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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27화 (527/609)

00527  한 걸음  =========================================================================

존 그랜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분위기는 적당히 화기애애했다. 자신을 보는 정지원의 눈에도 호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촉을 믿고 질렀는데, 눈 하나 꿈쩍도 않는다. 웃으면서 면전에서 거절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연히 이런 상황을 대비한 수많은 변명과 해명과 설명과 논리가 들어 있었다. 그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논리정연하게 꺼내서 상대를 설득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과 거절을 띤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마치 처음 웅변대회에 나온 초등학생처럼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모든 상황을 대비해서 만들어둔 선택지가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굳은 채로 움츠러들었다. 뇌세포 밖으로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스탠더드 오일은 다국적 석유업체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석유업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존 그랜숀은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SJ인더스트리의 주주이자 CEO가 그런 말을 하다니.

매 시즌마다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는 방어율 0점대의 메이저리그 좌완 파이어볼러 투수로부터, ‘좋겠다. 너 공 잘 던지네. 부럽다.’라는 말을 들은 KBO 프로구단 만년 2군 선수도 이보단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스탠더드 오일은 지금까지 그 규모와 위상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기업은 매년 많은 기부금을 내고,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해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은, 그 활동량이 귀사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 점이 있다는 겁니다.”

“…….”

존 그랜숀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뭐라도 부드럽게 반박을 하고 싶지만,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정지원의 눈동자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예감을 받았다.

틀림없다. 지금 저건 거짓 웃음이다.

“스탠더드 오일은 충분히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지금 회사 통장에 쌓아둔 사내유보금만 1, 2조 달러가 거뜬히 넘어가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는 사회에 양보를 해줘도 된다고 생각되는군요.”

사내 유보금이 그 몇 십 배, 혹은 몇 백 배나 되는 회사 CEO가 저런 말을 하니 더욱 기가 막힌다. 심지어 SJ인더스트리는 창립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SJ인더스트리에 석유 처리 비용을 지불하는 게 어째서 사회에 대한 양보가 되는 겁니까?”

“정확히는 SJ인더스트리가 아니라 에스코너죠. SJ인더스트리는 에테르 석유에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

“그리고 4%의 수익은 우리, 아니 한서진 박사님께서 갖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존 그랜숀은 이해가 안 됐다. 에스코너는 100% 한서진의 소유인데, 에스코너에 지불하게 되는 비용이 한서진 주머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니?

“박사님께서는 그 돈을 자선사업과 구호사업에 모두 쏟아 부을 계획입니다.

“예?”

죤 그랜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4%면 천문학적인 금액인데…… 그걸 모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정지원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자선사업에는 귀사의 이름도 넣어드릴 겁니다. 오히려 박사님의 이름보다 더 크게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죤 그랜숀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머릿속으로 다른 계산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한서진이 벌이는 자선사업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만약 거기에 스탠더드 오일의 이름을 끼워 넣는다면, 4%의 금액을 홍보비로 지출하는 거라 여기면 된다.

물론 대기업만을 상대하는 스탠더드 오일의 특성상 브랜드 광고의 효과가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서진과 함께 구호사업을 벌인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말로 환산하기 힘든 가치를 지닌다.

‘어차피 한서진 석유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환경오염이 전혀 없는 석유, 이미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의 환경단체들은 발칵 뒤집혔다. 그들은 물을 만난 범고래처럼 매일 같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여댔다.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기존 석유를 모두 중단하고, 깨끗하게 처리 된 한서진 석유(혹은 에테르 석유)만 허용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특히 미국이 하반기부터 한서진 석유만 허용하겠다는 전격적인 결정을 함으로써, 유럽의 환경단체들은 더욱 더 힘을 얻었다.

저거 봐! 미국은 이미 벌써 했잖아! 근데 왜 우리는 안 해!

이런 날선 주장이 매일같이 부르짖고 있으니, 유럽의 정치인들은 하루도 두통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한서진 박사님께서는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석유를 깨끗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죠. 그 처리 비용조차 순이익의 4%라는 합리적인 수준이고, 그 수익 전액을 반영구적으로 국제 구호사업에 쓸 예정입니다.”

“…….”

“객관적인 사실들만 봅시다. 이런 상황에서 한서진 박사님의 결정에 감히 태클을 걸 수 있는 사람이나 세력이 있을까요?”

있을 리가 없다.

누가 봐도 한서진은 인류의 보편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기부한 것이다.

석유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에 기여했고, 그 수익을 다시 기아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에 내놓는다. 심지어 스탠더드 오일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보다 더 크게 걸어주겠다고 한다.

그가 취하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데도 그를 비난한다면, 그는 반사회적인 인물이거나 혹은 머리에 총을 맞은 사람일 것이다.

스탠더드 오일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박사님의 높으신 뜻에, 저희 회사도 기꺼이 한 손을 보태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지원은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스탠더드 오일! 전격적으로 한서진 석유 채택!」

「석유 재처리 비용은 순수익의 4%! 스탠더드 오일의 매출 규모를 생각하면 천문학적인 금액!」

「한서진 박사, 재처리 비용 전액 국제 구호사업에 내놓기로 결정!」

스탠더드 오일이 가장 발 빠르게 석유 재처리에 동의하고 나옴으로써, 다시 한 번 뜨거운 이슈로 달아올랐다.

다른 석유사들이 갑작스럽게 닥친 천재지변에 머뭇거리고 있을 때, 스탠더드 오늘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석유업계에서는 ‘배신자!’라는 비난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스탠더드 오일은 한서진 박사님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환경오염 방지 및 국제 구호사업에 적극적으로 한 손을 보태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스탠더드 오일은 CEO의 성명발표까지 곁들이며 자신들의 선량한 이미지를 공고히 다졌다.

“기름쟁이들은 죄다 탐욕스럽기만 한 줄 알았는데, 스탠더드 오일을 보면 꼭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갖고 있었네. 스탠더드 오일, 다시 봤다.”

“근데 다른 석유회사들은 대체 뭐 하냐? 스탠더드 오일을 본 좀 받아라.”

스탠더드 오일은 빠른 판단과 행운이 겹친 덕분에, ‘기름쟁이를 향한 비난의 손가락질’에서 유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석유회사들은 다급한 마음에 재빨리 정지원을 찾아서 협상을 하려 했다.

그러나…….

“순수익의 6%를 내시면 됩니다.”

“예? 하지만 스탠더드 오일은 4%이지 않습니까?”

“프로모션 기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

뒤늦게 부랴부랴 달려온 석유회사들은 2%가 훌쩍 뛴 가격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야 했다. 심지어 구호사업에 회사 이름을 걸어주는 순위도 스탠더드 오일보다 낮았다.

2%, 얼핏 보기에 작아 보이지만 미국 석유회사들이 내는 매출과 수익 규모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액수다. 그것도 일회성이 아니라 반영구적으로 갖다 바쳐야 한다.

“그리고 비율 고정 보장 기간은 5년입니다. 매 5년마다 조건을 다시 갱신할 겁니다.”

“예? 스탠더드 오일은……!”

“물론 거기는 20년 보장이죠. 거듭 말했지만 프로모션 기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

할 말을 잃은 협상자들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정지원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5년 뒤 갱신한다고 해서 꼭 비율이 증가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귀사의 사업 행보를 감안하여 더 줄여줄 수도 있는 거지요.”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일까,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온 회유일까.

어느 쪽인지는 5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협상자는 억울한 마음에 그래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스탠더드 오일은 아무리 잘해봐야 4%에서 계속 머무르는 거 아닙니까?”

“오해를 하셨는데, 비율 고정은 상한선을 말하는 겁니다. 즉 보장 기간 동안에 그 이상으로는 늘리지 않겠다는 거지요. 그러니 스탠더드 오일이 20년 보장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품을 이유는 없습니다.”

“…….”

석유회사들은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체결하면서 속으로는 크게 후회했다.

프로모션 기간에 올 걸.

한국 정부 고위직 관료들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한서진 석유가 떠들썩하게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 환경오염이 없는 석유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전 지구적으로 봤을 때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당장 세금 시비에 휘말리게 된 정부로서는 달갑지 않을 일이었다.

소비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한서진 석유가 등장하자마자 폭발적인 여론을 만들어내며, 정부를 압박했다.

“환경오염이 없는 석유를 쓰는데도 환경세를 부담해야 하나? 이건 모순 아닌가?”

“정부는 하루빨리 한서진 석유 도입을 강제하고, 휘발유에 붙는 환경세를 없애라! 이제는 제발 국민들 부담을 줄여줘라!”

“내 자동차가 기름으로 달리는지 세금으로 달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기름에는 여러 명목으로 세금이 붙는다. 그중 환경세 명목으로 붙는 세금의 비율이 상당한 편이다.

환경오염이 없는 석유를 도입하면 당연히 환경세로 인한 시비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환경에 문제가 없으니 세금을 없애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렇다고 세금을 정말 없애버리면 당장 정부 예산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 돈이 다 얼마인데.

“도원패 정부가 한서진 석유를 도입 안 하는 이유가 뭐지?”

“설마 환경세 깎아주기 싫어서 일부러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세금 거두는 이유가 국민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려고 하는 거지 국세청 계좌에 돈 쌓아두려는 목적은 아니잖아?”

“정부는 빨리 기존의 더러운 석유는 전면 금지하고 한서진 석유를 도입해라!”

“기름에 붙는 세금 빨리 깎아라!”

“한서진 박사님께서 유류세로 고통 받는 우리들을 구원하고자 신계에서 에테르 석유를 가져와 하사하시었는데, 왜 정부는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을 방치하려고만 드나!”

고위 관료들은 도원패 대통령에게 그런 국내 상황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도 미국을 따라 하지. 한서진 석유 도입하고, 기존 석유 금지해. 올해 하반기 안으로.”

“대통령님. 하지만…….”

“그리고 유류세도 깎아버려.”

고위 관료들은 생각했다. 대통령, 지금 임기 지나면 끝이라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 작품 후기 ============================

어차피 3조 원의 퇴직금이 있으니 아무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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