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22 진정한 엘릭서 =========================================================================
한서진은 다음날부터 즉각적으로 구호사업 시행에 나섰다.
나름대로 환영 행사를 잔뜩 준비해두었던 수단 정부 측으로서는 당황스러운 행보였다. 그래도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귀빈이 자국을 방문했는데, 첫날 만찬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파티 행사를 열어주지 못하게 되었으니.
“저는 칵테일 맛을 즐기러 온 게 아닙니다.”
정부 측의 호의를 그렇게 부드럽게 받아넘긴 한서진은 곧장 구호물자부터 들여왔다. 홍해에 대기 중이던 대형 화물선들이 줄을 이어 포트수단에 입항했고, 싣고 있던 물자를 내렸다.
물자의 대부분은 의약품과 식량이었다.
“이 물자들이 하위층 국민들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중간에 착복 행위 같은 게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수단 정부의 통제력을 믿습니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60만 톤짜리 화물선 5척이 싣고 온 물자의 양은 엄청났다. 물자를 하역하고, 수량과 종류를 파악해서 분류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작업이었다.
수단 정부의 행정 통제력은 완벽하지 않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근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행정 직원들도 그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대적인 착복이 일어날 겁니다. 가져온 물량의 절반, 아니 1/3이라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돌아갈지 의문입니다.”
미국 대사가 그렇게 우려를 나타내 보였지만, 한서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이 대답했다.
“착복이나 부정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잘 됐군요. 그걸 명분으로 직접 나서면 되니까요.”
“박사님. 그건…….”
“어차피 이 나라 행정 시스템에 온전히 맡겨둘 생각도 없었습니다. 차라리 부정행위가 빨리 일어나면 좋겠군요. 그래야 명분을 가져올 수 있잖습니까.”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저는 구호사업을 하고 싶은 거지, 눈먼 돈을 삼키려는 자들을 살찌우려는 게 아닙니다.”
“박사님께서 수단 정부를 전혀 통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구호사업을 하시겠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을 텐데요.”
“그래도 모양새 좋게 가려면 명분을 취하는 게 낫지요.”
“그렇다면 철저히 감시해야겠군요. 정당한 명분을 얻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미 대사는 그렇게 전의를 불태웠지만, 한서진은 속으로 그저 웃기만 했다.
아마 미국의 첩보 능력을 총동원해서 감시를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한서진 앞에서는 무의미한 짓이었다.
‘모든 걸 내다볼 수 있으니까.’
타르타로스 3를 이용하면 물자 분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 과정에서 착복이나 부정이 없는지 정도는 훤히 알 수 있다.
타르타로스 2의 경우, 오프라인에서 행해지는 일은 감시가 불가능했지만 3는 달랐다. 마치 천리안을 발동시킨 것처럼,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실시간으로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벌써 시작됐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미 대사는 갸웃거리며 반문했고, 한서진은 가볍게 쓴웃음을 베어 문 채 대답했다.
“구호물자 착복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했다.
물자를 하역하는 순간부터 대대적인 착복이 이뤄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역한 물자가 포트수단의 정부 소유 창고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미 착복은 시작되었다. 빼돌려진 물량은 자그마치 하역된 총량의 1/3에 달했다.
수단 정부는 한서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따로 감사팀을 두며 적극적으로 감시했다. 그러나 그 감사팀마저 물자 착복에 동조하고 있었다.
한서진은 타르타로스 3를 통해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CIA가 조사 중이니, 곧 정식 보고가 들어올 것이다.
자신이 착복 내역을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걸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수단을 떠나기 전, 미 대사는 의기양양하게 보고서 뭉치를 들고 한서진을 찾았다.
“박사님의 예상대로 구호물자 중 상당량을 빼돌린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정부와 군, 민간이 모두 합심하여 열심히 빼돌렸습니다.”
“어차피 저들을 위해 가져온 물자인데 왜 굳이 빼돌리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암시장에 내다 팔면 자기들 이익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수단 정부의 행정 통제 능력은 상상 이상으로 낮습니다. 제대로 조율할 힘이 없습니다.”
“대사님, 부탁합니다.”
“예, 맡겨 주십시오.”
대사는 즉시 수단 대통령을 만나서 관련 사실을 알렸다. 수단 대통령은 세밀한 횡령 내역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설마 예상 못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소. 하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대량으로 빼돌릴 줄은……. 그렇게 철저히 감시했는데…….”
수단 대통령 역시 부정행위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마냥 믿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당 부분 억제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시작부터 무참히 깨져버렸다.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수단 행정부의 통제력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구호사업은 우리 미국이 전격적으로 맡아서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 하겠소.”
그렇게 수단 정부의 허가를 얻은 미군은 횡령 물자를 찾아 나서서 모두 수거했다. 그리고 인력 편제가 끝날 때까지는 미군이 임시로 물자 배분을 맡기로 했다.
한서진이 떠나는 날, 대통령은 전용기까지 배웅을 나왔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프리카의 모든 국민들을 대표하여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뿐입니다. 부담가지지 마시지요.”
정당한 대가라는 말에 대통령은 잠시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으나,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한서진이 자신이 이룩한 부에 대한 고귀한 도덕적 책임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겼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신효진이 말했다.
“임상시험 비용으로는 진짜 비싸게 치르긴 했네요.”
‘이제 엘릭서를 어떻게 한다?’
엘릭서는 현재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한서진이 최초로 만든 미완성형, 다른 하나는 최근에 만든 완성형.
미완성형과 완성형은 사자 부활이라는 한 가지만 제외하면 효능에서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그 어떤 병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효능을 가졌다. 물론 회복 속도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그 정도 격차는 무의미했다.
‘이제 미완성형 정도는 세상에 보급해도 되지 않나? 지킬 힘은 충분히 있으니까.’
미완성형은 이미 세상에 공급한 적이 있다.
북한 멸망 직후, 북쪽 지역을 탐문 수색하던 국군 장병들이 에테르 스톰으로 방사능 피폭도 비슷한 증세를 보였을 때였다.
그들의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한서진은 제공하기로 한 수액에 미완성형 엘릭서를 희석해서 넣었고, 그들은 병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팔았는데 두 번을 못 팔까.’
미완성형을 수백 배로 희석해서 세상에 풀어놓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한서진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영원그룹 회장인 박현준은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박사님.”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의논할 게 있어서요.”
“예, 말씀하십시오.”
“예전에 북한에서 에테르 스톰에 피폭 증세를 보였던 군인들 기억납니까?”
“아, 당연히 기억합니다.”
박현준은 조금 긴장한 눈으로 한서진을 응시했다. 뒤에 이어질 말이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회복되었지요.”
“기적일까요, 작위일까요?”
“박사님. 설마…….”
“제가 그 당시 그들에게 공급할 수액 생산을 우선적으로 서두르라고 지시한 걸 기억하실 겁니다.”
“물론입니다.”
박현준은 이제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한서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추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저는 1차 생산된 수액에 남몰래 뭔가를 섞었습니다. 그 덕분에 에테르 피폭 환자들은 세포 괴사를 멈추고 건강해질 수 있었던 겁니다.”
“…….”
“제가 섞은 게 뭔지, 지금 박 회장님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짜릿한 충격이 박현준의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진성제약에서 평범한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 한서진이 자신을 찾아와서 제조를 요구했던 화합물들.
그 화합물에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지 않을까 하고 수도 없이 연구했고, 따로 조합도 해보았다. 하지만 인체에는 무해하고 특별한 효능이 없는, 정말 평범한 화합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말 평범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화합물 생산을 의뢰할 리가 없을 테니. 그것도 비밀리에.
“혹시…… 박사님께서 처음 저를 만났을 때 부탁했던 그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게 뭔지 혹시 짐작 가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특별한 의약 물질이라고 밖에는…… 하지만 아무런 효능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물질들 자체로는 아무런 효능이 없습니다. 거기에 특별한 매개체를 섞어줘야 진정한 약으로 완성되는 거지요.”
“…….”
“에테르 피폭 환자들에게 공급했던 수액, 거기에 섞은 게 바로 그 물질입니다. 백배 정도로 희석한 거지요.”
“정확히 어떤 효능을 가진 물질입니까?”
“글쎄요. 저도 뭐라고 해야 할지는……. 그냥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듯합니다.”
“예?”
만병통치약이라니. 박현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모든 질병과 질환에 효능이 있습니다. 세균성, 바이러스성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난감하군요.”
“하지만 박사님, 모든 병에 통하는 약이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백배로 희석했는데도 에테르 피폭 환자들은 확실히 떨치고 일어났지요. 그리고 원액을 마시고 말기 췌장암과 뇌출혈로 인한 중증 뇌손상을 극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접니다.”
“…….”
“물론 워낙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에 당분간은 희석된 상태로만 공급할 생각입니다. 그것만 해도 중증 환자들은 상당한 차도를 보일 수 있을 겁니다.”
미완성형 엘릭서의 제조에는 한서진의 피가 필요하기에 많은 물량을 만들 수가 없다. 피가 없이도 만들 수 있는, 그리고 사자 부활의 효능이 제거된 엘릭서 제조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엘릭서 제조법은 오래 전 뛰어난 어느 현자가 개발한 것, 거기에 임의로 수정을 한다는 것은 통찰안의 힘과 타르타로스 3의 성능을 빌려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박현준은 놀라운 감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뒤 물었다.
“저에게 그런 걸 알려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세상이 뒤집어질 겁니다.”
“금 100억 톤 소행성이나 웜홀 사업보다 더 크게 뒤집어질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그렇게 미완성형 엘릭서를 희석해서 시중에 공급하기로 결정이 났다. 몇 가지 중요한 것을 확인받은 뒤 박현준이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나저나 박사님, 약의 용도는 뭐라고 하고 허가받아야 할까요?”
“일회용 줄기세포 물질이라고 둘러대죠. 요즘 그게 유행이라던데요. 피부과에서도 줄기세포를 이용한 새로운 노화 방지 시술이라며 많이 언급되고 그러잖아요.”
박현준은 처음에는 진담으로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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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진담인 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