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5 한 걸음 =========================================================================
과학계에서 한서진의 연구는 언제나 주목 0순위다. 그가 무언가를 발표한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비록 박사 학위 습득이 요식적인 절차 행위이긴 하지만, 그래도 학계에서는 진작부터 긴장한 채 주목하고 있었다.
당연히 과학계는 논문이 제출되자마자 민감하게 반응했다. 논문 검토에 자발적으로 재능을 기부하겠다는 과학계 원로들의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에너지 관련 연구라는 것에 환호했다가, 곧 자세한 내용을 접하고는 맥이 빠졌다.
“석유를 개량한다고? 겨우?”
“한서진 박사가 고작 이 정도 수준의 연구를 했다고?”
A4 한 장으로 구성된 논문은 짤막한 내용만 담고 있었다. 에테르의 입자 변환 성질을 이용해 석유의 화학 변화에 간섭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
그 화학 변화를 위한 공식이 있긴 했지만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수식이었다. 애초에 에테르 관련 지식에 관해 아는 바가 없으니 그들이 검증하고 뭐고 할 게 없지만.
“이건 조금 실망인데.”
에너지 관련 연구라고 해서 그들은 무언가 거창한 걸 기대했다.
이를 테면 에테르를 이용해 만든 항성이라든지, 암흑 에너지라든지, 혹은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절대 에너지라든지…….
그런데 고작 석유를 개량한 것이라니, 뭔가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효율도 -2%야?”
게다가 에너지 효율마저 떨어졌다.
예전이면 100배럴의 석유로 낼 수 있던 에너지를 내기 위해 102배럴의 석유가 필요해진다. 여기에 개량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석유값만 오르게 된 것이다.
“이걸 대체 누가 써?”
들이는 노력에 비해 손해만 커진다. 한서진의 위명에 걸맞지 않는 형편없는 연구라고, 다들 생각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그가 박사 학위에 별다른 미련이 없음을 보이는 퍼포먼스라고, 그런 확대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논문 후반부를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래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오염 물질 배출이 없어?”
“연소를 마친 석유가 완전 분해돼서 아무런 물질도 배출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고? 가만, 그럼 연소 찌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거 아니야?”
“연소뿐만이 아니라 정유 과정에서도 적용된다고?”
과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논문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개량한 석유의 연소 효율이 2% 정도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석유 에너지로 인한 환경오염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떨어뜨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논문은 너무나 짧았다.
이러이러한 식으로 석유를 개량한다, 그럼 이런 효능이 추가로 생긴다, 이 정도의 짧은 서술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심사위원을 설득하고 설명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박사 학위를 따려는 것도 어찌 보면 주변의 등쌀에 떠밀려서이니까.
마치 세기의 대발견을 해놓고도 노벨상을 거절하는 괴짜 천재 과학자 같은 입장이다.
그렇다 보니 학위 습득을 위해 제출한 논문이 다소 불성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할 말 다 했으니, 니들이 믿든 말든 알아서 해.’ 라는, 대강 이런 느낌이다.
결국 심사위원회는 한서진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젊은 나이지만 현대 과학을 아득히 초월한 지식으로 끝 모를 부를 쌓은 과학계의 대현자, 자연히 논문 검토를 위한 추가 설명회는 조심스럽게 준비되었다.
“제가 설명을 해야 한다고요?”
논문 심사 집행위원회측에서 보낸 인물, 오성진 교수가 조심스럽게 학회의 뜻을 전하자, 한서진은 조금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한서진보다 몇 십 년은 더 빨리 박사 학위를 받고, 수십 년 간 교수 노릇을 해온 오성진은, 그의 앞에서 신입생 제자처럼 쩔쩔매는 태도를 보였다.
“의무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심사위원들이 논문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심사에 차질이…… 그래서 박사님께서 직접 질의에 응답해주시고 간단하게 강의를 해주신다면 심사 통과에 좀 더 효율이 붙지 않을까 하는 취지에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이해를 해주시면…….”
“논문에 적은 게 전부입니다.”
조금 딱딱한 말투에 오성진은 혹시 화가 난 게 아닐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 하지만 논문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량을 할 수 있는지 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검토 작업에 차질이…….”
“제가 공식 써놓지 않았던가요?”
“이론 공식만으로는 위원회에서 이해하기에 부족합니다. 실증 실험을 곁들여주시면 아무래도…….”
“……휴.”
한서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성진은 괜히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죠.”
“네? 지금이요?”
“실증 검증이 필요하다면서요? 지금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저, 저희 측에서도 준비를 할 시간이…….”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지금 아니면 시간이 없습니다. 아니면 참여 가능한 분들만 참여하시고 따로 녹화를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성진은 부랴부랴 자리를 벗어나서 위원회에 보고했고, 위원회는 한바탕 뒤집어져서 급히 심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 사이 한서진은 이미 출발할 채비를 마친 뒤였다.
“자, 갑시다.”
“네? 네!”
오성진은 허둥지둥 한서진을 따라 방탄 리무진에 올랐다. 꼭 한 번 타보고 싶었던 차였는데 이렇게 타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한서진이 대학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공학부 캠퍼스 중앙 광장에 검증 실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세 개의 자동차 엔진과 연료가 든 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성진은 의아해서 대기 중이던 동료에게 물었다.
“백 교수,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한서진 박사는 방금 우리 뜻에 응해서 출발했는데? 언제 다 준비한 거야?”
“조금 전에 헬기 몇 기가 와서 실어 나르던데? 세팅까지 하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더구만.”
“세상에.”
오성진은 혀를 내둘렀다. 한서진이 뜻을 정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준비가 갖춰지다니.
광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소문이 퍼졌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학생도 제법 많았지만 그보다는 교수를 포함한 교직원들 수가 압도적이었다. 심지어 외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학자들도 다수 보였다.
한서진이 나서자 수행원들이 급히 다가와서 그의 셔츠 앞에 초소형 마이크를 걸어 주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행원들이 옆에서 거들어주며, 검증 실험을 위한 준비를 완벽하게 보조해준다.
그 물 흐르듯이 일체화된 움직임은 차라리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한서진입니다. 오늘은 제가 박사 학위 습득을 위해 제출한 논문 내용에 미흡한 점이 있어, 실증 실험으로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그가 입을 열자 위원회는 난처한 듯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의 음성에 딱히 가시는 없지만, 괜히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기 꺼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몸을, 자신들의 미흡한 지식 때문에 오라 가라 했다니. 참 송구한 일 아닌가.
“일단 제가 제출한 박사 과정 논문의 핵심은 에테르를 이용해 기존 석유 에너지를 개량하는 겁니다. 그럼 연료로서의 효율은 다소 떨어지지만 대신 어떤 오염 물질도 배출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완전 연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광장에는 쥐 죽은 듯한 정적만이 흘렀다.
멀리서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소리가 마치 아련한 바람소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게 고요했다.
“개량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특수한 에테르 파장 에너지를 일정 이상 조사하면 물질 구조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그 변화는 기존의 화학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한서진은 잠시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그는 외부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공개 거치된 자동차 엔진을 향했다.
엔진과 연결된 배기구에는 각각 오염 물질 측정 장치가 장착돼 있었다.
“그냥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죠.”
잠시 후 전자제어 회로에 따라 엔진이 작동을 시작했고, 힘차게 돌아갔다. 굉음이 우렁차게 올리며 엔진이 내는 출력이 마력 단위로 표시되고 있었다.
투명한 연료통에 담긴 휘발유가 줄어들고 있지만, 배기구에 장착된 센서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배기구에서는 그저 순수한 공기의 흐름만 빠져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은 석유를 에테르로 개량하는 과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보다시피 특수한 처리를 한 칩을 통해 일정한 파장을 생성하여 조사하는 방식으로…….”
그날, 국제증시 석유업계 관련주는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며 미친 듯이 널뛰기를 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한서진의 검증 실험을 관전한 이들이 종종 하곤 하는 말이다. 그 말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입증되었다.
분명히 엔진이 연료를 소모하며 힘을 내고 있는데, 그 어떤 오염물질도 배출하지 않았다. 오염물질 측정기 센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0만 표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개량 과정 자체가 매우 간단했다. 그저 에테르 파장 에너지를 쐬기만 하면 된다.
원유 상태든, 정유 과정이든, 혹은 정제가 끝난 공산품이든 아무 상관없다.
국제증시는 또 한 번 혼란에 빠졌다.
“이러면 석유업체들 죄다 망하는 거 아니야? 완전히 새로운 에너지는 아니지만 결국 한서진 박사가 석유업계를 죄다 먹는 건 사실이잖아?”
“소매 유통 쪽은 별 타격 없이 살아남겠네. 젠장, 그쪽 관련주는 빼는 게 아니었는데!”
“다국적 초대형 정유업체들은 모두 죽었다고 봐야 된다. 아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겨?”
국제 사회는 환경오염을 최대한 억제하는 방향으로 가는 추세다. 탄소 배출 규제 협약 등 다양한 약속을 통해 지구 정화를 꾀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석유 에너지가 배출하는 오염 물질이다. 그런데 한서진은 그것을 완벽하게 해결해버렸다.
“잠깐만, 근데 한서진 박사가 석유를 아예 무에서 만들어내는 건 아니잖아? 개량을 하려면 일단 석유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정유업계가 파이를 빼앗기긴 해도 최소한 몰락할 일은 없다는 거네. 에스코너가 따로 대형 유전을 매입했다는 말은 없지?”
“이거 대체 어느 쪽에 투자해야 하는 거야?”
석유관련 증시가 널뛰기를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서진이 얼마나 독하고 이기적인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석유산업 판도가 뒤흔들리기 때문이었다.
환경 문제에 민감한 유럽에서는 한서진의 연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조만간 ‘한서진 석유’가 아닌,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그 외의 석유는 일체 금지한다는 법안을 만든다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에 정유업계는 바짝 긴장해서 활로를 위한 길에 나섰다. 자국 정부에 갖은 로비를 하며,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한서진을 만나 상황을 타개하고자 애썼다.
미국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긴급 타결된 법안에 따라, 올해 하반기부터는 ‘한서진 석유’ 외에 다른 석유는 미국 내에서 일절 생산, 유통, 판매, 보관이 금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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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기도 귀찮네요. 그냥 눈으로 보고 판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