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6 소유한다는 것 =========================================================================
“이로써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모두 앞에서 알립니다.”
정지원은 능숙하게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자, 그럼 놓칠 수 없죠? 신랑신부, 소중한 시간을 내서 참여해주신 하객분들 앞에서 키스!”
오오오오!
“아시죠? 입술만 맞대는 건 반칙입니다. 화끈한 미국 스타일로 갑시다!”
기대에 찬 환호가 사방에서 울렸다. 마치 모두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 된 함성이었다.
특히 신랑의 여동생인 한지혜는 아예 눈에 불을 켠 채 이 날을 위해 구매한 4K 캠코더를 들이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부의 아버지, 백철중마저 껄껄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으니, 키스를 원하는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키스해! 키스해!”
“찐하게! 찐하게!”
우렁찬 박수와 환호 속에서 송하나는 부끄러움에 볼이 빨개졌다. 한서진은 그녀가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오늘은 마음껏 기뻐해도 되는 날, 그는 하객들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진하게 키스를 했다. 작은 새가 부리를 부딪치는 듯한 가벼운 입맞춤, 버드키스를 진하게.
“우우우! 누가 그렇게 진하게 하랬냐!”
“신랑은 사회자의 지시를 왜곡하지 말지어다!”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한서진은 꿋꿋하게 키스했다.
“자, 신랑 신부의 뜨거운 키스 잘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를 향해 뜨거운 축하를 보내주세요!”
신랑신부 행진 대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둘러보며 열렬한 축하를 받는 것으로 정식 행사의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둘은 나란히 선 채, 사람들을 향해 웃는 얼굴로 미소를 보내며 축하에 화답했다.
“사랑해, 하나야.”
“저도 사랑해요, 오빠.”
“우리 앞으로 행복해지자.”
“네.”
한서진은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며 밝게 웃었다.
문득 아까 스쳐 지나갔던 목소리는 뭐였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적셨다. 환청과도 같았던, 처음 듣는 음색. 그것은 절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뭔가 아주 오래 된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나의 주인……. 그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린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통찰안이 보여주는 그녀의 진실은, 적합과 반려를 넘어선 ‘인연’, 그것뿐이었으니까.
‘인연.’
반려와는 다른 의미로 마음에 착 감기는 단어다. 반려가 딱딱한 의미로 무겁다면, 인연은 부드러우면서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듯 다가온다.
봄이 되면 순풍이 불어오듯이, 그런 자연스러운 순리. 마치 송하나와 자신의 관계가 그런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문득 멀리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신효진이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하얗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가볍지 않음에, 한서진도 미미한 경직이 뺨에 드리워졌다.
‘행복하세요.’
무거운 진심을 담은 그녀의 축하가 눈빛만으로도 전해진다.
한서진은 그녀가 알아볼 수 있도록 미미하게 끄덕이며, 전생에 못 다한 부부지연에 작별을 고했다.
기약 없는 제주도 유배령을 받았던 백씨 일가도 송하나의 결혼식 이야기는 들었다.
처음에 그들은 자신들이 결혼식에 초청될 일은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모가 있는 성진그룹과 손을 잡고 H그룹을 공중분해 시키려고 한 것 때문에 아버지가 얻은 분노는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여기에 아버지가 쓰러진 동안 송지현과 송하나 모녀에게 가한 박대 때문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가족 관계는 붕괴한 상태였다.
제주도 유배령,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분노를 풀기 위해 내린 조치다. 지키지 않아도 사실 상관은 없다. 아무리 직계비속이라지만 그런 제재를 가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얼마든지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 대신 내 돈 쓸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백철중의 개인 자산만 해도 3조 원이다. 여기에 H그룹이 가지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절대로 부친의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자유를 꿈꾼다면 얼마든지 제주도를 떠나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었다. 대신 그러면 아버지의 재산을 더 이상 한 푼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잃을 게 너무 많기에 그들은 감히 유배령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유배령을 따르면서도, 그들은 마음 한구석에 늘 불안함이 가득했다.
과연 아버지의 분노가 풀리기는 할까?
이대로 평생 그룹에 발도 못 붙인 채, 제주도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아버지는 유배령을 풀어줄 마음이 없이, 그저 하루하루 희망고문을 시행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백형진을 비롯한, 백철중의 2세들은 지난 몇 년 간 그런 불안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특히 그룹 오너 일가로서 누리던 권력과 명예에 대한 기억 때문에, 제주도에서 보내는 나날이 고통스러웠다. 그 박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제주도에서의 생활을 휴가처럼 즐기던 3세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장남 백형진의 아들 백진현이 몰래 제주도를 벗어나 서울 클럽에 놀러갔다가 발각된 이후, 3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철저하게 깨달았다.
백진현은 가문에서, 말 그대로 내쳐졌다.
“넌 앞으로 내 손주가 아니다.”
냉정히 선언한 백철중은 백진현이 자신의 손주로서 누리던 모든 것을 남김없이 거둬들였다.
심지어 백진현은 아직 나이가 젊은 터라, 자신의 앞으로 된 부동산이나 일체의 재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재산 증여에 관해서 백철중은 그 어떤 재벌들보다 보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철중은 부모가 몰래 생활비 지원을 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나에게 걸렸다가는 너희도 똑같은 꼴이 될 거란 걸 명심해라.”
모든 돈줄이 끊긴 백진현은 서울 친구집에서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순간 3세들은 육지에 대한 미련을 딱 끊었다.
제주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들 눈에 아르바이트 인생과 맞바꾼 백진현의 삶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자유로운 지옥보다는 구속받는 안락함이 훨씬 나았다.
사실 2세들이 이미 증여받은 자산만 해도 꽤 상당하다. 대한민국에서 나름 부유층으로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그러나 본래 누렸던 것, 그리고 앞으로 누리리라 기대하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초라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직계비속, 특히 2세들은 불안함에 떨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분노를 풀고, 자신들을 불러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한서진이 국제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어마어마한 인물이 되어갈수록 그런 기대감은 조금씩 커져 갔다.
한서진의 자산에 비하면 H그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니, 시간이 흐르면 자신들이 차지할 자리가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한서진이 보유한 100억 톤짜리 금 소행성 하나만 해도, H그룹 따위는 감히 비비지도 못한다.
그런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생겼으니, 송하나 눈에 H그룹이 얼마나 작아 보일 것인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가능성이 생겼다 여기고, 그들은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왔다.
생각지도 않은 송하나의 결혼식 초청, 그것을 그들은 미래 개선을 위한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친부는 오랜만에 자신들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당부를 전하기까지 했다.
“중요한 날이니 절대로 소란 피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다소 냉정한 경고였지만, 백형진 등 2세들은 오히려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재벌가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다시 열렸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치장하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스몰 웨딩이라더니……. 이게 어딜 봐서?’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만 초대했군.’
‘역시 클래스가 달라.’
2세는 물론이고 3세들도 하객들의 신분을 보고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국내 유력 인사 따위는 감히 발을 붙일 수도 없는 장소였다.
전현직 미국 대통령, 러시아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현직 대통령, 가문 자산이 수조 달러가 넘어가는 아랍의 왕족, 영국 왕족…….
그야말로 로열 중의 로열, 귀빈 중의 귀빈들만 골라서 모아놓은 자리였던 것이다. 흔히 이런 자리에서 한두 명은 있을 법한, 할리우드 톱스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객들의 면모를 보며 그들은 실감했다.
송하나와 자신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까마득한 격차가 벌어졌다고. 아니, 격차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비교관계가 되었다고.
그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첩의 자식이라며 멸시했던 옛날의 기억이 이제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과오로 남았다.
그때 왜 그랬지. 대체 왜 그랬지. 하고.
우열 관계를 정립하고 나니, 오히려 진심으로 송하나의 행복을 축하해줄 수 있었다. 그녀가 행복해져야 자신들도 H그룹에서 어떻게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비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신랑신부가 하객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그들 앞에 서는 순간이 왔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해요, 매부.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랍니다.”
백형진이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꺼냈다.
나이로 치면 장인어른뻘이 되지만, 엄밀히 말해서 여동생의 남편이 아닌가. 물론 배다른 여동생이지만.
송하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인사했다.
“그래도 제주도에서 식 올린 거라 오시기에는 편하셨을 것 같아요.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하네요.”
“…….”
순간 백형진은 물론이고, 다른 2세들의 얼굴에도 실낱같은 경직이 스치고 지나갔다. 송하나는 그것을 전혀 모르는 얼굴로 태연히 말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저희 행복하게 잘 살게요. 큰 오라버니.”
“크흠……. 밝은 얼굴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네 어머니께도 안부 전해주렴.”
“그럼요.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예요. 아니면 아예 같이 직접 뵙는 건 어떨까요?”
정말 팔을 잡고 데려갈 듯이 굴자 백형진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반 걸음 뺐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구나. 너도 다른 하객분들에게 인사해야 하지 않니?”
“아, 그렇죠. 그럼 다음에 꼭 같이 인사드리러 가요.”
송하나는 끝까지 웃는 얼굴로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독기나 원망기, 혹은 깔보는 기색이 전혀 없이, 끝까지 예의바른 표정이었다. 덕분에 송하나가 떠난 후에도 그들은 내내 찝찝한 느낌에 시달려야 했다.
“하나가 우리한테 딱히 원망은 안 품은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찝찝하게 느껴지죠?”
“너무 큰 사람이 되어서 과거의 사소한 은원 같은 건 이제 아무렇지 않은 거지.”
“……그런 거면 좋겠는데.”
헷갈려 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다시 이동한 한서진은 아주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이제는 마주치는 게 반갑기까지 한, 아련한 추억 속의 얼굴을.
“이거이거, 백세완 실장 아닙니까?”
“한…… 서진 박사님.”
============================ 작품 후기 ============================
이거이거.
넘나 반가운 우리 백 실장님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