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6 한 걸음 =========================================================================
「미 의회, 환경을 위한 세기적 결단!」
「오직 ‘한서진 석유’만 허용!」
「케인 대통령 : “거부권? 그런 거 모른다.”」
「석유업계, 발등에 폭탄이 떨어져.」
‘에테르 석유’ 혹은 ‘한서진 석유’라 불리게 된 사건은 미국과 유럽 전역을 뒤흔들어 놓았다. 에너지업계는 예기치 못하는 타이밍에 날아온 몽둥이에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채, 망연자실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석유 관련 증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기를 했다.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
그나마 이쪽은 괜찮은 편이다. 다른 에너지 부문, 예컨대 수소 연료나 천연가스, 원자력 등은 핵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듯이 처참했다.
그저 바닥, 끝도 없는 바닥만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천연가스나 석탄, 수소 자동차가 직격타 맞아서 그로기 상태인 건 이해되는데, 왜 원자력까지? 어차피 단가 비싸서 석유로는 발전소 제대로 못 돌리잖아.”
“안 그래도 방사능 폐기물 때문에 말이 많은데 이번에 한서진 석유 때문에 환경오염 갈등 제대로 불 피웠잖아. 그 영향을 받은 거지.”
“아하.”
“그리고 석유가 제대로 두드려 맞았으니, 원자력도 조만간 두드려 맞을 거라는 예측도 있고. 한서진 박사가 왜 새로운 에너지원을 안 내놓고 기존 석유를 친환경적으로 개량한 거라고 생각해?”
“설마 노린 걸까?”
“석유업계는 발등에 불 떨어진 거지. 이제 꼼짝없이 한서진 박사와 파이를 나눠먹게 생겼으니까.”
단순히 파이를 나눠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서진이 석유를 친환경적으로 개량해주지 않으면, 석유업체는 장사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 목숨 줄이 한서진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고 만 것이다.
“석유업계가 용케 그런 법안이 통과되는 걸 방치했네. 그 엄청난 로비력은 다 어디다 썼대?”
“로비? 지금 한서진 박사와 관련된 일에 로비를 한다고? 연준위가 그렇게 두들겨 맞고 산소호흡기 신세가 된 걸 보고도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
심지어 미국의 초대형 석유업체들 중에는 연방은행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 화폐 자본가들도 상당수 있었다. 즉 이미 한 번 안 된다는 걸 겪어본 이들이다.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이 사태를 받아들인 것이리라.
“지금 미국에서는 한서진 박사의 말이 곧 헌법이야, 헌법.”
“케인 대통령이 아주 열렬한 한서진 신봉자라던데.”
“워싱턴에서는 한서진을 반신으로 취급하는 분위기라더라.”
“반신이 아니고 그냥 신으로 취급하는 것 같던데. 내가 들은 소문으로는 그랬어.”
정책이 효력을 발휘하는 시기는 올해 하반기. 석유업계에 남은 시간은 불과 몇 달도 채 되지 않는다.
하반기부터는 이제 오염 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 한서진 석유만 생산, 판매해야 한다.
한서진을 만나서 어떻게든 협상을 시도하려던 석유업계로서는 경기를 시작도 해보기 전에 패배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줄 수 있나?”
백철중이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한서진은 순순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장인어른. 말씀하십시오.”
“에테르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제5의 힘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거, 그게 에테르의 특징 아닌가?”
“그렇습니다.”
“한 서방, 그렇다면 에테르 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나?”
“…….”
“자네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은데. 아닌가?”
거짓말을 해봐야 무의미한 것, 한서진은 쓴웃음을 삼키며 말을 꺼냈다.
“장인어른 예상이 맞습니다. 에테르 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죠.”
“당연히 그게 더 친환경적이고, 효율도 높겠지?”
“물론입니다.”
“사용하기에도 편리하고, 또 안전하고.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그리고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실용화가 가능하겠지?”
“……예.”
“그런데 왜 굳이 석유를 개량한 건가? 그 놀라운 차세대 에너지원을 세상에 내놓지 않고.”
에테르를 에너지원으로 이용한다면, 기존의 어떤 에너지보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날 것이다. 효율, 성능, 안전, 그리고 환경 문제까지.
그러나 한서진은 석유라는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에너지원을 개량하는 길을 선택했다. 전 세계 석유업계와 맞서 싸우고도 쉽게 승리할 만한 힘과 지위, 영향력을 지녔음에도.
“제가 에테르 에너지를 세상에 내놓는다면 전 세계 석유업계는 고사하겠죠. 사실 스탠더드 오일 대주주 같은 사람들은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지녔고, 회사가 망해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
“하지만 영세 주유소를 운영하며 사는 사람들은 한순간에 모든 걸 잃게 되겠죠. 비단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석유업계에 인생을 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실직자가 됩니다. 그 원망을 감당할 자신은 없더군요.”
“그래서 타협을 택한 건가?”
“타협이라기보다는, 굳이 지금 에테르 에너지를 실용화해서 에너지 업계를 재편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얻을 이익이 전혀 없습니다. 손해만 있죠.”
손해라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될, 석유업계에 종사하는 수백 만 명이 넘는 근로자들이 품을 원망.
그리고 한서진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다는 것은…….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을 독점하면 어마어마한 돈이 될 텐데.”
“돈은 지금도 엄청납니다. 여기에 몇 십 조 달러쯤 더 끼얹는다고 제 자산 내역이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
“하지만 원망은 확실하게 듣게 되겠죠.”
“웜홀 산업도…….”
“웜홀은 기존의 수단으로는 대체가 불가능한 혁신적인 물류 이동 시스템입니다. 문명의 질이 월등히 발전하게 되는 분명한 이점이 있습니다. 웜홀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 사람들이 안타깝지만, 그렇다 해도 그 사람들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는 미래의 황금길이죠.”
백철중은 진중한 눈빛을 띤 채 가만히 들었다.
“하지만 에너지는 전혀 성격이 달라요. 굳이 석유 에너지를 에테르로 대체해서 모든 판을 갈아엎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될 이익이 웜홀의 경우와는 전혀 비교가 안 됩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돈 조금 벌자고 지구 전체에 너무 큰 손해를 안기는 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오염 물질을 배출하지 않도록, 그 정도까지만 개량한 거구만.”
백철중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건 지구 전체로 보면 분명한 이점이니까요.”
“그럼 지구상의 모든 석유가 고갈되면 그때야 세상은 에테르 에너지를 접하게 되는 건가?”
“훨씬 더 빨리 접할 수 있을 겁니다. 당장 내년에라도 세상에 선을 보일 생각이니까요.”
“아까는 석유 시장을 그대로 보존하겠다더니?”
“우주 탐사나 심해 같은 특수한 영역에서만 제한적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에테르 워치 같은 시장을 구축하는 거죠.”
“아하, 아예 극소수만 사용하는 초하이엔드 시장을 형성하겠다는 거군.”
백철중은 완전히 한서진의 뜻을 이해했다.
이른바 균형을 잡겠다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게 될 돈을 탐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이익과 손해의 저울질을 완벽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의 석유 정책이 가진 영향력은 세상을 향해 일파만파로 뻗어나갔다.
지구 환경을 위한 신속하고 과감한 결정에, 미국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특히 석유를 개량하더라도 기존의 가격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있어, 일반 소비자나 유통 소매업계는 타격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1차 생산자인 초대형 정유사들이었다.
때문에 정유사들은 발등에 불이 난 듯이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녔다. 법안을 제재할 수는 없고, 이미 만들어진 무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으니.
석유를 개량하는데 지불해야 하는 비용, 그것은 자신들이 떠안아야 했다. 새로 통과된 법안에서 그 점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건은 개량하는데 지불하는 비용의 단가를 어떻게든 낮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열쇠는 한서진이 쥐고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의 회장, 존 그랜숀은 열심히 노력한 끝에 어렵지만 정지원과의 면담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로건 정, SJ인더스트리의 CEO이자 한서진의 최측근이며 막역한 선배.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가 하는 말이 곧 한서진의 말이나 다름이 없다.
정지원은 대화를 길게 끌지 않고 곧바로 결론을 제시했다.
“순수익의 4%.”
“예?”
“순수익의 4%, 석유를 개량하는데 지불하셔야 할 비용입니다. 대신 이 비율은 향후 20년 간 고정할 것을 보장 드리죠.”
존 그랜숀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굴렸다.
매출의 4%가 아닌 순이익의 4%, 이 정도면 아주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오히려 정부나 시민들 입장에서는 환경오염 방지를 위한 합리적인 수준의 지출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회사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한서진 석유’를 판매한다고 해서 기존에 부담하던 환경세 등의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회사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순이익의 4%가 20년 간 증발하게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겨우 4%라고 치부할 게 아니다. 석유 시장이 가지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생각하면, 단 1%만 따져도 천문학적인 거금이다. 한 자릿수 숫자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단 1%, 아니 0.1%만이라도 낮출 수 있다면…….’
존 그랜숀은 필사적으로 사고했다.
정지원, 사업적인 부분에서는 차가운 피가 흐르기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그를 상대로 협상해서 과연 이쪽의 이익을 얼마나 관철시킬 수 있을까?
“아시겠지만 우리 회사를 포함해 미국의 석유업체들은 이번 법안이 긴급히 통과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그 어떤 로비스트도 동원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영웅인 한서진 박사님을 흠모하고 존중하는 뜻에서 취한 행동입니다.”
“그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사의 양보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한서진 박사님에게 어떤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성실하고 건전한 기업 경영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스탠더드 오일은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좋은 회사지요. 열심히 석유를 제조해서 세상에 공급하고, 또 막대한 세금을 납부하며 국가 재정을 돕습니다. 고용과 소비 증진에도 언제나 큰 기여를 하고 있고요.”
존 그랜숀은 일이 슬슬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정지원은 지금 분명한 호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로비스트를 움직이지 않기를 잘했어.’
한서진 석유법이 통과되는 것에 어떤 훼방도 하지 않은 것, 그 덕분에 좋은 점수를 땄다. 그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하지만 하반기부터 당장 에테르 석유를 판매하라는 것은 회사 재정에 악영향을 끼치는 일입니다. 저희 회사는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데…….”
정지원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안 됩니다.”
============================ 작품 후기 ============================
응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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