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529화 (529/609)

00529  하늘의 눈동자  =========================================================================

H컨설턴트는 국내 50대 재벌 그룹의 산하 계열사 중 35% 이상 경영권을 확보했다. 말 그대로 돈을 하늘에서 융단 폭격하듯 뿌려대며 공격적으로 지분을 확보한 덕분이었다.

국내 재계의 특성상, 순수 오너 일가가 보유한 지분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아 가능했다. 지분의 과반을 사들일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H컨설턴트는 경영권을 확보한 후, 회사에서 오너 일가와 연관이 있는 경영진을 모조리 쳐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젊은 피 위주로 수혈했다.

반발도 적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중요한 이 시기에 능력 검증이 안 된 젊은 경영인 체제로 굳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회사 경영 사정이 악화될 겁니다!”

이에 대한 H컨설턴트의 태도는 간단했다.

“우리가 지금 취하는 인사의 목적은 오너 일가의 잔재를 완전히 죽여, 아니 지우는 것이지 단기적인 이윤 창출이 아니다.”

반발하고 나섰던 일부 주주들은 H컨설턴트의 답변에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지우는 것’이라고 말하기 전,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언급에서 H컨설턴트가 무엇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실제로 H컨설턴트는 오너 일가의 영향력을 완전히 숨 끊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횡령, 배임, 비자금 조성 등을 이유로 형사 조치를 취하고 그들에게 천문학적인 민사 소송을 걸었다.

경제범죄 문제는 재정감시 TF팀이 돌아가던 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것이지만, 검찰의 행정 능력 부족 때문에 100% 실현되고 있지는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검찰은 밤낮으로 불이 켜진 채, 무수한 검사들이 야근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H컨설턴트가 제공하는 경제범죄 사실을 모조리 기소 진행하기에, 인력이 모자랐던 것이다. 아직도 순번 대기표를 받아든 채 수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건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그래서 H컨설턴트는 영리하고 합리적인 수를 두기로 했다.

민사소송을 거는 한편, 교섭자를 보내 경영권을 확보한 그룹의 오너와 협상을 벌인 것이다.

제일 먼저 몽둥이를 맞게 된, 재계 순위 22위의 KIO 그룹 전 회장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이, 이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회장님 일가가 회사에서 부당하게 빼돌린 것으로 파악된 돈만 인정한 겁니다. 여기에 연 이율 29%, 물론 이자에는 이자가 붙지 않습니다. 그리고 범칙금 성격으로 총 횡령액에 300%를 추가로 책정했고, 아 여기에 다시 연 이율 29%를 적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책정된 총 청구액은 실로 까마득한 수치였다.

자그마치 회장 일가가 지닌 사재의 70%가 넘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회사 돈이었으니 당연히 돌려주시는 게 합당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이건 부당하네! 이런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협상이 결렬되면 저희로서는 자구책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GK그룹 사건은 기억하고 계시죠?”

KIO 전 회장은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방산비리 사건에 휘말려 한서진에 의해 본보기로 ‘공개처벌’ 당한 일가 아닌가.

GK회장 일가가 보유한 금융 자산이 모조리 증발한 것은 아직도 재계에 전설처럼 회자되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재벌들은 급속히 몸을 사리며, 자신들이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알겠네…….”

KIO 전 회장은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며,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민사 소송으로 몰고 가서 질질 끌어도 얻을 게 없다.

H컨설턴트가 자력구제를 취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하지만 거래를 받아들이면 조금이나마 재산을 건질 수 있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당하게 취득한 이익에 약간의 벌금과 이자만 붙여서 회수하는 것만으로도, 저희로서는 매우 너그러운 처사를 보인 겁니다.”

“…….”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H컨설턴트가 경영권을 확보한 오너 일가들은 곧 차례차례 교섭자의 방문을 받았고, 협상을 강요당해야 했다.

없는 죄를 지어내서 강탈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게 실존했던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법에 호소할 수도 없었다.

상황파악을 못하고 교섭을 거부한 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이들에게 H컨설턴트는 두 번 협상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언론을 이용했다. 오너 일가가 취한 부당이익과 그 내역, 방법을 낱낱이 세상에 공개를 한 것이다.

순식간에 오너 일가는 죽일 놈이 되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서진이 직접 움직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제야 깜짝 놀란 오너들은 부랴부랴 H컨설턴트에 찾아와서 재협상을 부탁했다. H컨설턴트는 청구액에서 20%가 증가한 금액으로 재협상안을 내놓았고, 오너 일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야 했다.

“오랜만이네.”

한지혜는 눈앞에 앉은 청년을 두고, 감회가 새로웠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다. 후련함이나 통쾌함은 아니다. 그리움의 충족도 아니다.

그녀는 일부러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청년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오빠.”

“잘…… 지냈어?”

“내 소식은 나름 듣고 있었을 거 같은데. 아니야?”

“여기저기에서 듣기는 했어. 아주 잘 지내는 거 같더라.”

“친오빠 잘 만난 덕분이지. 한지혜 인생이 이렇게 활짝 펼 줄 누가 알았겠어.”

뉴월드그룹 부회장, 정준석은 어려운 표정을 한 채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참 까마득하게 쌓인 안색이었다.

“아직 혼자라며?”

“마땅한 남자가 있어야지. 오빠는 결혼했어?”

정준석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태 혼자 지냈어. 너와 헤어지고 나서 쭉.”

“저런, 혹시라도 설마 나와 다시 잘 될 걸 기대하고 그랬던 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해?”

“그럴 수도 있잖아. 오빠가 나 얼마나 많이 좋아했는데.”

“…….”

“그리고 내 집안 사정도 좋아졌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이제야 기억난다. 네 그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좋아서 반했던 거.”

“나도 기억나. 나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었던 남자가, 돈 많은 재벌 엄마한테는 꼼짝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거.”

“지혜야, 그건…….”

“그만하자. 옛날이야기 꺼내놓고 회포나 풀자는 자리 아니잖아, 지금? 안 그래?”

“…….”

“오빠가 부회장이라고 들어서 그래도 내가 나온 거야. 원래라면 담당실장 보내서 통보식으로 처리해. 알고 있지?”

덤덤한 목소리는 차갑지도, 날이 서 있지도 않다.

그 건조함 속에서 정준석은 느꼈다. 지난 몇 년의 시간은 그녀의 마음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버렸음을.

“옛 정에 기대어 보려고 한 건 알겠어. 조금은 오빠 생각대로 넘어가주고 싶기도 해. 나도 사람이고, 여자거든.”

“…….”

“그래서 말인데, 오빠 가족들이 갖고 있는 그룹 지분 전부 넘기고 손 떼. 그럼 다른 그룹처럼 따로 배상 청구나 압박 같은 건 안 넣을게.”

한지혜는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재벌의 자리를 버리고, 평범한 자산가로 변신할 것을. 재벌 총수 일가로서 쥐고 있던 모든 권력을 내려놓을 것을.

“내가 일부러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인 거 알지? 다른 그룹 오너들이 알면 차별이라며 속으로 끙끙 앓을 걸? 대놓고 말은 못하겠지만.”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질척하게 매달리지 않아줘서 고마워.”

“너 원래 그런 거 싫어하잖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우리 헤어질 땐 왜 그랬대?”

“……난 그게 잘 안 되는 거, 너도 알잖아.”

한지혜는 피식거리며 정준석을 빤히 주시했다.

몇 년 전 완전히 끝난 인연. 이렇게 다시 마주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특별한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순수한 과거일 뿐이다.

“오빠 어머니는 어때?”

“오늘 만남에 기대 엄청 하고 계셨어.”

“안 됐네. 그 기대를 내가 무참히 깨드리게 됐으니.”

“상관없어. 집기 좀 깨지고 끝나겠지.”

“별로 마음이 안 좋다.”

“괜찮아. 내 앞에서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사실 약간 신나고 궁금하긴 해. 그게 전부, 그 이상의 감정은 없어.”

한지혜의 표정은 거짓말을 담고 있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준석은 씁쓸히 웃으며 협상을 위해 늘어놓은 서류를 다시 챙겨 넣었다.

“배려해줘서 고마워.”

“나중에 결혼할 때 청첩장 보내. 내가 반드시 갈 테니까.”

“……알았어.”

그렇게 몇 년 만에 만난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섰다.

그녀의 마음은 아무렇지 않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금방 다른 업무에 정신을 빼앗겼다가, 몇 시간 뒤 아까 일이 잠깐 생각나고 다시 가라앉을 만큼.

“현재 속도로 추산하자면, 늦어도 2년 안에 국내 50대 기업의 모든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을 듯합니다.”

H컨설턴트 부사장 김범석이 한서진을 직접 찾아와서 보고했다.

한서진은 가만히 끄덕여 보인 뒤 말했다.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체념하는 분위기입니다. 사실 쥐꼬리만 한 지분으로 회사 전체를 좌지우지했던 게 말이 안 되는 거지요. 우호지분도 모두 우리 편을 들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도 정권이 일을 잘해주고 있군요. 놀랐어요.”

“저도 놀랐습니다.”

도원패는 국회의원 시절, 한서진과 가벼운 마찰이 있었다.

기득권의 일원이자 이익 대변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도원패와, 그 반대인 한서진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원패가 대선에 나왔을 때, 한서진의 방해로 떨어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한서진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특별한 경쟁 후보가 없던 덕에 도원패는 무난하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이후 도원패는 한서진에게 딱히 태클을 걸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지내왔다.

그러던 두 사람이 이런 협조 관계를 구축하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도원패와 한서진은 평소에 서로 얼굴을 맞대거나 통화를 하지도 않는다. 교류가 전혀 없다.

“현재 여의도를 중심으로 박사님께서 도 대통령에게 은퇴 후 대가를 약속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협조적으로 나올 수가 없다고…….”

“대통령이 사회 부조리를 척결하는 게 저에 대한 협조라고 해석하는 관점도 참 우습군요. 아,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재미있는 건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도 대통령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그게 그 사람들 진심이지요.”

“부러워할 것까지야.”

한서진은 피식거렸다.

하나만 볼 줄 알고, 둘은 못 보는 사람들 아닌가.

도원패는 백철중이 약속한 퇴직금 3조 원을 철썩 같이 믿으며, 자신을 위해 선봉에 서서 칼을 휘두르고 있다.

‘3조 원이야 주면 그만이지. 하지만…….’

도원패의 과거 행적을 들추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준 적은 없다.

3조 원의 퇴직금을 지급하고, 그걸 쓰지도 못하게 감옥에 처넣는다면? 결과적으로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다.

“뭐, 지금보다 더 일을 잘한다면 공으로 과를 덮어줄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지요. 아직 임기는 남았으니까요.”

============================ 작품 후기 ============================

그의 운명은 퇴임식 날 한서진의 기분이 어떤지에 달려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