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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23화 (523/609)

00523  한 걸음  =========================================================================

미국, 백악관.

세계 정치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오늘도 불이 꺼지지 않은 채 긴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케인 대통령이 빠진 채 진행되는 간이 국정 회의에는 국무부 장관, 재무부 장관, 국토부 장관 등 미국을 움직이는 주요 독립행정기관장들이 참석한 상태였다.

그중에서 FBI 국장은 일단 빠져 있었다. 회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기관의 장이기 때문이었다.

“AU 총 발행액이 마침내 20조 AU을 넘어섰어요. 이는 달러로 환산했을 때 약 20조 3,000억 달러에 달하는 액수입니다. 물론 발행액 전액이 시중에서 거래되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실물 금을 거래할 때에는 이미 달러가 아닌 AU가 통용되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그렇죠. 금값을 나타낼 때 AU만큼 정확한 화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AU는 금의 거래 가치에 상관없이 무게 그 자체만을 따지기 때문에, 대규모 실물 금 거래에서는 AU 화폐가 선호되고 있었다. 금의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자 거래를 제외하면.

또한 금뿐만 아니라 다른 대규모 국가 간, 기업 간 거래에서 기축화폐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현재는 달러와 병용돼서 사용되고 있지만, 기축화폐로서의 신뢰는 AU가 차지한 지 오래였다.

AU의 단점은 전 세계에서 유통될 만큼 충분한 채권액이 발행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전자화폐로서만 발행되기 때문에 한서진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찍어낼 수 있지만, 화폐 자본가들이 무력화된 후에는 의도적으로 발행 속도를 늦췄다.

이미 화폐자본가들이 패배한 이상, 무리해서 달러의 지위를 떨어뜨리기보다는 연착륙을 하기로 노선을 튼 것이다. 그것은 한서진이 아닌, AU의 발행을 관리하는 크렘 회장이 연방정부와 협의해서 결정한 것이었다.

이미 연방은행의 통제권 역시 연방정부가 가져온 이상, 무리해서 달러의 지위를 떨어뜨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결국 시간문제일 뿐, AU가 달러의 기축화폐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대체하는 날은 머지않아 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00억 톤짜리 금 소행성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누구든지 적당한 가격의 천체 망원경을 통해 쉽게 금 소행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AU의 화폐로서의 가치를 가장 확실하게 보증하는 담보물이었다.

“웜홀 사업은 요즘 어떻죠?”

“설치장치 10기가 추가 투입되면서 가속이 붙었습니다. 듣자하니 한서진 박사가 설치장치를 추가로 만들어서 현장에 투입할 계획이랍니다.”

“오, 몇 개나 만들 계획이랍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50기 이상은 만들 예정 같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될 수도 있고요.”

“50기나!”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이 주먹을 불끈 쥐며 탄성을 내질렀고, 교통부 장관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웜홀이 상용화되면 교통부의 입지가 줄어들 테니.

국무부 장관이 문득 입을 떼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시리아 사건은 한서진 박사가 단독으로 행한 일이라는…….”

“사실무근입니다.”

국방부 장관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단칼에 흐름을 잘랐다. 그의 표정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난항을 겪던 제압 약물 개발에 한서진 박사가 결정적인 조언과 도움을 준 건 사실입니다. 그 외에 떠도는 말은 모두 말도 안 되는 음모론입니다.”

“…….”

다른 장관들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들은 국방부 장관의 말이 사실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국방부는 전 세계적으로 반군, 테러 조직원들의 인격을 일시에 개조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차라리 한서진이 에테르를 통해 전 지구적으로 뭔가 일을 벌였다는 게 훨씬 그럴 듯한 가설이다.

그러나 ‘같은 편’을 지나치게 난처하게 만드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는 않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암 치료제에서 부작용이 발견된 사례가 있던가요?”

“단 한 번도 없었죠. 치료제를 처방받은 환자들은 초기와 말기에 상관없이 모두 완치되었습니다. 다만 투병 기간에 따라 회복 속도에서 차이를 보였을 뿐이죠.”

“재해 예측 사이트는…….”

“여전히 단 한 건의 오류도 없이 잘만 유지되고 있습니다.”

“H-2의 판매량은…….”

“탈모 치료제요? 없어서 난리입니다. 그런 위대한 약을 발명한 한서진 박사는 정녕 훌륭한 위인이죠.”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은 본래라면 밋밋했을 자신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손끝에 느껴지는 ‘진짜’ 풍성함에 그의 입가에 다시 한 번 미소가 어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회의장에 내려앉았다.

각 독립기관장들은 서로 눈치를 보듯이 말이 없다가, 누가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서진 박사는 혹시 외계인이 아닐까요?”

“그보다는 신일지도 모르죠.”

“신이라니, 그건 너무 나갔습니다. 이 세상에 신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한서진 박사가 지금까지 이룩한 걸 보세요. 고작 몇 년 사이에 그 엄청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냈습니다. 그것도 혼자 힘으로요. 그게 신이 아니고 뭡니까?”

“…….”

“케인 대통령이 가끔 한서진 박사의 이름을 읊조리며 기도를 올리는 걸 본 사람이 있답니다. 대통령이니까 무언가 대단한 걸 혼자만 본 게 아닐까요?”

“설마 한서진 박사가 신이라는 증거라도 봤다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케인 대통령이 한서진 박사 대하는 걸 보면 사람 대하는 것 같지가 않답니다.”

그건 항간에 워싱턴을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케인 대통령이 한서진을 대하는 태도가 싹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마 시리아 사건 이후인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대통령의 태도가 분명히 바뀌었어요.”

국방부 장관은 본래 제압 약물을 개발 중이었고, 한서진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독립기관장들 중 누구도 그걸 믿지 않는다.

‘한서진 박사 혼자서 뭘 했겠지. 국방부는 시선 집중을 대신 받으려고 나선 대타일 뿐이고.’

신…….

근래 워싱턴 정가를 휩쓰는 흥미로운 소문이었다.

알고 보면 한서진 박사는 혹시 신이 아닐까? 하는.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지만, 재미있게도 내로라하는 중진 정치가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을 굳혀가는 소문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 아니고서는 그런 기적적인 성과가 연달아 가능할 리가 없다. 그가 이룩한 것은 인간의 힘을 아득히 초월한 것이다.

국제 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의 중진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신흥 종교처럼 힘을 불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근데 신이라면 미군이 경호 설 필요도 없지 않나요? 망치 한 번 휘두르면 다 떨어져 나갈 텐데.”

“그래도 잔심부름을 할 근위대는 있어야죠.”

어색하게 굳은 분위기는 결국 가벼운 농담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해가 바뀌었고, 한서진은 대학원에서 한창 박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송하나도 어느덧 4학년이 되었다.

“네가 입학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반이라니.”

“저도 오빠가 벌써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준비 중이라는 게 안 믿어져요. 어쩜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죠?”

석사 과정을 건너뛰고 박사 과정부터 준비하는 게 다소 우습긴 했다. 대학측 말을 들어보면 한 번에 세트로 묶어서 처리하려 한다나? 무슨 석박사 학위가 여름철 패키지 휴가 상품도 아니고.

“근데 오빠가 박사 학위를 준비하는 게 의미 있어요?”

“나도 가끔 그런 의문이 들어.”

세간은 그를 ‘박사’라 부른다. 노벨상도 몇 번 탔고, 세기적인 발견과 발명으로 인류 문명 수준을 한층 끌어올린 위업을 역사에 남겼으니.

그런 그가 정작 박사는커녕 석사 학위도 없는 학사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놀라곤 했다.

“거짓말이지? 그분이 박사가 아니라고?”

“말도 안 돼!”

그런 반응이 보편적이니, 세간이 얼마나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한서진은 주변의 권유에 따라 박사 과정을 하고 있지만, 이게 과연 필요한 일인가 싶었다. 지도교수를 맡은 박효산 교수가 오히려 그가 이끄는 연구팀 소속이니, 이만큼 제대로 꼬인 대학 족보가 있을까?

한국대측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한서진이 편하게 박사 학위를 딸 수 있게 해주려 했다. 한서진이 최초로 박사 학위를 따는 대학이 모교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스탠포드에서 학위 이수에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의중을 비친 바가 있어서, 한국대는 근래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준비는 다 하신 거예요?”

“그냥 박사 논문만 제출하면 된대. 연구 실험 같은 건 내가 기존에 한 결과물로 갈음할 거라고 하더라.”

“논문 쓰는 게 제일 귀찮으실 텐데.”

“그래서 그냥 A4 한 장으로 써서 제출하려고. 내용 해설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럼 주제는 뭐로 하실 거예요?”

“글쎄, 아직 안 정했어. 일단은 적당히 에테르 관련 항목 중에서 하나 뽑아서 낼까 해.”

한서진은 휘갈겨 쓴 듯한 종이뭉치를 대충 들어서 송하나에게 건넸다.

“네가 하나 골라줄래? 뭐로 할지 선별하는 것도 귀찮네.”

“그래도 돼요?”

“그럼.”

한서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송하나는 좋아라 하며 의자에 앉아 종이 뭉치를 뒤적거렸다. 한서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늘씬한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를 탐독하는 모습이 참 지적이면서도 섹시하다. 지성과 미모란 저런 모습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새삼 결혼을 잘했다고 내심 흐뭇해하며, 그는 말없이 와이프의 모습만 감상했다.

“이거 어때요?”

마침내 송하나가 고개를 들며, 한 장의 서류를 보란 듯이 집어 들었다. 한서진은 서류에 적힌 문구를 확인했다.

“에너지 활용안?”

“오빠 에너지 쪽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안 하셨잖아요. 이제 이런 것도 해보시는 게 괜찮을 것 같은데. 오빠 생각은요?”

“나쁘진 않네. 아니, 괜찮은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에너지 쪽으로는 지금껏 눈길도 안 준 게 사실이었다.

미스릴 반도체가 전기 에너지를 극도로 적게 소모하긴 하지만 그뿐, 어쨌든 현재로서는 외부 에너지 공급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한서진 본인도 딱히 에너지원으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반도체, 의료, 제약, 금융, 화폐, 희귀 자원, 토지투자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을 해왔으면서, 정작 에너지 시장 쪽으로는 손 한 번 안 뻗었다니.

“그러고 보니 에너지야말로 산업의 꽃인데 오빠는 용케 그쪽은 안 건드리셨네요.”

“그러게. 반도체에 주력하다 보니 그런 생각도 별로 못해본 것 같아. 박사 논문은 그럼 에너지로 해야겠다.”

“그럼 두 달 안에 차세대 에너지 개발하시고 올해 안에 상용화하시는 건가요? 오염 심한 석유와 석탄은 퇴출하고요?”

“하는 김에 원자력도 묶어서 퇴출시켜 버릴까? 방사능 폐기물도 문제가 많잖아.”

한서진도 가볍게 농담으로 받았다.

누군가에게는 농담이 아닌 이야기겠지만.

============================ 작품 후기 ============================

네, 놀랍게도 에너지 시장은 여태 안 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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