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30 하늘의 눈동자 =========================================================================
영원그룹은 제약업체 중 세계 제일로 취급받고 있었다.
매출 때문이 아니다. 영원그룹의 매출이 천문학적이긴 하지만, 아직 전통 있는 제약업체의 매출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간문제일 뿐, 머지않아 영원그룹이 매출 세계 최고를 찍을 거라고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영원그룹이 세계에서 으뜸으로 취급받는 것은 H시리즈의 놀라운 효능과 인지도 덕분이었다.
간을 세포 단위부터 시작하여 완벽히 재생시켜 줌으로써 그 어떤 간 질환도 완벽히 정복하게 해준 H-1.
탈모라는 개념 자체를 삭제하여 전 세계 수많은 탈모인들에게 광영을 찾아준 H-2.
그 어떤 암이라도 완벽하게 치료하여, 암을 감기나 다름없이 만들어버린 H-4.
그 세 가지 약으로 인해 영원그룹은 단번에 세계 최고의 제약업체라는 반석에 올라선 것이다.
그저 회사 총매출이 다른 정통 제약업체보다 떨어질 뿐, 탈모제 겸 제모제인 H-2의 경우, 단일 약품으로는 세계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고 있었다.
―근데 영원그룹은 왜 H-3를 공개하지 않는 건가?
―극소수의 부자들만을 위한 불로불사의 약이라도 되나? 대체 왜 H-3는 공개하지 않는 거지?
항간에서는 H시리즈가 1, 2, 4만 있는 걸 가지고 온갖 음모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그룹은 그 모든 음모론과 질문에 꿈쩍도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실 박현준 회장도 H-3가 존재하는지, 있다면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하늘같은 오너에게 그런 게 실존하느냐고 감히 먼저 물어볼 수도 없었다.
평범한 제약회사 차장이었던 자신이 지금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 한서진 덕분이다. 어떻게 감히 그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를 일을 하겠는가.
연봉 7천의 샐러리맨에서 연봉 50억의 최고경영자가 된 것은 모두 한서진의 은혜 덕분인데.
아무튼 주력 제품은 겨우 4종에 불과한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영원그룹은 제약업계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위명을 누리고 있었다.
“그거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영원그룹 말이야. 최근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던데. 임상시험 준비 하고 있나 봐.”
“신약?”
빈 커피잔을 들고 있던 백인 남자는 동료의 말에 갸웃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영원그룹에 제대로 된 신약개발팀이 있었나?”
“없지.”
“글로벌 제약업체이면서 신약개발부서가 없는 회사잖아.”
“그럼 이번에도?”
“그래, 한서진 박사가 뭐 하나 개발했나 봐.”
“흐음……. 지금쯤 본사는 난리 났겠는데.”
화이자, 두 남자가 몸담고 있는 회사였다.
한때는 바이엘과 더불어 전 세계 제약업계를 좌지우지했던 쌍두마차, 그러나 영원제약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그 위명을 내려놓을 때가 가까워졌다.
“한서진 박사가 이번에는 무슨 신약을 개발했을까? 제발 비아그라를 넘어서는 성기능 치료제는 아니면 좋겠는데.”
“다른 제약업체들도 지금 초긴장 상태더라고.”
“그럴 만하지. 만약 자기들 주력 상품하고 영역이 겹치면 그 시장은 철수해야 한다고 봐야 하니까.”
탈모 치료제인 H-2 개발로 인해 미녹시딜과 프로페시아 등 기존 발모제가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된 건 아주 유명한 일화였다.
덕분에 그 뒤로 제약회사들은 신약 개발에 주저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과 돈을 들여 약을 개발해도, 한서진이 그 분야의 신약 하나를 내놓으면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린다.
화이자도 마찬가지, H-2가 공개된 이후 신규 신약 개발 착수를 완전히 포기했으며, 암 치료제인 H-4가 개발된 이후로는 기존에 진행 중이던 신약 연구 사업도 모두 폐기해버렸다.
지금 제약 업계의 트렌드는 기존에 만들어진 의약품을 약간만 개량하는 식이었다. 큰 투자를 하지 않고 현상 유지에만 남은 힘을 쏟아 붓는 중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한서진 박사가 제약업을 완전히 독점하는 게 낫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다들 한 박사 눈치만 보느라 신약 개발을 전혀 안 하잖아. 덕분에 환자들만 고통받고 있고.”
“우리 지갑도 고통 받고 있지. 애들은 무럭무럭 커 가는데 연봉은 늘 계획이 없으니. 인센티브도 줄줄이 깎여 나가고.”
신약을 개발해도, 한서진이 겹치는 약을 만들어버리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기존 약으로 차도가 없는 환자들도 고통 받고 있고, 제약업체 종사자들은 늘지 않는 연봉에 고통 받고 있었다.
영원그룹, 정확히는 한서진이 내놓은 신약은 미국 의료 시장에서 곧바로 임상실험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 실험 과정이 알려지자 제약 및 의료 종사자들은 어리둥절했다.
“뭐야? 이 신약, 대체 무슨 효능이 있는 거야?”
“임상 시험 분야가 왜 이렇게 다양해? 설마 한서진 박사가 신약을 한 개만 만든 게 아니고 수십, 수백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서 내놨나?”
“아니아니, 그건 아니야. 여기 보면 실험 신약은 H-5 한 종류라고 되어 있잖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통 약의 기대 효능이라면 몇 가지에 국한되기 마련이고, 그것에 걸맞는 피실험자들만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H-5는 가벼운 감기 환자에서부터 치매, 뇌성마비, 폐렴, 당뇨, 신부전증, 심지어 중증 루게릭병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들에게 투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낭성증후군 환자도 있어?”
“뭐야, 초고도 근시 환자는 대체 왜 명단에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실험 대상자 선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세계 의료계는 패닉에 빠졌다. 대체 영원그룹이 알아보고자 하는, H-5의 기대 효능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효과가 있어?”
“이게 뭐야? 모든 실험 대상자들이 눈에 띄게 차도를 보이고 있는데?”
“와, 아니 이게 말이 돼?”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질환을 가진 이들 모두가 눈에 띄는 차도를 보인 것이다.
특효약이 존재하는 질환, 치료약이 존재하지 않는 질환 등 구분이 일절 없었다.
약을 투여하자마자 완치돼서 벌떡 일어난다거나 하는 기적은 없었지만, 분명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쯤에 이르러 영원그룹은 드디어 일반 언론에 정확한 약의 기대 효능을 공개했다.
“H-5의 정확한 기대 효능은 신체의 붕괴한 밸런스와 이상 상태를 바로잡는 것에 있습니다.”
벌떼처럼 몰려들었던 기자들은 처음에 박현준 회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붕괴한 밸런스와 이상 상태를 바로 잡는 것이라니요? 구체적으로 어떤 뜻입니까?”
“아,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그 이상으로 구체적인 개념을 잡기가 어렵군요.”
신체의 붕괴한 밸런스와 이상 상태를 바로 잡는다?
이게 현대 의약품의 효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기는 한 건가?
어느 누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질문했다.
“그럼 만병통치약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이상 상태를 바로잡는다고 했으니까 뭐 병명을 가리지 않고 모든 병에 듣는다, 그런 의미로 해석해도 됩니까?”
“말도 안 돼. 그런 약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하하, 박현준 회장이 농담도 참 이상하게 하네.”
여기저기서 오가던 농담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그러다가 심각한 분위기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모든 질환에 효과가 있지 않았나?”
“맞아, 분명히 그랬었지.”
“당뇨병 치료제인 줄 알았는데 루게릭병 환자한테도 차도가 있는 걸 보고 기겁했던 기억이 나.”
“……진짜 만병통치약이야?”
여기저기서 심각하게 수군거린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광경에, 박현준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가볍게 단상을 두드려서, 기자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만병통치…… 그렇게 부르기에는 조금 오만한 듯합니다.”
“…….”
“다만 개발 과정에서, 모든 환자들에게 똑같이 효과를 발휘하는 약은 없을까 하는 고심에서 출발한 노력이 담긴 약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H-5.
만능치료제라는 핵폭탄이 의약계에 투하되었다.
“H-5가 유례없는 대성원에 힘입어, 조만간 FDA의 정식 시판 승인을 받을 듯합니다. H시리즈 중에서도 비교를 거부하는 놀라운 속도인데요.”
“정말 놀라운 효능입니다! 가벼운 감기부터 당뇨, 그리고 루게릭병까지! 그야말로 작용하지 않는 질환이 없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다른 H시리즈처럼 폭발적인 효능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인데요. 다른 H시리즈가 한 가지 영역에만 특별화 된 특전사라면, H-5는 모든 영역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다재다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고 봐야 하겠죠?”
“동화 속에서나 가능할 줄 알았던 만병통치약, 그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매스컴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H-5 특집을 열어가며 무료 홍보를 해주었다.
임상 시험 결과, 그것은 이제 놀랍다는 말조차 지겨울 정도로 모두의 기대대로 흘러갔다.
단 한 건의 부작용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H-5를 투여한 환자들은 모두 일정한 차도를 보였다.
H-5는 병을 가리지 않고, 모두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병의 종류에 따라 쾌유 효율에 차이는 있었으나, 분명한 것은 어느 병이든 효과를 보였다는 점이다.
뾰족한 치료 수단이나 치료약이 없는 희귀난치병 환자와 그 가족들은 두 팔을 벌어 환영했다.
“한서진 박사님, 감사합니다!”
H-5는 어느 병이든 치료 효과를 보였고, 그리고 그 약효 또한 기존 약보다는 뛰어났다.
영원그룹 홍보실은 H-5의 주요 질환 500가지를 뽑아, 그에 대한 구체적인 치료 기대치를 따로 정리해서 발표했다.
“A형 독감의 경우에는 4일 동안 투여시 완치를 기대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조현병의 경우 200일 투여시 정상인과 동일한 수준까지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에도 지속적으로 투여해야 하며, 약을 끊어도 될 만큼 완치가 가능한 수준까지 되려면 얼마나 더 투여해야 하는지는 검증을 더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당뇨병의 경우에는…….”
“H-5는 여기 표에 적힌 500가지 질환에만 작용을 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H-5는 체내의 시스템 교정을 통해 뒤틀어진 부분을 개선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모든 질환에 효과를 보입니다만, 일단 특별히 우선 공표할 필요가 있는 질환 500가지를 선별한 겁니다.”
“유전적 질환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은, 설마 잘못된 유전자나 염색체 자체를 개조하는 원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잘못된 설계에 의해 나타나는 신체 발달에 강제로 개입한다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즉 세포가 잘못된 설계도를 들고 나서지 못하도록 중간에 차단하는 거라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투여하면 더욱 높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물었다.
“H-5의 범용성이 놀랍기는 하지만, 다른 H시리즈가 특정 질환에 보이는 놀라운 치료 효과에 비하면 많이 미흡한 수준입니다. 혹시 한서진 박사님은 더 이상 의약 개발에 신경 쓰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H-5를 만드신 건가요?”
박현준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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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귀찮아한다는 걸 들켜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