시를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박현준의 표현은 그런 작금의 광경을 정확히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H-5를 공개한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한서진을 찾아 몰려들었다.

“제약은 이제 어느 정도 평정했으니, 이제 우리 화학에도 손을 써주시는 게 어떻소?”

“어허, 우리 반도체공학이 더 급합니다. 지금 슈나우저와 비글, 코카 스패니얼 이후로 전혀 차세대 반도체가 나오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현대의학은 한서진 박사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사님은 의사 면허나 학위만 없을 뿐, 실질적으로 의학박사를 넘어서는 의학 지식을 갖춘 대가이신 것으로 아는데, 부디 후학들을 위해 나서 주십시오.”

“이미 H-5를 내놓았잖소! 의사들은 이만 빠져!”

“그건 제약이지 의학의 발전과는 큰 상관이…….”

“아니, 만병통치약을 만들었으면 그게 의학에 기여한 거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무튼 의사들은 이만 빠져!”

“박사님, 우리 인류는 언제쯤 화성에 진출할 수 있을까요? 이제 그만 슬슬 우주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학자부터 의학자, 그리고 나사에 이르기까지, 한서진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강렬한 목마름을 품고 있었다.

한서진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H-5를 내놓으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제약계에 선물을 내려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이들도 달려들어 요구하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자기 입부터 먹이를 넣어달라고 짹짹거리는 아기새떼를 보는 것 같았다.

결국 한서진은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세연동 저택에 틀어박히기로 했다. 어디로 행차만 했다 하면 나이 든 과학자들이 극성팬처럼 우르르 몰려드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들의 경력과 권위, 영향력을 생각하면 차마 경호원으로 인의 방패를 형성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백철중과 대작하던 중 그 이야기를 하며 하소연을 하자, 그는 즐겁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원래 사람을 다룬다는 게 그만큼 힘든 걸세. 뭐 하나 베풀려 하면 여기저기서 자기들도 해달라고 조르지. 그런 ‘내 사람들’을 관리하는 게 제일 힘든 게야.”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게 제일 편했던 것 같습니다.”

“그간 한 서방 자네가 사람은 거의 상대 않고 반도체와 에테르만 주로 상대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됐지. 자네가 무엇을 연구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니까.”

백철중은 술을 한 입에 털어놓고, 목소리를 낮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근데 혹시 H-5에 그런 효능은 없나? 얼굴과 몸이 좀 젊어진다던가, 이를테면 20대 청년 시절로 말일세.”

“…….”

“역시 없겠지? 그렇다면 그런 약을 따로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장인어른, 당신마저!

한서진은 가벼운 배신감에 함락당한 채 백철중의 저택을 나와야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리무진 안에서 송하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하소연을 했다.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아빠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은근히 주책이에요. 그러려니 하고 그냥 흘려 넘기세요.”

“아니, 할 수는 있어. 하지만 내가 고달파 하시는 걸 뻔히 아시면서 그 자리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어.”

“오빠, 그보다는 안 늙는 약부터 만드는 건 어때요? 그게 더 만들기 쉬울 것 같은데.”

“하나야, 어떻게 너마저…….”

한서진은 기력을 잃고 축 늘어져버렸다.

가상현실 단말기, BII에 접속한 한서진은 타르타로스 3가 있는 평성 연구실 신사옥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정말 그곳에 와 있는 것은 아니고, 그곳을 재현한 가상현실에서 초인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정말 끝이 없구나.”

지금까지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것만 해도, 천재 수천 명의 위업을 합친 것도 가볍게 비웃어줄 정도다. 그야말로 인류의 문명 그 자체를 바꿔놓았다.

그런데도 세상은 자신이 더욱 더 일을 하길 원한다. 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종사하는 분야에 우선적으로 축복을 내려주기를 바란다.

“레노지안이 왜 태양을 탐내다가 멸망했는지 알 것 같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못하게 잘 막아야 할 것 같다.

한서진은 타르타로스 3 주위를 유영하며, 조용히 돌아가고 있는 프로그램을 확인했다.

타르타로스 3에 꽂힌 신살검 위에는 반투명한 빛의 구체가 조용히 회전하고 있었다. 바로 지구의 모습을 직경 5미터 정도로 축소한 것이다.

실제 지구의 크기에 비하면 작은 구체지만, 그 미세한 정밀함은 경이로울 정도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지역이든 얼마든지 확대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방금 10분 동안 1,500명이 넘게 죽었네. 그리고 1,600명이 넘게 또 새로 태어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살아가고, 그리고 죽는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삼라만상, 그것이 직경 5미터의 구체에서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가상공간에서 의식 상태로 지켜보고 있으니, 정말로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손을 쓸 수도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또 태어난다. 그것을 막연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사람의 삶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초연해지게 된다.

만약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인간의 삶에 일일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바로 그때였다.

“사람이 찔렸네. 강도인가?”

그런 강력 범죄는 지구 전체에서 하루에도 무수히 일어난다. 그러나 한서진이 유독 눈여겨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는 우리집 바로 앞이잖아?”

============================ 작품 후기 ============================

한서진 아직 겨우 1회차인데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 환생 10회차쯤 되면;;;;

물론 저는 1회차 인생만 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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