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4 소유한다는 것 =========================================================================
한서진은 딸꾹질이 나올 뻔했다.
물론 백철중이 그런 질문을 한 게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도 몇 번씩 은근히 결혼을 서둘렀으면 하는 뜻을 내비쳤다.
다만 송하나가 아직 스물 초반 밖에 안 되는, 너무 어린 나이다 보니 둘 다 미뤄왔을 뿐이다. 아직은 결혼보다는 연애가 더 좋은 시기다 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 공격에 한서진은 잠시 멈칫했으나, 곧 안색을 바로 잡았다.
“하나가 아직 원하지 않아서요.”
“에잉,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원하지 않은 거겠지. 우리 하나는 자네가 하루빨리 청혼해주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거 모르나?”
그럴 리가.
한서진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여겼다. 몇 번이나 결혼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아직은 너무 이르다’며 미뤄온 것은 송하나 쪽인데.
‘어지간히 불안하신가 보군.’
아마도 둘의 문제로 가장 불안에 떠는 건 백철중 본인일 것이다.
지구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남자가 예비 사위라는 것은 어깨가 으쓱해질 만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할 수도 있는 일이니. 탐을 내는 처자들이 지구 전체에 널려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저번에 유럽 명문가 아가씨들 사교 모임에 초청받았다면서? 어땠나?”
“제가요? 그런 적 없습니다만.”
“어허, 내가 이미 들은 게 있는데 시치미를 뗄 건가?”
“……정말 전 아는 게 없습니다.”
한서진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정했다.
전 세계에서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초청장이 날아온다. 그걸 일일이 분류하는 것은 비서실에서 하는 일이고, 실제로 그의 손까지 들어오는 초청장은 거의 없다.
“우리 하나, 고등학교 때부터 자네만 바라보고 살아온 아이일세. 절대로 한눈팔아선 안 되네. 잘 알겠지?”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제가 하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아시잖아요?”
“자네는 믿는데 자네 주변의 여자들은 못 믿겠어서 말이야. 이해해주게.”
“제 주변에 여자라고는 하나하고 지혜 밖에 없습니다.”
백철중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추궁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들은 것하고는 다르군. 그 신효진이라는 여자는 그럼 뭔가?”
“……!”
한서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 장인어른이 신효진을 대체 어떻게 알고?
“내가 좀 알아봤네. 우리 H그룹 백화점 전속 모델까지 했던 친구라며? 사진도 봤는데 아주 참하고 예쁘게 생겼더군. 재벌가 며느리로 나무랄 데가 없는 관상에 미모를 갖췄어.”
“…….”
“그런 여자 모델이 왜 자네 회사에서 자네 비서로 일하고 있는 건지…….”
“효진 씨는 하나 친구인데요.”
“……?”
“설마 모르셨습니까? 둘이 친구입니다.”
백철중의 표정이 한 방 먹은 듯 새빨갛게 변했다. 안색을 보아하니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크흠! 그 여자가 우리 하나 친구라고……?”
“예, 둘이 얼마나 친한데요.”
“아아, 그래서 자네가 비서로 데리고 있는 거구만.”
“뭐, 그렇습니다.”
한서진은 대답을 하면서 내심 찔렸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진실 속에 거짓을 위장한 것 역시 사실이니까.
‘회장님도 참.’
마음만 먹는다면 송하나와 신효진이 친구라는 것쯤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정작 그런 쉬운 사항을 빠뜨리다니. 굴지의 재벌 기업 총수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덜렁거리는 면모를 보았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야말로 오해를…….”
“그래서 하나는 언제 데려갈 건가? 올해 안으로 데려가게. 나도 과년한 딸년이 집에서 밥만 축내는 꼴 보고 있으니 속이 터지겠단 말일세.”
“하나 아직 졸업반도 못 올라갔는데 과년하다니요…….”
“재벌가에서 그 정도면 늦은 거야. 노처녀란 말일세.”
재벌가든 뭐든, 22살이 노처녀라는 것은 대체 어느 동네 계산법이란 말인가.
“이제 올해는 다 간 거나 마찬가지니, 내년에는 꼭 데려가게. 알았나?”
“……그러시는 거야. 웃겨서 혼났어, 아주.”
한서진과 송하나는 둥근 가죽 소파에 나란히 누운 채, 커다란 창을 통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미로운 조명이 야경이 깔린 정원을 은은하게 비춘다.
“아빠도 참, 그렇게 절 집에서 못 쫓아내서 안달이시네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음이 뒤따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22살인데 노처녀가 뭐예요.”
“그냥 말 나온 김에 오늘부터 여기서 살래?”
“안 돼요. 그건.”
무심코 대답했던 그녀는 조그맣게 덧붙였다.
“아직 정식으로 결혼한 건 아니잖아요…….”
“그럼 결혼하면 되잖아.”
“솔직히 말해도 돼요?”
“당연하지. 뭔데?”
“너무 일찍 결혼하면 오빠가 빨리 질릴까 봐 겁나요. 남자들은 잡은 고기에는 흥미를 잃는다면서요?”
예전에도 비슷한 식으로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때는 농담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는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한서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럴 남자로 보여? 몇 년을 봐왔는데 아직 날 몰라?”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요.”
“내가 결혼 생활에 질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장담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미루는 거라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이죠?”
“만약 그런 일 생기면 에스코너 지분 전부 다 너한테 줄게. 아,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안 생기겠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구요. 마음만으로도 감동이에요.”
송하나는 가슴에 뺨을 기댄 채, 조용히 올려다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할래요. 결혼.”
“어, 잠깐만?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할게요, 결혼.”
“진짜지? 무르기 없기다?”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어떻게 물러요.”
한서진은 만세를 부르듯이 머리 위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한 5년 정도는 더 깨를 볶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결혼하네?”
결혼 소식을 들은 한지혜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애초에 약혼한 지 제법 되었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설마 속도위반은 아니지? 하나가 벌써 애엄마가 되기에는 그 나이가 너무 아까워. 아직 한참 싱싱할 때인데.”
“원래 하나 같은 여자들은 애를 낳은 뒤에 더 예뻐져. 몰랐냐?”
“아, 서러운 자본주의의 냉정함이여.”
“니가 할 말은 아니다. 니 오빠가 누군지를 생각해.”
“근데 결혼식은 어떻게 할 거야?”
아무렇지 않게 찔러 들어온 질문에 한서진은 어깨만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뭘 어떻게 해? 그냥 하는 거지.”
“혼주로 생모 앉힐 건 아니지?”
“엄마가 아니라 생모라 호칭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확인차 물어본 거야. 혹시나 결혼한답시고 마음이 약해졌나 해서.”
생모와 얼굴을 안 본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현재 생모는 경호서비스 업체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고 있는 중이다. 생활 자체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점이 없다. 하지만 한서진의 모친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빈곤한 거나 마찬가지다.
한지혜는 최소한의 생활 여건, 그리고 경호 시스템만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서진의 모친이기에 돈을 노린 단체들에게 납치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연락 자주 와?”
“많이 뜸해지긴 했어.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오네. 오빠는?”
“내 번호 모르잖아, 생모.”
“저번에 한 번 언론 플레이 하려고 해서 내가 막았어. 김 비서 보내서 적당히 윽박지르니 조용해지더라고.”
“잊을 만하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일깨워주시니 차라리 그 점은 깔끔해서 좋네.”
한서진은 가볍게 쓴웃음만 지었다.
생모가 자신의 가족으로서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일은 아마 평생 없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손주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언론 매체로서만 아들과 딸 소식을 접할 수 있으리라.
백철중 부부도 결혼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반겼다.
특히 백철중은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들뜬 기분을 여과 없이 드러내보였다.
“잘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아니, 요즘 누가 약혼을 1년 이상 질질 끄나? 약혼이 뭔가? 결혼하기로 약속한 거 아닌가? 약속을 했으면 후딱 해치워야지, 1년이고 2년이고 질질 끄는 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닌가? 안 그런가?”
“저기,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어허, 어른이 말을 하면 좀 듣게.”
“…….”
“그래, 식은 언제 할 생각인가? 굳이 올해를 넘길 필요가 있나? 우리 하나도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면사포 써야 더 예쁠 텐데.”
옆에서 송지현이 보다 못해서 만류하고 나섰다.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듯이 해먹는 게 어디 있어요. 올해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내년에 길일 잡아서 느긋하게 하면 되지, 뭐가 그리 호들갑이에요?”
“내 나이가 몇 인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야.”
“제가 보기에 50년은 더 정정할 것 같은데요? 다른 회장님들이 들으면 어처구니없다고 웃어요. 제주도에서 요양 중인 이창용 회장님을 생각해봐요.”
“아, 그러고 보니 이창용 그 친구가 오늘 내일 한댔지?”
이창용, 이서나의 부친이자 한때 진성그룹의 회장이었던 사람.
그 오랜 이름에 한서진은 아련한 옛날 일이 생각났다. 한때는 그 이름이 무척 거대하게 느껴진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꼈던 기억 자체가 우습게 생각된다.
“결혼한다면서요? 축하해요.”
“이제 드디어 품절남 되는 건가요? 전 세계 많은 여성분들이 땅을 치고 울겠네.”
“송하나 씨라면 뭐,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분 말고 누가 박사님 배필로 어울리겠어요?”
“축하드립니다, 박사님.”
결혼 소식이 알려지자 그 후로도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축하한다며 인사를 해왔다. 아직 청첩장은커녕 결혼식 날짜를 잡은 것도 아닌데.
‘대체 누가 퍼트리고 다니는 거지?’
백철중? 아니면 한지혜?
그 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그리고 결혼 축하를 받기에 제일 껄끄러운 상대도 만났다.
“축하드려요, 박사님.”
신효진은 하얗게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한서진은 그녀의 목소리 끝에서 울리는 떨림을 느꼈다. 지금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한서진도 힘들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생생한 과거, 레노지안의 기억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비록 전생의 일이지만 자신은 그녀의 반려로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것을 오롯한 현실로 접해온 그녀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 그리고 현재는 현재죠.”
“…….”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을 하기 힘들었네요.”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후 신효진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만약 제가 더 빨리 박사님을 만났더라면, 우리 현재는 바뀔 수 있었을까요?”
그랬을 것이다. 그 대답이 입안을 맴돌았으나, 끝내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이제 와서 그렇다고 말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그 어색한 침묵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좋은 대답이 되었던 모양이다. 안색이 조금이나마 밝아졌으니까.
“행복하세요, 리온.”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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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진, 나를 원망해선 안 돼.
편집장님을 원망해.....