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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17화 (517/609)

00517  소유한다는 것  =========================================================================

“이거이거, 백세완 실장 아닙니까?”

“한…… 서진 박사님.”

한서진을 바라보는 백세완의 눈빛이 거세게 요동쳤다. 억지로 감추고 있지만, 목소리에서도 걷잡을 수 없는 떨림이 새어 나왔다.

한때 둘은 재벌 3세(비록 방계이지만)와 계열 공장 근로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대했다. 백세완 앞에서 한서진은 널리도록 발에 치이는 모래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둘의 위치는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한때 널리도록 발에 치이는 모래알이었던 남자는, 지구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힘을 가진 자산가이자 권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백세완은 과거 그의 상사, 혹은 혼맥으로 맺어진 인척이기에 앞서,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적인 위해를 가했던 가해자였다.

백세완은 이를 악물었다.

보이지 않게 꽉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분노나 억울함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서 대답 한 번, 표정 한 번 잘못 했다가는 남은 인생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열리지 않는 입을 힘들게 떼었다.

“과거에는 제가…… 무척 경솔하고 어리석었습니다. 하루도 그때의 일을 반성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던데. 그냥 비 오는 날에 가끔씩 그때 백 실장한테 맞은 부위가 쑤실 때마다 생각나는 정도?”

“…….”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백세완은 딱딱하게 굳은 채, 저도 모르게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근처에서 듣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견딜 수 없는 개망신이다.

옛말에 ‘맞은 놈은 다리를 펴고 자고, 때린 놈은 오므리고 잔다.’는 말이 있다.

물론 현대에서 그 말은 큰 공감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맞은 놈은 억울해서 잠도 못 이룬다며 반박을 사고 있다.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당했을 때, 그것을 온전히 갚아주지 못한다면 분한 마음에 나날이 정신이 황폐해지는 것이다. 반대로 때린 놈은 자기가 그런 줄도 모른 채 잊고 잘만 살아간다.

하지만 백세완의 경우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

지난 몇 년 간, 그는 언제나 가슴을 졸이며 살아왔다.

처음 그룹에서 내쳐져 제주도로 쫓겨 왔을 때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는 억울함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억울함과 상실감은 아주 잠깐이었다.

제주도 유배 생활 중, 그는 처음에는 한서진의 행보에 눈과 귀를 닫아두고 있었다.

백철중 회장의 신임을 얻었으니 어차피 앞으로 인생은 순탄할 것이다. 이미 그룹에서 내쳐진 몸으로서, 한서진의 평탄한 인생을 알아봤자 속만 쓰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았다.

눈과 귀를 닫고 있어도, 그것을 뚫고 들어오는 소식들은 하나같이 굉장했다.

한서진은 어느 순간 국내 최고 부자를 뛰어넘은, 세계 최고 부자가 되어 있었다. 반도체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하여 굴지의 세계 전자업체들을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렸다.

그 하나를 두고 중국과 미국이 신경전을 벌였으며, 종래에는 한서진을 납치한 중국이 무너지는 일까지 생겨났다.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 거대한 중국이 겨우 한 명의 과학자를 납치한 책임을 물어 무너지고 말았다니.

표면적인 이유는 독재와 부패를 참지 못한 시민과 비한족 지역이 들고 일어난 것이지만, 세상은 그 배후에 미국이 있을 거라고 당연시하고 있었다.

감히 한서진을 납치한 책임을 물어, 미국은 중국을 밑에서부터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확인된 미국의 숨겨진 저력에 세계는 다시 한 번 전율했었다.

한서진은 미국 명예시민이자 국가적 영웅이 되었고, 그가 가진 부는 태고의 빅뱅처럼 끝없이 팽창해만 갔다.

자연 재해 예보 시스템을 만든 것, 샌프란시스코 참사를 예견하여 피해를 막아낸 것, 간 재생 치료제와 암 치료제 개발로 수많은 인명을 구한 것, HAMC를 세워 우주에 존재하는 희토류를 지구로 가져온 것…….

금 소행성 100억 톤을 가져왔을 때에는 더 이상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50경 달러, 이게 실제로 집계할 수 있는 재산 액수이긴 한 건가?

한국 일 년 예산을 500조 원으로 보았을 때, 자그마치 100만 년치 예산에 달하는 액수다.

웜홀까지는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미 백세완은 오래 전에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와 자신 사이에 벌어진 아득한 격차를.

아니, 그것은 이미 격차가 아니라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그때부터 백세완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한서진은 말 한 마디로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 그의 눈에, 자신은 그저 한 마리 보잘것없는 벌레에 불과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밟아서 터트릴 수 있는.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 잠시 까먹고 있는, 그런 벌레.

철저히 그를 구타했던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제주도의 고달픈 유배 생활 중에서도, 폭력으로서 그를 때려눕혔다는 과거는 이따금씩 엔돌핀이 솟게 하는 희미한 추억의 향취였다.

이래봬도 내가 옛날에 걔 한 번 보기 좋게 때려줬어! 라는 그런 자그마한 우월감. 누구에게 감히 말할 수도 없지만.

하지만 그 우월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으로 변질되었다.

언제 그가 자신을 찾아와서 밟아 터트릴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그는 식욕을 잃고, 나날이 말라갔다. 삶의 의욕도 잃었다.

차라리 그가 빨리 찾아와 자신에게 분을 풀기를 원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가린 채, 언제쯤 날아올지 모르는 매질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기분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모르는 이는 정말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매질을 당할 때가 왔다.

정확히는 그가 스스로 매를 청하러 온 것이지만.

“죄송합니다. 그저 그 말씀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제가 감히 미친 짓을 했습니다. 평생을 사죄해도 용서받지 못할 짓이란 건 압니다. 용서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그저 박사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분이 풀릴 때까지 뭐든 마음대로 해주시면 차라리 기쁘겠습니다.”

백세완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무릎을 꿇고 싶었지만 이런 좋은 자리에서 그랬다가는 대번에 주변에서 이상하게 바라본다.

당연히 결혼식 분위기를 망치면 한서진의 기분도 덩달아 최악이 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없다.

“그래요? 그럼 내가 그때 맞은 것처럼 때려도 됩니까? 사실 개 패듯이 맞은 건 난데 겨우 발길질 한 번으로 끝냈더니 내내 찜찜했거든.”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백세완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서진은 서늘한 눈으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색채를 잃은 웃음을 지었다.

‘작다.’

그를 내려다보며 느낀 기분이었다.

작아도 너무 작았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인물 중 하나로 생각했던 사람,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하기까지 했던 사람이.

그의 실체를 알게 되고, 그의 폭력에 맥없이 당하고, 그리고 그 분노를 합리적으로 삭이기까지 걸렸던 그 모든 시간들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너무나 작은 사람이었다.

그와 어울리고, 부딪치고 했던 일이 오히려 레노지안보다 더 희미한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용서의 감정이 아니다.

이런 작디작은 사람 때문에 과거 그렇게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상황에 속이 쓰렸을 뿐이다.

“백세완 씨, 어찌 되었든 인척이 됐네. 하나와는 오촌지간이라고 했던가?”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어쨌든 항렬로는 내 아랫사람이네. 잘 들어.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살아.”

“……예.”

백세완은 입술을 보이지 않게 꽉 깨물며,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집중했다.

“인척이니 뭐니 그런 걸로 뭐라도 하려고 했다는 말이 내 귀에 들려오면, 당장 미군 특수부대가 제주도를 덮칠 거야. 물론 미군 마크는 없을 거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

백세완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미군을 움직여서 목을 따버리겠다, 그런 의도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경고였다.

“가끔 심심하면 불러서 나도 손맛 좀 느껴볼 생각이니까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하고 있고. 가봐.”

한서진은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고, 백세완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뒷모습을 향해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기다렸던 매질은 결국 없었다.

앞으로도 다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매를 기다리며 불안에 떨어야 하리라.

송하나가 팔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정말 특수부대 보낼 거예요?”

“해본 말이야. 재밌잖아.”

“오랜만에 보니까 어때요? 전 그 사람이 오빠한테 한 짓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는데.”

“봐줄 마음은 없는데, 너무 작은 사람이긴 하더라. 내가 저렇게 작은 사람한테 왜 그렇게 당했지 생각하니 그게 더 어이없게 느껴져.”

한서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 네가 어떤 기분으로 친척들 초대했는지, 나도 지금 알 것 같아.”

“그래요? 알 것 같아요?”

“생각보다 기분 괜찮네. 벌벌 기는 모습도 보기 좋고.”

“앗, 저기 서나 언니 있어요. 인사하러 가요.”

그때 이서나 일행을 발견한 송하나는 팔을 좀 더 강하게 잡으며, 그쪽으로 이끌었다.

가족들과 함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서나는 한서진 커플이 다가오자 미소로 반겼다.

“한 박사님, 결혼 축하해요. 하나, 오늘 정말 예쁜데?”

“와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자, 이제 축의금 주세요.”

송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을 내밀자 이서나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뭐야, 오늘 축의금 안 받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언니는 각별한 사이니까 받아도 될 것 같아요. 자, 어서 주세요.”

“너무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를 남편으로 뒀으면서 가난한 언니 주머니 돈을 탐내니?”

“원래 9,999석 가진 사람이 1석 가진 사람 거 탐낸다고 했어요. 자, 어서 주세요.”

“9,999석 대 1석이 아니라 9,999석 대 1톨이라고 해야 비율이 얼추 맞을 것 같은데. 그럼 축의금으로 얼마 줄까?”

“계열사 서너 개 정도만 떼어 주시면 감사히 받을게요.”

“…….”

“그 정도면 약소한 거죠. 9,999석 부자인데요.”

“……하나야. 미안한데, 우리 그룹 요새 별로 사정이 안 좋아서…… 너도 이유는 알지? 그래서 축의금 그 정도까지 맞춰주는 것은 무리고…….”

“주식전환 회사채로 먼저 주셔도 괜찮은데.”

“……진심이니?”

“당연히 농담이죠.”

그제야 송하나는 내밀었던 두 손을 거둬들였다. 이서나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참았던 호흡을 뱉었다.

“너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진심인 줄 알았잖아. 방금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알아?”

“언니, 그거 알아요? 요새는 축의금 알아서 챙겨가는 게 대세래요.”

“…….”

“그러니 안 주셔도 괜찮아요. 나중에 제가 알아서 가져갈게요.”

이서나는 요즘 H컨설턴트가 한창 국내 대기업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을 떠올렸다. 다행히 진성그룹은 그 피의 사냥에서 비껴갈 수 있었지만, 혹시 설마…….

“걱정 마세요. 나중에 언니 은퇴하신 다음으로 미뤄둘게요.”

“……장난이지?”

“당연히 진심이죠.”

============================ 작품 후기 ============================

축의금 상자가 없는 이유는 셀프 수거 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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